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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2009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모교 국악과 창설한 李惠求명예교수



 "한국음악을 평생 연구하다 보니 학술상도 받고, 박사학위도 받고, 문화훈장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功名心을 버리고 오로지 국악에 관한 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푸느라 1백살이 되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작년 5월 고맙게도 제자들이 `白壽 頌祝嘉會'를 열어주고 1천60쪽에 달하는 송축논문집을 선물해줘서 보람을 느낍니다."

 `한국음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모교 국악과 명예교수인 晩堂 李惠求(경성제대26~31)옹은 일생동안 한국음악을 서양음악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한국음악학의 아버지로 존경받아왔다.

 올해로 만 1백세가 된 李惠求옹을 만나기 위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물씬 풍기던 3월의 어느 날, 그의 자택을 찾았다.

 조금은 불편한 몸 때문인지 기자를 배려하고자 컴퓨터로 정리한 두 장 짜리 회고록을 건네줬다. 그의 지나온 세월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하루 일과를 물어보니 특별한 것은 없지만, 하나하나 공들이는 시간이 많다.

 "아침 7시에 일어나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난밤 굳어진 머리를 풀어줘요. 그리고 TV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잘 들을 수 없다. 그래서 TV는 주로 헤드라인이 나오는 뉴스와 자막이 있는 외국 드라마 그리고 스포츠를 즐겨 본다.) 11시에 아침을 먹은 뒤 2시간 동안 일간지 2개를 정독해요. 그리고는 2~3시간 동안 논문을 집필하는 작업을 합니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은 뒤 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하죠."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인 李옹은 4남매 중 막내다. 셋째 형님 덕분에 그는 톨스토이와 같은 대가들의 원작소설을 원 없이 탐독했고,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접했으며 대학시절엔 관현악단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올라 연주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국내 최초 비올라 연주자

 "암울했던 일제시절을 보내다 보니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어요. 그래서 평소 영문학을 좋아해 경성제대 문학과에 입학했는데, 졸업하니 취직이 안되더라고요. 1년간 백수로 지내다 경성방송국에서 아나운서 모집공고를 보곤 덜컹 들어가게 됐죠. 그런데 당시 일본방송만 틀어주니 누가 방송을 들어요. 그래서 한국방송을 편성해 음악ㆍ연예담당자로 한국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최선을 다했죠."

 그렇게 李옹은 자연스럽게 한국 전통음악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는 방송에 洪蘭坡선생을 불러들여 관현악단을 만들었고, 방송에서 창작가요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당시 천시받았던 한국 음악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준 것도 그였다. 

 1943년 생애 첫 학술논문인 `梁禁新調의 四調에 대해서'를 발간했는데, 이 논문이 일본 음악학자의 눈에 띄었다. 일본 음악학자의 환갑기념논문집인 `동아음악논총'에 그의 학술논문이 실리면서 국악에 대한 세계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고악보를 해석하고 그 관계를 규명하는 등 문화사 측면이 아닌 이론자체를 연구하고 싶었어요. 한국사람이 쓴 개론서가 없더라고요. 이게 내가 해야할 업이라고 생각하고 1947년 9월 모교 예술대학 음악부 교수로 부임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죠."

 첫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14년이 흐른 1957년, 드디어 첫 저서인 `한국음악연구'가 출간됐다. 이를 출간하는 데만 엄청난 인내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논문 집필할 때 가장 행복"

 "처음에 출판사에서 한국음악 책은 안 팔린다고 거절했어요. 그리고 서울대에서도 조판비를 준다고 해도 또 거절하더군요. 세 번째에 아세아재단에서 종이값을 대준다고 하니 겨우 출판승낙을 하더군요."

 이듬해 그의 연구가 빛을 발하게 되면서 뜻밖에 한국인 최초로 여러 국제음악학회에 참석하게 됐다. 이때 외국의 저명학자들을 만나 한국음악을 소개하고 자신이 출판한 책을 증정할 수 있었다. 1959년 모교에서 한국음악 학위논문으로는 첫 박사학위를 받은 李옹은 그 해 3월 모교에 국악과를 창설했고, 1970년 모교 음대 학장 시절엔 교수들의 연구능력 향상에 헌신했다. 

 "교수가 수험생들의 개인레슨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자신의 공연준비에도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도록 정례 교수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공연 휴식시간을 1시간으로 연장해 내빈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가든파티를 준비하는 등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교에서 정년퇴임 한 후에도 그는 20년 가까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국악의 이해와 계몽에 앞장서며 한국음악 문화의 창조적인 기틀을 세우는 데 평생을 바친 李옹의 계획은 현재 보완 중인 논문집을 하루빨리 출간하는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당부의 말을 부탁하자 "허욕에 들뜨지 말고 착실하게 각자 좋아하는 일에 한 우물을 파라"고 답했다.

 오늘도 李옹은 가장 행복한 시간인 논문 작업을 하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되뇐다.

 `해는 저물어 가고, 모르는 것은 많이 남았다.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려고 마음이 급하다. 그것은 늙은이의 탐욕일까?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마도 인간인가 보다.' <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