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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2009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모교 초일류 인재육성 프로젝트에 10억원 출연



 - 여기 오면서 어떤 질문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소통을 하면 될 거란 마음으로 왔습니다.

 "소통이란 말은 하수구 막힌 것 뚫는 게 소통이죠. 왜 소통이란 말을 쓰는지 모르겠어요.(웃음)"


 - 선배님의 인생관과 발자취, 앞으로의 미래 비전 등을 듣는 거니깐…. 까칠한 건 끝에서 한 두 가지만 묻겠습니다.

 "李기자가 한겨레신문식으로 취재할 것 같아서…."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그는 이내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 오늘 아침 몇 시에 사무실 도착하셨어요.

 "늦게 왔어요. 보통 때는 8시 전에 오지만 요즘은 일이 없으니깐 나오고 싶을 때 나와요."


 - 출근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예전에는 회사에서 뭘 할 것인가 생각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시간을 즐겁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요."


 - 삼성에서 청춘을 바치고 지금도 그러시죠.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남이 평가해 줘야지, 자신이 평가하는 것은…. 42년간 한 평생을 삼성에서 후회 없이 일했죠. 개인적으로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삼성전자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12년 정도 총괄 CEO를 맡긴 힘들죠.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젊은 직장인들의 롤모델이신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러면서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현재를 위해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 늘 고민했어요. 단기적으로 보면 매출이 늘어야 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인재육성, 기술개발이 중요한 과제였죠. 우선 오늘, 금년이 있어야 내년이 있고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 매출을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어요.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위기고, 안 될 때는 잘 안되기 때문에 위기라고 늘 생각했죠."


 - 잘 될 때도 위기다?

 "잘 안 될 때는 모두 긴장을 하니깐 괜찮지만, 잘 될 때는 방심을 하게 돼 방만해지고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 대비를 못해요. 많은 기업들이 최고로 이익을 낸 다음 해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죠."


 - 현재 우리 경제사정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죠.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는, 물론 미국에 많은 부분 
기인하지만, 왜 일어났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일반론적인 이야기지만, 현장을 40년 이상 지키셨으니깐 오히려 학자들보다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습니다.


 "남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나는 잃어버린 20년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20년 동안 고속성장해 오던 기운과 관성이 확 꺾였거든요. 1960~70년대 개발연대를 민주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지만 라인강의 기적과도 비교가 안돼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1차년도에 국민소득이 90달러 정도에서 1996년 1만 달러, 2008년 2만 달러이니 40년만에 상상할 수 없는 성장을 한 것 아닙니까. 우리보다 2백여 년에서 1백여 년 앞서 산업화를 한 미국, 영국, 일본의 국민소득이 1만 달러 된 게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라고요. 그렇게 빠르게 성장해오던 기세가 지난 20년 동안 이념갈등 등의 문제로 서서히 꺾이지 않았습니까."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회 전반의 가치관과 윤리관, 지배층의 역사인식, 법과 제도 등의 사회지배구조는 인류 역사의 변화와 발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기술이 발명되고 아무리 뛰어난 인재를 가진 사회라도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부족하고 폐쇄적이고 불공정, 불투명한 사회지배구조에서는 혁신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종교단체, 학교도 지배구조가 있고 시민단체도 지배구조가 있지 않습니까? 다른 것 다 내버려두고 오직 기업지배구조만 갖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봐요. 여의도 군상들, 용산 갔다가 청계천 갔다가 1년을 낭비했던 그 사람들 지배구조를 보십시오."

 필자가 윗도리 왼쪽 윗 부분을 가리키며 `배지'들 말씀이냐고 했더니, 尹고문은 "그렇다"고 했다.

 그는 "기업들이 (시민단체로부터) 많이 공격을 받죠"라며 시민단체에 대해 비판을 해갔다. 이즈음 "담배 좀 피우겠다"며 `에세'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실은 나도 참여연대, 한겨레신문 좋아해요. 고려대 張夏成교수(그는 소액주주를 대신해 삼성전자 주총을 13시간 이상 끌고 간 적도 있다)하고도 얼마나 친하다고요. 학장 돼서 강의를 부탁해 특강도 하고 그래요."

 이번에는 그가 화제를 바꿨다.

 "우리 기업들이 대단합니다. 미국 자동차 `빅3'가 다 저런데, 우리 자동차 회사들은 건재하고 있잖아요. WBC에 출전한 야구선수들, 김연아 선수 보십시오. 국민들이 열심히 하고 우수하다는 증거거든요. 그런데 조직이나 사회나 국민들의 에너지를 모을 꿈과 비전이 없어요."


 - 국민적인 에너지가 한데 모아져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없어 보이죠. 후손들을 위해 뭘 해야겠다는 걸 별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이 열심히 일할 때만 해도 그런 걸 염두에 둔 것 아닙니까.

 "일류가 되려면 일류를 따라가면 된다, 그게 달성되고 난 후에는 초일류로 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타깃은 뭐냐, 그리고 어떻게 할거냐 그게 있어야 되거든요."

 그에게 42년간 삼성전자 재직 중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66년에 입사했는데, 삼성전자가 만들어진 게 69년 1월입니다. 당시 금성사, 대한전선, 동남전기가 있으니깐 정부가 너희 제품은 국내 판매하지 말고 전량 수출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합작회사를 만들려고 미국, 유럽 업체들을 찾아다녔는데 문전박대 당하고 일본의 산요(三洋)전기, NEC와 합작을 했어요. 당시 산요 반도체공장에서 4개월, TV공장에서 4개월, 그 뒤 미쓰비시 칼라TV공장에서 6개월 연수를 받았어요. 세 번 받으면서 느낀 것은 내 세대에는 한국이 일본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겠다고 확신했어요. 81년 VTR사업본부장을 맡았는데, 이 분야가 워낙 기술적으로 어렵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일본에 가서 VTR공장을 견학하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면서 사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기술도, 돈도, 기술자도 없고. 그때는 아날로그시대인데 기술의 축적, 경험의 축적, 근면성이 아주 중요했죠. 아날로그시대에서는 10년 떨어진 것은 아무리 열심히 따라잡으려 해도 격차를 줄일 수가 없었어요."

 어제 일을 기억하듯이 상황설명도 아주 구체적으로 이어갔다.

 "디지털시대로 오면서 그게 바뀌었죠. 창의력을 갖고 스피드 있게 하면 갈 수 있었죠. 우리는 IMF 때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했고,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구조조정을 적당히 하고 넘어갔어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해 방심하고 자만했죠. 잘 될 때가 위험하다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생각했죠. `아날로그시대에 10년 차이 나면 그 격차를 잡을 수 없지만,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디지털시대는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두뇌와 창의력, 스피드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엄청 준비를 했습니다. 90년대부터 준비해서 2000년대 넘어오면서 반도체 등에서 일본을 앞서나가기 시작했죠. 핸드폰도 아날로그 때는 모토로라가 석권했는데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고가전략을 펴 모토로라도 따라잡았고요. 그 다음에 LCD, PDP를 세계 일류로 만들자고 해서 디자인, 성능 모든 면에 심혈을 기울여 소니를 앞섰잖아요. 40년 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이뤘습니다."


 - 선배님 세대에 일본을 제쳤군요.

 "그렇죠. 소니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죠. 가장 중요한 건 SCM(Supply Chain Management : 공급망 관리―개발, 구매조달, 생산, 물류, 판매 등 전체 공급망을 말함)을 잘 구축한 일입니다.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를 전산망으로 하는데 세계에서 우리가 톱클래스입니다. 독일의 SAP사 것을 쓰는데 12~13년 동안 3조원 정도가 들었어요. 소니가 삼성전자를 벤치마킹해 이제 그것을 알고 따라오려고 하는데, 쉽지 않을 겁니다."


 - 계단 밟듯이 때로는 성큼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더디게 가기도 했겠지요. 그 와중에 좌절도 겪었을 것 같고요.

 "많죠. 예를 들면 1ㆍ2차 오일쇼크, 그 다음에 IMF 났을 때는 정말 망하는 줄 알았어요. 삼성전자 설립 전부터 기획하던 사람이 7~8명 있었는데 저 혼자만 남았죠. 사원시절 당시 수원 공장부지 사진 찍고 물 뜨러 다니고 했는데 총괄대표를 맡아 `내가 물 말아먹는구나' 싶더라고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데, 해보고 망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공장을 매각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했죠. 그때가 가장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뷰가 1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화제를 돌렸다.




 - 좌우명이 혹시 있으신지요.

 "正心, 誠意, 忍耐, 感謝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성을 다하며 어려움을 참고 이겨나가는 것,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 그런데 모든 것에 감사하기는 참 어렵죠."


 - 집무실 들어오는데 `格物致知'라고 적혀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공계 출신 CEO인 고문님에게 딱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격물치지를 아시네? 저거는 하나의 도구고요. `大學'의 정수가 격물치지입니다."

 20평 남짓 그의 집무실엔 클린턴 미국 前대통령, MS의 빌게이츠 회장, 영국의 토니 블레어 前총리, 그리고 李明博대통령 등과 찍은 사진이 `한국을 빛낸 엔지니어 60인' 선정 기념패와 함께 진열돼 있다. 또 높이 2m, 가로 8m 책장과 책상 위에 책이 빼곡이 꽂혀있다. 일본어판 `現代電氣辭典'이 눈에 띈다. 얼른 봐도 3백권은 넘을 듯하다. 그는 "집에는 미술, 역사 관련 책이 많고 여기는 회사, 경영, 경제 관련 책이 많다"고 했다.


 - 최근에 읽고 계신 책은.

 "`부의 탄생'과 중국 화교가 쓴 `화폐의 전쟁'을 읽고 있어요. 요새는 경제와 산업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전체가 그것으로 인해 변화하고, 그 부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 산업사와 경제사 분야 자료들이 많아요. 경제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역사학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 요즘 성적 좋은 학생들이 의대를 지원하고 그 나머지가 공대에 가는 게 속상하시죠.

 "지금 의대에 간 학생들은 졸업할 때 되면 의사들이 너무 많이 배출돼 취직자리도 많지 않을 거예요. 쉽게 돈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겠지만 요즘은 개업하기가 힘들잖아요. 옛날에는 전문적인 기술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기계가 거의 하지 않습니까. 영상기계가 대다수죠. MRI, 울트라 소닉, CT 등 그런 장비를 개인 병원이 갖추기 힘들죠. 그렇다고 종합병원이 계속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요."


 - 미술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미술 관련 친목 모임, 신작회 멤버시죠.

 "어제 저녁에도 인사동에서 黃昌圭(전기공학72~76)사장 등과 저녁 6시부터 소주 마시고 그랬어요. 신작회 회원 18명인가 왔어요."


 - 인상파 그림을 좋아하신다고요.

 "추상화는 우리같이 옛날 사람들 보기엔 부담이 가죠. 고흐,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등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이 좋은 게 많아요. 파리에서 니스 가는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프로방스 지역이 있는데 늦은 봄에 가면 전체가 노란색이에요. 보리와 유채꽃이 만발하죠. 구릉길이 구불구불 그대로 있어요. 그런 것을 보고 그리니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겁니다. 휘어 있는 것 같고요. 빛의 변화와 프랑스 지형을 이해한다면 그게 참 사실적이란 생각을 하게 돼요."


 - 동창들과는 자주 만나십니까.

 "동창들과는 자주 못 만나요. 바쁘다보니까."


 - 자제 분이 유명 탤런트죠.(윤태영ㆍ드라마 태왕사신기 출연) 후원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데, 맡겨야죠. 집안에 그런 소질 있는 사람이 없는데…. 다른 일은 본인이 조금 못해도 여러 사람과 같이 해 가면 되지만, 이 직업은 자기가 뛰어나지 못하면 성공 못 하잖습니까. 기질도 있어야 하고요."


 - 그런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아닌가요. 부가가치가 무한대로 갈 수 있고요. 이를테면, 외국의 유명 배우를 초청하려면 개런티를 엄청 줘야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제조기업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을 것 같아요. `CEO 윤종용'이란 책에 보니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해 고문님이 한 챕터 돼 있더군요.

 "삼성에 영상사업단이라고 있었어요. VTR사업을 하면서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느껴 진출한 사업이죠. 삼성전자에서 하긴 무리고 당시 스타맥스란 회사를 만들어서 콘텐츠를 외국에서 구입해 더빙해서 팔고 하다가 삼성 영상사업단으로 넘겨줬죠. 영화 `쉬리'라고 있었죠? 당시 영화 한 편에 7억, 8억 드는데 그 영화가 13억원인가 들었어요. 삼성에서 하다 보니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마케팅해서 성공한 케이스죠. 국산영화(제작시스템)의 터닝포인트가 됐죠."

 다시 화제를 돌렸다.


 - 상당히 엄하신 편이죠.

 "조직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하들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 동창회나 모교 등에 거액을 기부하셨던데, 일정하게 기부하는 곳이 있습니까.

 "한국공학한림원 이사장과 회장을 맡으면서 초ㆍ중ㆍ고교에 매년 책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1년에 2천만원 정도 수준일 겁니다. 지난번에 모교 초일류 인재육성 프로젝트 프로그램에 시드머니로 10억원을 냈고요. 목표가 5백억원이라고 합니다."


 - 큰 금액이군요.

 "나에게는 큰 돈이지만 서울대학교에는 큰 돈은 아니죠. 10억원 정도 내고 뭐…. 李長茂총장과 朴吾銖교수는 나중에 더 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은 안 하지만.(웃음)"


 - 모교 발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셨는데, 모교가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학이 발전하려면 좋은 학생, 좋은 교수, 돈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제도가 좋아야겠죠. 내가 볼 때는 학생, 교수는 좋은데 미국의 일류대학에 비해 돈이 적어요. 선배들 혹은 사회로부터 많은 기부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사회는 기부문화가 아직 덜 형성된 듯 싶어요.

 또 모교에 전문 기금 매니저가 필요해요. 하버드는 교수가 아닌 기금모금 전문 책임자가 있죠. 그 사람 중심으로 모금을 하고, 기부한 사람에게는 학교 출판물과 생일 때 축전도 보내주고 학교 행사에 초청하는 등 관심을 유도하죠. 교수가 하면 선후배를 찾아다니기가 좋긴 한데, 장기적으로 보면 전담할 수 있는 전문 매니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모교에서 그렇게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 총장 직선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대예요. 학교에 대해 객관적인 사람들이 추천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짜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게 옳다고 봐요. 교수들이 하다보니깐 학생 많은 단과대학 쪽이 유리하잖아요. 어느 과는 좀 줄이고 어느 과는 늘이려고 한다, 그런 이야기했다가는 큰 일 난다는 거죠. 교수가 많은 단과대학이 항상 유리하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尹고문은 "미국 같으면 본교 출신 교수가 30% 이내인 것이 불문율이며 그래야 발전이 있는 것"이라며 "미국은 혼혈사회이기 때문에 비비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필자에게 "비비는 것이 뭔지 아냐"고 물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입사 동기 중에 A가 과장이 되면 B는 며칠씩 회사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죠. 같은 동문들만 모이면 그렇게 되고, 고참 교수들이 신임 교수들 일 다 시키고 자기는 안하고, 서로 평가가 안 되잖습니까. 혼혈이 안 되면 민족이든 회사든 국가든 발전이 거의 없습니다. 꼭 서울대 총장이 서울대 출신 가운데서만 나오란 법은 없잖아요? 다른 곳에 좋은 사람 있는데 직선제하면 들어올 수가 없죠. 순혈주의를 버려야 모교 발전이 있습니다."


 - 멘토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신지요.

 "모르겠어요. 바쁘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열심히 살려고 했고 좋은 선배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분들은 농경사회 속에서 성장해 농경사회 마인드를 갖고 있어 생각이 많이 달랐죠. 가능하면 과거를 부정하고 살았어요. 인정하면 따라가게 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니까요."


 - 초반에 질문을 드렸는데 답변을 못 들었습니다. 우리사회 위기의 진단 그리고 처방을 좀 내주시죠.

 "그만한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회가 지금 지배구조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가치관, 사고방식, 룰이 바뀌어야 된다고 봐요. 제일 중요한 게 사회적 통합인데 모호한 말이죠.

 사회 지도층들이 솔선수범해서 사회통합을 해야겠죠. 여의도의 군상들, 저들이 앉아서 저러는 한 되질 않죠. 국회의원 스스로 반성해야지,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언론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시야도 좁고 정보도 적었지만 욕을 얻어먹더라도 바른말을 하려고 했죠. 지금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지, 몰라서 안 하는지 시민단체, 일반 여론, 정치권 눈치보고…, 욕을 먹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합니다. 역사발전은 도구발명과 과학기술 혁신에서 온 겁니다. 인문학자, 사회학자들은 사회제도가 어떻고 그러는데, 경제가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겁니다. 盧武鉉 前대통령이 핸드폰,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대통령 됐겠어요? 그때 한나라당이 날 보고 삼성이 핸드폰 잘 만들어 대선에서 졌다고 그러더군요."

 그는 골프는 핸디 12 정도인데 요즘은 그렇게 못 친다고 했다. 인터뷰가 어느새 두 시간을 넘긴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제2의 인생을 사신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요. 젊은 때는 본래 철학, 물리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밥 먹지 못할 것 같고 또 수학적인 머리가 모자라서 그만뒀어요. 다시 하더라도 이런 일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현장혁신의 리더, `CEO 윤종용'다운 마무리였다.

                                                                                                          <사진=李五峰논설위원ㆍ정리=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