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373호 2009년 4월] 뉴스 모교소식

그 4월이 오면 金致浩가 그리워진다




 또 한 번의 4ㆍ19가 다가온다. 4월 20일이 되면 그리운 친구 金致浩군과 영원히 헤어진 지 49년이 되는 날이다. 그 때 우리는 문리대 수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마로니에 그루터기 옆 벤치나 짙은 초록의 잔디에 앉아 많은 얘기를 나누며 꿈을 엮던 동갑내기였다.

 1960년 4월 19일(화)은 아주 맑은 날이었다. 1교시에 수업이 있어 우리는 강의실에서 만났다. 전날 고려대에서 데모가 일어나 사고로 번졌다는 소문이 퍼져있어서 인지 교정은 어수선했고 정문 앞에는 많은 학우들이 모여 데모를 시작했다. 우리는 도서관에 가방을 던져 놓고 데모에 합류했고 경찰을 향한 투석이 시작됐다. 진압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경찰은 몇 명의 부상자와 함께 바로 물러났다.

 우리는 연건동 사거리에 도달했을 때 법대생들과 합류해 제법 큰 무리가 됐고 이화동 사거리에서 종로 4가로 향했다. 동대문경찰서 앞에 도달한 우리는 독 안에 든 쥐였다. 많은 학생들이 골목으로 혹은 담장을 넘어 피신했다. 경찰봉에 허리를 맞은 나는 쓰러져 걸을 수 없었고, 피를 흘리고 있는 형편이라 金致浩군이 부축해서 보건진료소(당시에는 의대 뒤 함춘원에 있었음)에 눕혀 놓고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그 길로 그는 효자동 경무대로 가서 데모대의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치다 총탄을 맞았을 것이다.


4월 17일 모교서 표지석 제막 예정

 당시 보도에 따르면 건춘문 앞의 수도육군병원(곧 현대미술관이 될 자리)에 총상으로 입원했는데 나이 어린 고등학생에게 수술을 양보하다 출혈이 심해 결국 유명을 달리했고 끝까지 의연했다는 군의관의 발표였다. 이는 그의 죽음의 고결함과 의로움에 당시 모든 국민이 그의 죽음을 몹시 아쉬워했다.

 金致浩군은 장로 아버지, 권사 어머니 그리고 장로 형님들을 모시고 살았다. 그는 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하는 지를 일찍 체득했을 것이다. 4월 학생혁명기념탑에 새겨진 그의 수첩 마지막 메모인 `나는 오늘도 정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련다'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