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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2009년 3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黃迪仁편찬위원장

정의 수호에 앞장선 학생들의 생생한 기록


 1969년 7월 동숭동 법학과 학과장 사무실. 데모 주동자 처벌에 대한 교수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朴鳳圭(행정67­74)군을 제명하라는 조치가 내려왔어요. 교수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들 얼굴엔 근심만 가득할 뿐 말이 없었다. 그 질문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학과장은 물론 모든 교수들도 알고 있었다. 처벌을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지만 오랜 침묵을 깨고 黃迪仁(법학52­57 모교 명예교수)교수가 일어났다. "朴鳳圭학생은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사는 학생으로 제명을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봅니다." 학과장은 버럭 화를 냈다. "학생회장인 그 학생을 제명하지 않으면 누구를 합니까." 강압적인 태도에 기가 눌려 黃迪仁교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데모가 빈번하던 시절 교수회의 풍경은 늘 그랬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학생들을 보며 黃교수는 가슴속 깊이 큰 짐을 안고 있는 듯 했다. 교육공무원의 신분이라 의사 표시를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교수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기록으로 남기자.'

 그때부터 학생운동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대 金成植교수가 쓴 `독일학생운동사'도 자극이 됐다. 일간 신문부터 외신, 지하신문(자유의 종)까지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가 아직도 경기도 과천 서고에 가득히 쌓여있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학생운동사를 집필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핑계겠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데 바빠 그 일을 시작도 못했어요. 마음 속에 큰 짐이었죠."

 그렇게 잊혀져갈 무렵 지난해 초 李信範(공법67­88)前국회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법대 학생운동사를 집필하려고 하는데 교수님께서 편찬위원장을 맡아 줄 수 있으신지요."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흔쾌히 허락을 했다.

 "너무 고마웠어요. 쉬운 일이 아닐텐데, 마음속의 짐을 제자가 풀어주는구나 싶더라고요. 李信範군이 60~70년대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나보다 운동사 집필의 적임자였죠."

 모아두었던 자료를 李信範동문에게 넘겨주고, 책 발간을 위한 비용도 조금 지원했다. 李동문이 대표로 집필하고 林鍾律(법학62­67 前성균관대 교수)ㆍ安平洙(법학68­77 LIBO종합건설 회장)ㆍ李光澤(행정68­75 국민대 교수)동문이 공동집필자로 수고해 지난해 말 4백3쪽 분량의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 정의의 함성 1964~1979'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별 대학 차원에서 고려대가 지난 2005년 학생운동사를 출판한 적이 있으며 모교 법대가 두 번째다.


 잠깐 책을 들여다보자. 이 책에는 60~7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던 법대 학생들의 치열한 항쟁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서부터 1966년 재벌밀수 성토, 1967년 6ㆍ8부정선거 규탄, 1969년 3선 개헌반대, 1970년 지하 저항신문인 `자유의 종' 발간, 全泰壹의 분신과 추도운동, 1971년 민주수호 운동과 위수령에 이은 대탄압, 1979년 유신철폐투쟁 등 민주화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제적을 당하며 정의를 위해 몸을 바쳤던 법대생 1백60명의 활약이 눈부시다.

 특히 당시 보도되지 않았던 사진자료들(동아일보사 제공), 선언문 등 3백여 쪽의 자료들과 지하신문으로 공격을 받았던 `자유의 종', 서울대생 내란 음모사건의 조작경위와 긴급조치 사건 판결문 등을 그대로 싣고 중앙정보부의 탄압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흥미로운 건 현재 정계를 주름잡는 인사들의 학창시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부 李永熙(행정61­69)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姜萬洙(법학65­69)위원장, 安商守(법학64­68)ㆍ李仁濟(행정68­72)ㆍ崔圭成(법학68­72)ㆍ吳濟世(행정68­72)ㆍ李柱榮(법학70­74)ㆍ鄭鎭燮(법학72­84)국회의원 등의 당시 활약상을 담았다.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이 모두 잘 된 것은 아니다. 黃迪仁위원장은 "제적까지 당했던 1백60명 중 많은 동문들이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했다.

 "金正煥(행정67­71)군은 시내버스운전기사 노동조합 운동을 하다가 간경화로 83년 2월 사망했고, 李範泳(공법89졸)군은 도피생활 끝에 역시 간경화와 췌장암으로 94년 세상을 떠났어요. 그밖에 많은 제자들이 변두리를 돌며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아요. 학생 시절엔 직접적 피해자로, 사회에 나와서는 간접적 피해자로 살고 있죠. 안타까운 일이에요."

 언론ㆍ출판ㆍ집회의 자유를 비롯해 기본권이 존중되는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이들의 희생으로 이뤄졌다.

 黃迪仁위원장은 "헌정을 수호하고 독재를 무너뜨리는 투쟁에서 서울법대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희생이 컸음에도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이제 국민, 특히 법학도들에게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는 결의로 싸운 선배들의 헌신을 알리는 자료집이 나오게 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4월 중 모교 관악캠퍼스 근대법학교육 백주년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했다. 기념회에는 책 속의 주인공은 물론 타 단과대학 운동권 동문들, 재학생들을 모두 초청할 생각이다.


 "이날 제적당했던 제자들에게 회고록을 부탁할 생각이에요. 지금 책 내용에 1백60명의 회고록이 더해지면 책이 한층 풍성해질 거라 믿어요. 또 문리대 등 타 단과대학에 자극이 돼 서울대 전체차원의 운동사가 편찬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黃迪仁편찬위원장은 독일 쾰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68년 모교에 부임해 당시 법대 학생운동의 주도 세력이었던 농촌법학회 지도교수를 맡았다. 현재 농업법학회 회장, 한국문예저작권협회 명예회장을 맡아 어려운 농민과 가난한 예술가들의 재산 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독일어에 능통해 최근에는 한국법을 독일어로 소개하는 논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가족으로 閔淑姬(영어교육53­57)동문과의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큰딸 모교 분당병원 신경안과 黃淨玟(의학79­85)교수, 큰사위 삼성의료원 안과 奇昌垣(의학83졸)교수, 둘째 사위 서울아산병원 재활의학과 崔暻曉(의학85­89)교수 등이 동문이다. 〈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