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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2009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黃 健 豪 한국금융투자협회 초대 회장

33년간 금융맨 외길 걸으며 자본시장 국제화에 앞장서


 - 증권업협회 회장이 되실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중요하고 무거운 직책을 주변의 절대적인 성원 속에 맡게 되셨습니다. 비결이 있다면, 그리고 그 바탕은 무엇인지요.

 "우리나라 금융서비스산업은 제조업에 상대적으로 뒤져 있습니다. 때문에 전략적으로 금융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저는 이 대목에 커다란 소명감을 갖고 있어요. 제 경우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33년간 금융전문가의 외길을 걸으면서 자본시장 국제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앞장서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요. 바로 이런 점에 많은 분들이 점수를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말이 그렇지 서로 다른 세 단체를 통합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자본시장법 자체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요.

 "저는 오래 전부터 금융서비스산업을 IT 및 제조업과 접목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자본시장법의 중요성 또한 역설했고요. 그런데도 지급결제 문제 등을 놓고 반대가 심했죠. 지급결제는 금융소비자시대에 있어 하나의 수단인데 아직도 전통적인 뱅킹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사회의 문제는 머리 좋은 사람은 많은데 헌신하는 사람은 적은 데 있는 것 같아요. 자본시장이라는 게 다양화됐는데 여전히 예전의 통화신용정책만 주장하는 건 문제죠.

 사실 일본도 2년 전에 비슷한 법을 제정했어요, `금융상품 판매 등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죠.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우리보다 더 빨리 통과시켰어요. 그렇지만 내용은 우리가 진일보했어요. 일본법에선 우리처럼 협회 3개를 통합시키지 못했고요. 우리가 성공하면 아시아 이머징마켓의 모델이 될 겁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희망이 있는 거죠."

 - 조직과 인력, 업무를 통합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하세요.

 "진실이 통한다고 봐요. 그래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동기가 순수해야죠. 사적인 목적으로 하면 대립이 생겨요. 저는 戰史를 많이 읽는데 우월한 지위에선 숫자가 아니라 전략과 조직력, 기동력으로 이기죠. 리더가 자기 이득을 먼저 생각하면 결코 이기지 못해요. 3개 협회 통합과정에서도 증권업협회가 양보했어요. 의결권도 그렇고 인원 감축도 많이 하고요."

 - 친화력이 큰 힘으로 작용하는 듯한데 근간은 무엇인지요. 주량은 어느 정도 되시나요.

 "제가 사교적이진 못해도 친화력이 강한 편이라고 해요. 친화력이란 게 사교적인 것과 달라요. 친화력은 여러 가지 내재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진실이라든가 살아온 과정같은. 사교적인 건 좀더 외향적인 것이고요. 폭탄주는 13잔까지 마셔본 것 같은데 쓰러진 적은 없습니다. 담배는 안 해요. 가끔 시가는 피우는데 취미에 가깝죠. 소주는 2병 정도. 요즘엔 많이 줄였어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영향을 받으면 안되니까요."

 - 뉴욕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코리아펀드 창설의 주역을 맡으셨죠.

 "코리아펀드는 대우증권 재직 시 뉴욕시장에 진출해 설립했습니다. 우리 사회엔 항상 비관적인 견해를 내놓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당시 금융 지도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실패할 거라며 반대했지만 성공시켰습니다. 12달러에 발행했는데 나중에 1백달러를 넘었죠. 그 결과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자금을 조달할 때 벤치마크 대상이 됐고요. 미국에서 2백~3백% 프리미엄이 붙으니까 삼성전자, 포스코, 대우중공업, 현대중공업 등 한국의 주식들이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그런 일들이 계기가 돼 1992년 금융시장이 개방됐고 저는 현장에서 주역으로 뛰었죠.

 수많은 국제적 딜 중에서도 한국통신(KT) 건은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GDR(Global Depositary Receipt)이라고 우리 주식을 달러화시켜 해외에 파는 건데, 1994년 당시 25억불짜리를 성사시켰습니다. 사실 지금은 국제금융이 예전보다 오히려 후퇴한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은행의 경우 7~8년 전 만 해도 금융부실 때문에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끄떡 없습니다. 2005~2007년 금융버블시대, 금융완화시대 때 중국은행들이 세계 시장에서 엄청나게 자본을 끌어모은 덕이죠. 반면 우리는 국제금융이 국내로 많이 후퇴했어요."



 - 그렇게 후퇴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1997년 외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물론 부채비율 등은 획기적으로 개선됐죠. 그러나 무엇보다 기업가정신이 죽었어요. 기업금융을 잘못해서 망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경제발전단계에서 볼 때 아직까지 가계금융보단 기업금융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과거 국제금융을 했던 사람들의 뼈아픈 경험을 살리질 못하고 미국의 소비금융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여 은행이 가계금융화됐습니다. 그러나 시스템 리스크는 사실 더 무섭잖아요. 카드채, 부동산금융 문제 등. 따라서 이번에 다시 그런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시장에서라도 기업금융을 강화시키려는 거고요."

 - 증권회사를 선택한 동기가 따로 있으셨는지. 당시 추세와는 달랐던 듯한데.


 "학창시절은 혼란기였죠. 노상 데모하고 휴강하고. 방향이 없어 방황했죠. 고시공부도 하다 때려치우고. 유학 갈까 생각도 했고. 공부가 안돼 전국일주도 했고요. 우리 때는 졸업하면 으레 무역회사에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언젠가 증권시장을 견학했는데 그게 인상적이어서 관련서적도 읽으면서 내가 개척해 볼만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했는데 잘 한 것 같아요. 증권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지금까지 늘 개척자였어요. 해외사례를 우리한테 어떻게 접목시켜 발전시킬지,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도록 만들지 등을 놓고 많이 고민했고 고생도 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 자본시장법 때문에 불편하다는 의견도 많은데요. CMA만 가입하려고 해도 투자 성향을 분석한다며 설문조사를 하는 통에 귀찮고 시간도 많이 뺏긴다고들 합니다.


 "안그래도 완화시키느라 노력하고 있어요. `자본시장법'은 기본적으로 규제혁신법입니다. 금융회사 스스로 상품을 선택하고 만드는 등 금융회사들의 업무 범위를 종합화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기업가정신이 시현되도록 하는 겁니다. 유일한 규제 부분이 투자자 보호입니다. 그러나 이건 금융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금융고객 신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금융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자 보호가 첫째입니다. 윤리의 문제죠. 장사만 된다고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때문에 자본시장법에서 적합성의 원칙과 설명 의무가 선언적으로 강화됐어요. 세계적인 추세도 투자자 보호, 금융소비자 권익의 최대한 보장 쪽으로 가고 있고요.

 작년에 수익증권을 팔면서 위험에 대해 정확하게 고지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됐죠. 자본시장법에선 투자자 보호 추세에 맞춰 금융회사가 리스크에 대해 설명하고, 투자자가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판단을 금융회사가 다시 하도록 한 것이죠. 굉장히 진일보한 조치예요. 그렇게 해야 금융회사도 보호받거든요. 금융소비자 주권시대에 무조건 팔다가는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에요. 자본시장법에선 투자 신뢰를 회복하고 소비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설명 의무가 지켜져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일종의 내부통제 시스템을 만든 것이죠. 다양한 파생상품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사실 어떤 상품인지 설명하지 못했는데 일일이 설명하도록 하니 불편한 게 있겠죠. 은행이 자본시장, 장기간접펀드 투자에 상당히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불완전 판매가 많이 발생됐으니 이번에 한 번 짚고 넘어가자 그런 겁니다. 주식형펀드가 1백40조 규모의 굉장히 고도화된 자본시장인데, 발전하려면 투자 신뢰부터 이뤄져야죠.

 CMA는 많은 규제를 완화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금융권에서 권유와 설명에 대해 오해하고 있어요. 설명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거거든요. 소비자가 권유받지 않겠다고 하면 안해도 돼요. 파생상품만 하면 돼요. 나머지 상품은 창구에서 설명을 권유받지 않겠다고 체크하면 등급을 따질 필요도 없고요. 권유할 때 그 사람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할 의무를 부과하는 거거든요."




 - 실제로 설명이라는 게 곧 권유로 연결되는 상황이니까 그렇죠.

 "법엔 원칙이 있지만 내부통제가 잘 안되니 이게 제대로 돼야 해요. 시행하라고 했는데 전부 법에다 전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나요.

 "해석상의 문제를 정리해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투자자 보호의 원리가 뭐냐, 왜 필요하냐고들 하는데 제대로 안하면 큰일납니다. 때문에 금융투자교육원을 확대 개편하고, 전국투자자교육협의회에서 전문인을 국제화시키고, 금융투자연구원에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청소년 금융교육까지 확대할 작정입니다. 증권사는 새로운 역량을 키워 새로운 곳에 진출을 해야죠. 은행과 자본시장이 금융의 두 축인데 자본시장이 잘 발전해야 은행도 함께 성장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은행장들께도 이렇게 말해요. `은행은 리스크를 集積하고, 자본시장은 리스크를 분산시킨다. 자본시장이 리스크를 분산시키니까 상호 발전하는 것 아니냐'고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죠.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후기 정보화사회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은 곧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에 대한 조언도 해주시고요.

 "지도자는 좀더 넓고 다양한 시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다원화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녔으면 하는 것이죠. 서울대생이면 모두 지도자를 꿈꾸는데 통찰력과 관심분야 등에 대해서도 좀더 다원화되도록 교육시켰으면 좋겠어요. 또한 품격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품격은 자기가 정한 원칙을 지키고 그 원칙에 따라 제 길을 갈 때 나타나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뭐 하나 좋다고 하면 전부 좇아가잖아요. 우리도 세계에서 상당한 위치에 와 있는데 자꾸만 주관 없이 휩쓸리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앞으로는 누구나 글로벌한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좋아합니다. 대학 땐 프랭크 시나트라를 흠모하기도 했어요. `LIFE'지였던가, 프랭크 시나트라가 고별쇼를 하면서 `마이 웨이'를 부르고 끝으로 담배를 한 대 멋있게 피우는 모습이 실린 기사를 보고 반했었죠. 각자 좀 멋있게 자기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 경기는 언제쯤 회복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지금 전 세계가 1929년 대공황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공황 때는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채널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리얼타임으로 전 세계가 같이 움직이잖아요. 사실 이번 위기의 근저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행태와 이라크전, 금융 버블, 지속적인 쌍둥이 적자, 개인들의 탐욕, 투자공학의 발달로 인한 파생상품의 무수한 출현 등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1929년과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죠. 종합감기약을 먹여야 되는 상태인데 초기 대응이 잘 안돼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경기가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금융시장은 하반기부터 선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봐서는 시기가 좀 늦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이번 위기에 잘 대응하면 회복기에 우리 기업들의 회복력은 굉장히 빠를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국제금융 체계가 개편될 텐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새로운 모멘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며칠 뒤 호주에 가는데,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 모두 금융위기 이후에 대비하자고 주장할 계획입니다."

 - 국내 부동산시장에 대한 전망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해외에선 재작년부터 부동산 버블이 꺼진다고 전망됐는데 우리나라에선 다르거든요. 그렇지만 부동산이 계속 오른다는 사람들의 논리는 궁색해요. 인구가 줄고 있는데도 `핵가족화에 따라 가구 수가 늘어날 것이다' 등등이죠. 하지만 핵가족화된다고 40~50평 짜리 아파트를 삽니까? 비논리적이에요.

 현재 전 세계 자산이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호주 등은 대표적으로 부동산이 많이 올라간 나라죠. 우리나라만 부동산 버블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어요. 소득수준이 올라 좀더 큰 집으로 가고 싶은 대체수요는 조금 있겠죠. 그러나 지난 몇 년동안 실질 소득은 늘지 않았어요. 그럼 뭐로 집값이 올랐느냐. 금융완화 정책에 의해서죠. 은행이 소비금융 위주로 간 것도 영향을 미쳤고요. 장기적인 경제 예측은 항상 펀더멘탈 중심으로 해야 돼요."

 - 개인적인 재테크 성적을 공개한다면.

 "부동산테크와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에 사니까요. 그러나 나중에 쓸 오피스텔도 하나 있고 금융재산도 장기투자를 해오고 있어 큰 손해 안 보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부동산, 현금자산, 유가증권을 3 : 3 : 3 정도로 보유한다는 기준이 있어요. 주변에서 자꾸 나이 들면 단독주택에서 못사니 아파트를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솔깃해지긴 합니다. 그래도 내가 살 집이니 강남의 유명 아파트와 안 바꾼다 그렇게 마음먹고 살아요. 우리나라 가계 자산의 80%가 부동산이에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죠. OECD국가 대부분이 30~40%예요. 여기에 대해선 국가지도자들이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의 경우 지금의 위기는 클린턴 대통령 때 벌인 주택 갖기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 개인적인 질문을 드릴까요. 취미를 말씀해주시죠.

 "제가 사실 여행광입니다. 요즘은 바빠서 잘 못 가지만요. 대학 시절 졸업할 때까지 등산 여행만 60회 이상 했어요. 영리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제 길을 갔는데 저는 4년간 온갖 시도를 하다 졸업했어요. 음악감상도 좋아했고요. 졸업식날에도 취직은 했지만 미래를 생각하니 착잡해서 음악감상실에 들렀죠. 을지로에 아폴로이던가, 조용히 앉아 음악만 듣는 곳이었죠. 그리고 저는 정원가꾸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아버님이 작은 화단에 이것저것 심고 기르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대학 때 아버님이 꽃에 물을 주시면서 저 보고 재미있지 않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속으로 뭐가 재미있나 그랬는데 어느 날 제가 아들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 장단기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오랫동안 민간부문에서 일했습니다. 미국 월가에서 전문가로 성장한 사람들은 노후 관리를 할 정도가 되면 공공기관에서 봉사할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기회가 되면 민간부문에서 쌓은 경험을 공공부문에 마음껏 쏟아붓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대가를 받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대가 없이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협회는 완전한 공공기관은 아니지만 공공적 요소들을 갖고 있어요. 이곳에서 세계적인 협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소진해 버리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력이 있으면 언젠가 공공기관에서 봉사해봤으면 합니다."

 - 미네르바 소동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어려울 때 얘기해줄 사람이 없으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품격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 아닙니까. 말로는 세계화, 세계화 하면서도 툭하면 말초적 정보에 신경쓰는 데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얘기 잘못하면 그런데.(웃음)"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교편을 잡으셨어요. 아버님은 고등학교, 어머님은 제가 다닌 초등학교에 근무하셨죠. 연애결혼을 하셨다네요. 저는 1남4녀의 둘째입니다. 집사람은 대학 1학년 때 USI(주한미국공보원) 영어회화클럽에서 만났고요. 아들이 둘인데 집안 내력인지 큰 아들도 군대 갔다 와서 처음 소개받은 사람과 결혼했어요. 유학 가서 딸을 낳았고요."

 - 다독으로 유명하신데 근래에 읽은 책을 소개해주시죠.

 "동시에 여러 가지를 읽어요. 어제 밤엔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경제자문역을 지낸 자크 아탈리의 `위기 그리고 그 이후'를 읽었어요. 최근에 샌디 웨일의 `리얼 딜'과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등도 보고 있어요."

 - 총동창회에서 서울 마포의 옛 동창회관 자리에 새로 장학빌딩을 짓고 있습니다. 또 모교 개교 원년을 찾기 위한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요. 광복 이후 개교한 것으로 돼 있다 보니 국제무대에서 학교 역사가 너무 짧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이에 대해 한말씀 해주시죠.

 "동창회관을 새로 짓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조금밖에 못 냈어요. 좀 더 내야겠죠. 더 낼까요?(웃음) 사실 저는 서울대의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시시하게 굴지 않는다, 남보다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같은 자부심을 길러준 것도 서울대고요. 뿐인가요.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요.

 역사 찾기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우리 협회는 이번에 새로 출범했지만 제가 회장을 맡고 있던 한국증권업협회는 55주년이었어요. 55주년을 보내면서 제가 그간의 역사를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어요. 역사와 뿌리를 갖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강남보다 인사동 일대를 좋아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를 좀더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좋다고 봐요.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겠죠. 저는 제 아버님이 43년에 졸업하신 경성사범학교도 우리 서울대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 李五峰논설위원ㆍ정리 = 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