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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호 2009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모교 캠퍼스내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에 일조

朴 相 大 IVI 한국후원회장 겸 이사장



- 바쁘신 데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임자들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초대 후원회장은 총동창회 金在淳명예회장이셨고, 이사장은 趙完圭전임 총장이셨죠. 2대 회장은 李鎬汪 前학술원 회장, 이사장은 녹십자 회장인 許永燮동문이었고요. 이번에 제가 3대 회장과 이사장을 겸하게 됐습니다."


- 권한이 막강해지셨네요.

 "아니에요. 돈을 쌓아 놓고 있는 곳이 아니라 남에게 후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자리라서 오히려 어깨가 무겁죠. 정부와 국민 사이의 가교역할도 해야 되고…."


- 대한민국에 유치한 유일한 국제기구 본부이다 보니 기금 모금을 비롯해서 대외적으로 홍보할 일도 많겠네요.

 "그렇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 살았습니까. 유엔이 도와줘서 6ㆍ25전쟁에서도 나라를 지켰고, 폐허로부터 이만큼 성장한 것 아닙니까. 그런 계제에 IVI를 국내에 유치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제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한 증좌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대통령 영부인을 명예회장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초대 李姬鎬여사, 2대 權良淑여사에 이어, 작년 10월 金潤玉여사를 3대 명예회장으로 추대했습니다."


- IVI를 잘 성장 발전시켜야 우리의 國格도 확고하게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IVI를 유치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이뤄졌나요.

 "1993년 故 金鍾云전임 총장 시절 제가 연구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재미교포 과학자 한 분이 유엔개발계획(UNDP) 고문으로 계셨어요. 그 분이 `유엔에서 백신관련 국제기구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아시아권 나라가 유력시된다'며 `한국이 유치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곧바로 17명으로 구성된 유치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서울대 안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1994년 3월 15일이 마감일이었어요. 국고를 받아야 하는 중요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기획원(당시) 등 관련 부처 승인을 받고, 3월 15일 부랴부랴 김포를 출발해 현지시각 3월 15일에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UNDP에 제출했습니다."


- IVI를 우리나라에 유치하는 과정에서 경쟁이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유치 현장에 있었는데요. 6개국이 출사표를 내 막판에 중국과 경쟁하게 됐습니다. 중국은 당시 주룽지(朱鎔基)총리가 IVI 소장의 저택 제공뿐 아니라 정부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왔어요. 그래도 유치위원들이 우리 손을 들어줬죠."


- 어떤 부분에서 점수를 많이 땄나요.

 "프레젠테이션도 우수했지만, 가장 점수를 많이 얻은 이유는 우리가 선진국 수준의 백신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시스템이 잘 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녹십자사가 B형 간염백신을 생산해 저개발국에 싼값으로 많이 내보내고 있었어요. 미국의 하버드대 교수가 개발한 것을 대상 국가에 맞게 변형해서 만든 거지만, 백신을 자국의 이익을 위한 방어적 메카니즘으로 생각하는 선진국과 다른 자세가 점수를 딴 거죠."






- 서울대 캠퍼스 안에 들어오게 된 연유도 흥미롭겠는데요.

 "서울대에는 백신과 관련된 분자생물학, 의학, 약학 등의 분야에서 우수인력이 많이 있어요. 이 사람들과 공동연구를 하고 대학원, 포스트닥 과정에 있는 연구원을 같이 쓸 수가 있고요. 한 마디로 고급인력을 확보하고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도서관, 유전공학연구소, 전산원 등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유치조건 중 하나가 국제공항이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KTX가 개통되기 전이니까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과학기술부가 원했던 대덕까지 가려면 3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여기는 공항에서 40분 거리잖아요. 또한 정부의 유치 의지가 큰 것도 한몫을 한 것입니다. 결국 유치 제안서에 IVI를 서울대 안에 설립한다고 못 박은 것 역시 높은 점수를 받게 된 거죠. 그렇게 해서 유치에 성공은 했는데, 유치하고 나서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쳤습니다. 현재까지 40개국이 설립 서명국인데, 미국과 일본이 서명에 응하지 않은 겁니다."




- 이유가 뭡니까.

 "IVI가 우리나라에 설립될 경우, 미국의 멀크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가 갖고 있는 노하우를 한국이 가져가면 어떡하느냐는 우려에서였죠. 이들 나라는 아직도 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IVI의 설립 목적이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설사병, 장티푸스 등으로 연간 1천만명이 죽어 가는 저개발국 아이들을 살리자는 것 아닙니까?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가면 값싼 백신 하나로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이러한 단순 질병으로 숨지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IVI는 백신연구와 개발만 하고, 생산 판매는 다국적 기업에 넘깁니다. 그래서 이젠 미국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하죠. 그러니까 빌 앤 멜린다 게이츠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에서 11년간 1억3천2백만 달러를 쾌척한 것 아닙니까?"


- 연구소 인력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1백57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 그 중에서 연구인력과 행정지원 인력 비율은요.

 "연구인력은 절반 이상이라고 봐야죠."


- 외국에서 오신 분들은 몇 명 정도 되나요.

 "1997년 개소 때부터 근무하고 있는 존 클레멘스 사무총장을 비롯해서 정상급 과학자가 현재 47명입니다. 그 중 클레멘스 소장은 스탠퍼드대와 예일대를 나온 의학자로 국제적인 명성이 대단합니다."


- IVI를 한국에, 더욱이 서울대 캠퍼스 안에 유치한 것 자체가 높은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도 있죠.

 "IVI를 이곳에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생명공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50명의 정상급 과학자가 상주하면 이들을 옆에서 돕는 인력, 예를 들어 포스트닥, 대학원생 등 1백50명 정도를 붙여줘야 하거든요. 연구 시너지와 함께 고용창출 효과도 있습니다. 또 운영비(30%)는 국내에서 대지만, 연구비 중 상당 부분이 외국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외화유입효과도 큽니다. 뿐만 아니라 연간 예산의 절반을 우리나라에서 쓰게 되니 경제적인 파급효과도 적지 않습니다."


- 그동안 연구 성과를 정리해 주시죠.

 "설립 직후 곧바로 IMF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연구소 건립은 자연히 미뤄졌죠. 1998년에 완공하기로 한 것이 2003년에 가서야 준공됐습니다. 서울대 연구공원으로 오기 전까지 캠퍼스 안 자그마한 임시 연구소에 있었죠. 최근 IVI는 콜레라 백신 1종, 장티푸스 백신 2종을 개발했습니다. 개발했다는 의미는 새롭게 만들었거나 있는 것을 조금 개량했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논문도 Nature, Science, Lancet 등 저명 국제학술지에 한 5백편 정도 발표했고요. 에이즈 바이러스, 암 유전자 등을 해명하는 데 필요한 시설 중 하나가 완벽한 `생물안전차폐시설'인데, 작년에 이 최첨단 시설이 완공돼 앞으로는 수준 높은 연구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 결국은 돈이 문제인데요. 그럼 후원회 인력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대통령 영부인께서 명예회장이시고, 회장, 부회장 2명, 총리를 비롯해 전임 대학총장, 장관, 기업체 등 각 분야 지도자들로 구성된 20명의 고문과 40명의 이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 실제로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총체적으로 얼마나 지원했고, 앞으로 회장님께서 연간 어느 정도의 지원금이 나와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말씀해주시죠.

 "먼저 지금 이 건물이 있는 부지가 1만9천6백68㎡ 정도됩니다. 유치 초기에 평당 2천만원으로 산정하면 1억 달러, 즉 1천억원(당시 환율)이 되고요. 그 다음으로는 건물을 짓고, 기자재 및 특수시설 등을 들여오는 데 6백억원 정도 들었습니다. 지난 1995년부터 매년 운영비의 30%를 정부가 부담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2천억원 가까이 지원했다고 보면 됩니다. 민간차원에서는 약 25억원 정도 모아졌고요."


- 조금 미흡하군요.

 "기금 모금한다는 게 결국 남의 주머니 터는 일이잖아요. 컨설팅회사에 IVI가 국내에서 얼마만큼 기금을 모금할 수 있는지 의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1년에 1백억원 정도는 모금할 수 있을 거라고 진단하더군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서도 1년에 1백억원 가까이 모금을 하고 있으니, 거기보다 더 국제적인 기구이고 저명한 분들이 후원하고 있는데 그 정도 이상은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더군요. 현실은 달랐어요."


- 두 기관을 냉정하게 놓고 보면 유니세프는 어린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다양한 활동을 많이 펼치니까 기금이 잘 되잖아요. 그런데 IVI 하면, `백신은 맞긴 맞는데 백신을 연구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더 깊이 들어가야 될 겁니다.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정착이 안 된 이유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 월급도 받지 않고, 직원들도 후원회에서 돈 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타이트하게 운영해도 기금 모금은 정말 어려워요. 동창회에서 좀 많이 도와주십시오.(웃음)"


- 공익광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더 많은 기금을 유치할 수 있는 길이 나올 겁니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 여러 나라를 부각시키고, 일반인에게 왜 이것이 중요한 일인지, 세계 곳곳에 우리나라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임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4년 동안 적어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정착을 시키겠다고 하는 방침이나 아젠다가 있으시다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기금 모금에 관해선 전문가로부터 심도 있는 자문을 받을 계획입니다. IVI가 우리나라에 있는 한 국내 연구자들과의 연구 교류도 활발히 이뤄지도록 지원할 생각입니다. 현재 정부에서 조류독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번에 새로 생명공학연구원에서 팀을 구성해 IVI도 들어왔습니다.
 외국재단이 지원금을 출연할 때는 꼭 단서를 달기 때문에 맞춤 연구를 해야 하는 제약이 있어요. 민간차원에서 조건 없는 기금을 많이 내야 해외 우수인력을 모셔오고 국격도 높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정확한 액수를 확약하긴 어렵지만 구상 중인 계획이 임기 내에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생명공학기술(BT)분야의 선구자이시고, 학자 그리고 과학자로 살아오신 이력이 40여 년이 되시는데요. 과거로 돌아가 지금 BT의 기초가 되는 분자세포생물 분야를 공부하게 된 동기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좌절도 맛보고 또 보람됐던 일들도 많으셨을 텐데.

 "1980년대 초에 유전공학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지만, 막상 유전공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소위 분자생물학, 유전공학 첫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죠. 기반도 안 닦여져 있으니 매사 개척자 정신으로 했죠. 과학기술부에 건의해 유전학연구센터를 설립하게 했고, 교육부에 유전공학 연구비를 지원해 달라고 해서 13년 동안 대학에 지원하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교육부가 서울대를 비롯해 전국 20여 개 대학에 유전공학연구소를 설립한 것이 한국 생명공학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안에 분자생물학협동과정을 개설하고, 분자생물학회(1989년 4월 15일)도 창설했습니다. 의학은 의학대로, 생물학은 생물학대로, 농학은 농학대로 장벽을 치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풍토를 이 학회 설립으로 생명과학의 공동광장이 만들어졌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朴相大, 네가 있었기에 분자생물학 발전을 1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다'고요. 최근에 분자생물학과 관련된 연구 실적들이 아주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금 젊은 학자들 정말 대단해요. 그런 기반을 만드는 데 미력이나마 보탬이 됐다는 것이 보람이죠."


- 지난 10여 년 이공계 기피, 이공계 홀대 현상이 심각합니다. 실제로 과학기술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성장동력산업 추진 계획도 다 공염불에 불과할 텐데요. 과학자로 평생 살아오신 분으로 작금의 이공계 기피, 이공계 홀대 현상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저희 때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은 물리학과에 갔습니다. 응용 쪽을 좋아하는 학생은 화공과를 선택했고요. 창의력이 있는 학생들은 기초과학 분야에 많이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잘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특정 분야말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이렇게 많은데 자꾸 잊혀지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어쨌든 우수한 인재들이 과학에서 흥미를 가지고 훌륭한 연구를 하고 계속해서 터전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연구현장에서 경륜 있는 중견과학자를 배제하는 풍토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 같아요.

 "대학에서도 50세가 넘으면 연구계획서를 써도 후배 교수들이 조용히 쉬시라고 그런다고 합디다."


- 연구비 지원기관에서도 고령자(?)의 이름을 제안서에서 빼라고 한다더군요.

 "중요한 연구실적은 검정에 10년, 20년도 넘게 걸립니다. DNA이중나선 구조를 완성한 왓슨과 크릭도 9년 뒤에야 가설이 입증돼 노벨상을 타지 않았습니까. 경륜 있는 인력이 중요한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 마지막으로 서울대 울타리에서 평생을 보내고 계신 동문의 한 분으로 동창회에 대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모교 발전기금 모금운동 등에 대해서 30만 동문이 발 벗고 나서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문제는 동문들의 구심점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동문 각자는 서울대를 나온 덕으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줄 책무가 있죠. 제가 아이디어를 하나 내 볼까요. 기금 모금할 때, 큰돈을 한 번에 내라기보다 매월 정례적으로 쪼개서 내는 방법을 추가하면 어떨까요. 소액 기탁자들도 배려해 주면서 캠페인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장학빌딩 건립기금 모금은 그런 방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렵더라도 대의를 위해, 좋은 일을 위해 주머니를 비우는 것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이겠죠. 장시간 감사합니다.
〈사진 = 李五峰논설위원ㆍ정리 = 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