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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2008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적십자 정신으로 분열된 사회 통합될 수 있도록 노력



-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인터뷰가 두 면에 걸쳐 나갈 예정입니다.

 "이렇게 크게 낸다고요? 4분의 1만 내세요."

 - 자연스럽게 포부를 펼쳐 주십시오. 임기가 어떻게 되시죠.

 "3년입니다."

 - 3년 뒤에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요.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라면 적십자를 필요로 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다가갔다, 그렇게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 저고리 좀 벗고 하겠습니다. 총재님은 3년 뒤에 벗으십시오(웃음). 요즘 언론에서 비판이 매섭습니다.

 "문제(비판) 제기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외교 관계에서 문제 해결을 잘 해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비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내 능력을 발휘할 기회'로 생각합니다.

 1996년 북한이 `휴전협정은 무효다. 따라서 휴전협정을 준수할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북관계가 엄청나게 경색됐죠. 그때 안보수석으로 있으면서 金泳三대통령께 `이 문제는 우리가 외교적으로 제기를 해야 합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려면 휴전협정의 서명국인 미국, 중국을 끌어들이고 북한을 오라해서 4자회담을 제안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죠. 대통령은 반신반의하면서 `그거 잘 되겠나, 미국 불러오는 것 정도는 몰라도 북한이 오라하면 오겠나. 중국도 만만치 않을 테고…' 그래요. 하지만 미국, 북한, 중국 모두 설득해서 4자회담을 성사시켰어요. 4자회담이 이뤄진 것은 남북관계에서 굉장한 변화죠. 북한 입장에서 (나한테) `저 놈 나쁜 놈이다'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경제적 지원도 했고요. 물론 제가 `黃長燁사건'도 교섭했지만 그것은 외교부 장관으로서 해결해야 될 일이었죠."

 -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죠. 하지만 지금은 전통을 보내도 안 받아요. 지난 2월에 서신을 교환하고 5월에 식량을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회답이 없어요. 나가는 전통문 자체를 수령을 안 해요. 마지막이 2월이에요."

 - 적십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적십자 회비가 어느 때부터 정체예요. 5백억원이 안 넘습니다. 과거에는 적십자가 역사가 깊고 세계적인 브랜드이기 때문에 이름만 가지고도 일이 되는 게 많았죠. 지금은 적십자 활동분야에도 경쟁 단체가 많아 옛 방식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불행히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요. 남․북간의 깊은 골, 동․서간, 老․少간, 빈․부간의 깊은 불신의 늪이 존재합니다. 우리사회 만큼 분열의 골이 많고 깊은 나라도 드물어요. 이 분열의 골을 메우는 데 적십자의 인간애보다 더 적절하고 효력이 있는 연결고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문제가 큰 만큼 그 해결책도 용이치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높은 차원의 결의와 창의력 그리고 철학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데 드라이빙 포스는 청소년 봉사활동이에요. 이를 활발히 전개해서 사회를 조화롭게 만드는 데 힘쓸 계획입니다.

 적십자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는 남북이산가족의 생사확인과 상봉이라는 시한성을 가진 과제도 있죠. 그리고 남북이산가족을 연결하는 다른 여러 사업이 있습니다. 남북간 여러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내와 이해를 가지면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겠죠.

 재난 예방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오늘날은 자연적인 재난뿐 아니라 인위적인 재난도 대규모화 하고 있습니다. 재난이 생겼을 때도 대응해야 하겠지만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사업도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인도주의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됩니다. 고통을 나누고 불행을 예방하는 노력은 그 사회 모든 사람들의 몫입니다."

 - 내부 직원들간에 관료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경영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어요.

 "직원들을 보면서 받은 첫인상은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봉사정신이 투철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월급이 적다 보니 고급인력이 오래 남아 있지 않고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요. 적십자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여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퇴직율이 높다는 것이에요. 새로운 사람을 뽑고 훈련시켜 놓으면 금방 나가 버리고요. 다른 국가의 적십자 직원들은 국제적인 레벨의 대우를 받으며 상당한 경력과 능력을 갖고 있어요. 경쟁시대에 적십자도 경쟁의 원리에서 필요한 것은 다 수용해야 될 겁니다."

 - 메리트(인센티브) 시스템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필요한 곳은 도입하면 좋죠. 능력이 뛰어난 직원은 밖에서 더 많은 기부금을 유치해 오지 않겠어요? 그런 직원은 특별히 대우해 줘야죠. 제가 유엔대사로 있으면서 서울대 연구공원에 있는 국제백신연구소(IVI)를 유치했어요. 백신연구소는 월급을 많이 주고 일 잘하는 전문가를 끌어들인단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엔, 적십자도 그것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직장으로 만들도록 어느 정도의 경쟁체제를 가져와야 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집무실에 대해 설명했다. 󰡒사무실 근사하죠? 여기가 항상 지저분했대요. 총재실이 사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래된 가구에다 뭐 사무실이 어지러웠어요. 그런데 전임 李世雄총재가 멋이 있고 돈이 있거든요, 사비를 들여 확 바꿨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게 바뀔 리가 없었죠.󰡓

 - 이제 주제를 바꿔서 학창시절 이야기를 좀 듣겠습니다. 기억나는 분이 누가 있나요.

 "교수님 중에는 閔丙台․李用熙․金成熺․金斗熙교수 등이 생각나요. 동기로는 미국에서 석학이 된 李埰畛교수, 鄭九鎬 前KBS 사장, 朴鐘圭 KSS해운 고문, 鄭永儀 前재정경제부 장관. 학자는 8명 정도로 많아요."

 - 동기 중에 정치를 한 분은 없나요. 정치학과는 정치하려고 가신 게 아닌가요.

 "없어요. 동기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하기는 했죠. 입학동기가 `정치인이냐, 정치학자냐,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냐' 하고요. 입학 당시에 법대를 가면 고등고시 공부를 해야 돼서 싫었고, 경제학과는 상과대학이라 해서 좀 그렇고. 절충하니 정치학과였던 거 같아요. 원래 40명 정원이었는데, 외교학과 정치학과로 나눠진다고 해서 두 배로 뽑았어요. 운이 좋았죠.

 당시 성적을 복도에 게시하곤 했는데 李相玉 前외무부 장관과 高 建 前국무총리가 월등히 성적이 좋았어요. 두 사람이 만점에 가까웠었죠.

 좀 건방진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법대나 다른 대학은 창고에서 공부하는 거다. 학교다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문리대다' 그런 자부심이 있었어요. 입학해서 교정에 들어갔는데 라일락이 펴서 향기가 좋았어요. 학교 앞에 다방도 좋았고. 별장이란 다방이었는데 그곳을 특별강의실이라 해서 노상 가서 놀았어요. 정치학과 사람들이 비교적 괜찮았어요. 노트 빌려달라고 해서 안 빌려준 사람이 없었죠. 영문학과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몇 번 안 나가서 필기한 게 없었어요. 그 학과 사람에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안 빌려 주더라고요."

 - 관운은 있으신 편이었나요.

 "어이구, 뭐, 그냥 그렇죠. 첫 직장은 동화통신사였어요. 기자 일 좀 했죠. 3학년 때 들어가서 견습 떼고는 윗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정당 및 국회 출입기자가 됐어요. 정당과 국회가 괜찮은 게 기사거리도 있고 돈도 좀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기자들이 어찌나 술을 많이 마시는지, `여기 오래 있다가는 마흔 살을 넘길 수 없겠다. 마흔 살 이후 세상이 흥미로울 텐데 더 살려면 여기서 발 빼야겠다'해서 일을 그만뒀죠. 그 후 외무부에 들어가 `朴東宣사건'(코리아게이트사건)을 해결하는 데 기여해 미주국장이 됐어요. 외무부 들어갈 때 목표가 국장이었는데, 국장되고 보니 그만둘 수 있나 차관보는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하나하나 올라갔는데, 차관을 하고는 장관 한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당시에는 차관 중에 장관 되는 사람이 반이 안됐어요. 장관 하려는 사람은 정치적 끈이 있어야 됐으니까요.

 차관하는 동안 외무부에 꽤 기여를 했어요. 당시 崔浩中․李相玉장관 시절인데, 장관은 정치를 하고 차관은 살림을 했어요. 당시 정부예산이 평균 10% 올라갈 때 외무부 예산을 24%나 올렸어요.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도 제가 거의 만들었죠. 청와대에 있을 때 동포재단도 만들었고요."



 - 일자리를 많이 만드셨으니 직원들이 안 따를 수가 없었겠죠.(웃음)

 "어디든지 밥값은 톡톡히 했어요. 유엔대사 할 때 미국의 유명건축가인 아이오밍 페이란 분에게 부탁해 관저도 지었죠. 그 사람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디자인한 분이에요. 그가 계약한 금액 중 가장 낮은 금액이었을 거예요. 보통 1천6백만달러 아래로는 안하는 분인데 나와 1백만달러에 계약을 해서 설계를 했어요. 그 사람이 죽으면 유엔 한국대사관저는 랜드마크 건물이 될 겁니다. 서강대 사이버MBA 총장하면서 매년 1억5천만원 정도 수입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했으니 거기서 또 엄청난 경제효과를 누릴 겁니다. 적십자에서도 큰 도움을 주고 나가야죠."

 -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뭔가요.

 "가능성이 보였어요. 표면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요. 그런데 딱 보니 해볼만한 거예요. 말 잘하면 되겠더라고요. `우리는 육상이 신통치 않으니깐 육상 인기를 올려야겠다, 월드컵을 유치해 4강까지 올라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 축구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느냐. 육상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한국 육상이 형편없지만 기회를 주면 육상 붐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유럽은 육상 산업이 포화상태다. 더 이상 봐줄 관중이 없다. 이제 아시아로 와야 된다. 아시아에 인구도 많고 돈도 많다. 육상 인더스트리를 만들려면 우리에게 유치 기회를 달라. 중국은 올림픽 때문에 안되고 일본 스포츠는 전통적으로 우리 다음이니 우리에게 맡겨달라.'

 이런 식으로 집행위원들을 설득해 나갔죠. 개인적으로 얼굴 알고 하니깐, 손잡고 `너만 믿는다' 그랬죠. 또 그때 보니깐 러시아와 유럽간 갈등이 있더라고요. 러시아는 스폰서십에 7천5백만달러, 우리는 1천5백만달러 걸었어요. 그런데 25명의 집행위원 중 18명이 우리 손을 들어줬어요. 사람이 하는 일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면 됩니다."

 - 적십자에서도 일 내실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그래요. `당신 들어가니깐, 뭐 하나는 할 것 같다'고."

 - 좌우명은 무엇인지요.

 "밖에 나가서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가 대접받을 수 있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거예요. 작은 나라의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당당하지 않으면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었죠. 서양속담에 `당신이 눕지 않는 한 남이 당신 위를 타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유엔대사 시절 미국측 초청으로 모임에 나가게 됐는데 테이블 배정문제로 강하게 항의한 적이 있어요. 제 자리가 3번 테이블에 있어서 테이블 명단을 봤더니 2번 테이블에 일본과 중국의 유엔 부대사 이름이 있는 거예요. 이놈들이 한국 유엔대사를 무시하고 부대사를 2번 테이블에 배정해 놨더라고요. 이걸 문제로 제기해야겠는데, 남의 집에 밥 먹으러 가서 테이블 배정이 나쁘다고 항의하기가 그렇잖아요.

 하지만 개인 柳宗夏가 아니고 대한민국 대사니깐, 다신 그렇게 대접받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행사 후에 참사관에게 지시해서 미국 유엔대사관에 항의 전화를 하라고 시켰어요. `우리 대사께서 너희는 seating arrangement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그랬더니 `우리는 룰이 없다. 친한 사람끼리 옆에 앉힌다' 그러더래요. 질문을 회피하는 거죠. 그래서 다시 지시를 내렸죠. `우리 대사가 그러는데, 유엔은 알파벳순으로 앉히는 것이 관례다, 이게 유엔에서 중요한 룰이고 미국이 호스트 국가로서 이것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 유엔 룰을 무시하고 우리 대사를 그렇게 앉히면 어떡하냐'고요. 미안하다는 답변이 왔어요.

 그 답변만으로는 안돼서 미국 대사에게 직접 말하라고 했어요. 당시 올브라이트가 미국 유엔대사였어요. 올브라이트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매우 나빴다고 하더군요. 이후 오히려 올브라이트와 아주 가까워졌고, 그가 국무장관 할 때도 같이 많은 일을 했죠. 사람과 사람관계는 저쪽에서 밟으려고 할 때는 밟아도 괜찮다 할 때 밟는 거예요. 밟아서 안 되겠다 싶은 사람은 안 밟거든요.

 길을 가다가 후배들이 인사를 안 하고 가면, 반드시 그 후배의 상관한테 전화합니다. `그놈 불러서 柳宗夏 아는지 물어 보라. 안다고 하면 나한테 알려 달라. 그 놈 버릇없는 놈이다. 모르고 인사 안 하는 것은 괜찮지만, 알고 인사 안 한 것은 안 된다' 그렇게 반드시 짚고 넘어 갑니다. 그 후배에게 직접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말하는 것은 柳宗夏란 사람의 특성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소문내는 효과가 있어요. 저 선배한테는 예의를 안 지키면 화낸다 하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죠.

 이걸 金泳三 前대통령으로부터 배웠어요. 그분은 누가 돈 먹고 그러면, 자기가 직접 말 안 하고 꼭 부하한테 시켜서 주의를 줘요. 한번은 국방부에서 무기 수입하는데 이권이 개입됐다는 것을 대통령이 알게 됐나 봐요. 당시 안보수석일 때인데, 국방부 장관을 만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전하라' 그래요. 본인이 다른 통로를 통해서 할 수 있는데도, 안보수석인 나를 통해서 하는 것은 나보고 소문내라는 거거든요.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웃음)"

 - 서울대에서 특강을 하신다면 젊은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실는지요.

 "인간의 기본을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내가 세상을 많이 돌아 다녀 봤는데, 우리가 젊을 때 선배들이 해준 이야기 중에서 오랫동안 남는 이야기는 도움 되는 게 있다고요. 그 순간 흥미로운 것 보다는요. 지나고 보니깐 참 중요하더라, 그런 것을 우리 나이든 사람이 전해주는 게 도움이 안 되겠나 싶어요. `인간 사회의 기본이 뭐다'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 평생 사시면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요.

 "조상 중에 柳成龍선생님이 계십니다. 공무원 하면서 기본이 된 것은 하회 柳씨 자손이라는 것, 가문에 욕을 먹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분이 난리 중에 명나라로 도망가려는 왕에게 `강을 넘으면 조선의 왕이 아니다' 그랬대요. 국가의 존엄, 왕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요. 징비록에 보면 柳成龍선생의 본받을 점이 참 많아요. 그 분은 비천을 따지지 말고 자리를 줘라. 그래서 평민이지만 장수를 만들고 노예지만 졸장을 만들었어요. 둘째는 사람을 잘 써라. 이순신을 수군으로 발탁한 것도 이분이죠. 또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사들에게 월급을 줬어요. 현실적인 사람이었죠. 여담인데, 그때 보니깐 소금을 월급으로 줬더라고요. 우연인지 서양에서 솔저(soldier)가 솔트(salt)에서 나왔어요. 서양에서도 군비로 소금을 줬어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제가 안내를 했어요. 안동을 방문하면서 柳成龍선생 일화와 풍수지리에 대해 설명해 줬죠. 柳成龍선생이 영의정을 지내고도 대단히 어렵게 말년을 보냈다고 했더니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서양에서는 그 정도 직책 마치면 잘 사니깐. 이해도 못하고 동의도 못하겠다 하더라고요. 세상 사는데 등대 같은 분이죠."

 인터뷰 초반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던 柳총재와의 만남은 그가 50년 전 학창생활을 기억해내면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인터뷰 정리를 막 끝낼 즈음 필자는 이양하의 `청춘예찬'을 떠올렸다. 젊음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정리=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