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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호 2008년 10월] 문화 꽁트

유리상자



엘리베이터로 19층까지 올라온 박경직은 출입카드를 센서에 대면서 뒷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어젯밤 꿈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큐빅이라는 영화에서처럼 박경직은 사방이 유리벽으로 된 작은 방에 갇혀 있었다. 유리벽은 거울처럼 보였는데 표면이 고르지 않아 그를 이상한 괴물처럼 찌그러지고 험악한 모습으로 비쳐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아보았으나 출입문은 고사하고 사방의 유리벽은 이어진 틈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박경직은 천정을 올려다보고 또 한 번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 벽과 마찬가지로 천정에는 흉측한 괴물 하나가 탈출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천정에 비친 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진공상태의 정육면체 같은데 신기하게도 호흡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또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땀이 나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박경직이 체념한 채 한쪽 구석에 기대어 있었을 때, 박경직은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경직은 한동안 그 움직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으나 등을 압박하는 듯 한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박경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뛰쳐나왔다. 사방의 유리벽이 아주 느린 속도로 조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방 한가운데 서 있던 그는 천정도 똑같은 속도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시늉에 그칠 뿐 그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무슨 꿈인지 머리만 띵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출입문 센서에 카드를 대는 순간 어젯밤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유리벽으로 막힌 공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꿈을 떨쳐버리려는듯 기록검토에 몰두하고 있는데 김회고 부장으로부터 좌배석 판사와 함께 부장실로 오라는 호출이 있었다. 부합의도 끝났고 특별히 논의할 사안도 없는데 이례적인 일이라 박경직은 송연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장님 부르셨어요?”
 박경직과 송연실은 부장실로 들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앉으세요. 차나 한잔 하려고 불렀습니다.”
 차나 한잔 하려고 불렀다는 부장의 말에 박경직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송연실도 무표정하게 그 맞은편에 앉았다. 배석들의 마뜩잖은 표정에 부장의 안색이 구겨졌지만 박경직은 이를 무시했다.
 “요즈음 박 판사나 송 판사가 복잡한 판결 쓰는데 고생이 많은 것 같아 내가 오늘 맛있는 것 좀 사주려고 합니다.”
 김 부장은 만면에 자랑스러운 웃음을 띠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박경직과 송연실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부장을 바라보았다.
 “부장님.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박경직은 예의를 갖추며 조심스럽게 김회고에게 물었다.
 “아. 뭐 특별한 건 아니고, 나하고 대학동기인 심호인 서울법대 교수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최근 돌아왔어요. 그래서 오늘 저녁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턱 내겠다고 해서 말이야. 그 친구, 여유가 있는 집의 외아들이라 돈 걱정은 안하는 친구예요. 박 판사 어때요?”
 김회고는 박경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박경직은 업무내외를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처신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부장님.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외부인과의 법정 밖에서의 접촉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장님과 친구이고 유학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되지 않는 대학교수이시니 업무와는 관련이 없겠지만 그래도 좀 껄끄럽습니다. 또 아무 이유 없이 식사 대접을 받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박경직의 말에 김회고의 안색이 변했다.
 “그래요? 송 판사의 생각은 어때요?”
 김회고는 송연실에게 도움을 청하듯 물었다.
 “박 판사님이 참석할 수 없다면 저도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도 있는데 이렇게 갑작스런 제의를 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송연실도 겉으로는 미안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김회고 부장의 제의를 거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갑작스런 제의는 사생활 침해가 아니냐는 투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럼 그 얘긴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김회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박경직과 송연실도 찜찜한 표정으로 부장실을 나왔다.
 “어머니,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퇴근 후 귀가하자 모처럼 집에 다니러 온 어머니를 보고 박경직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아니다. 일은 무슨? 피곤할 텐데 그만 쉬어라. 나 갈란다.”
 그녀는 아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피곤한 모습으로 귀가한 박경직을 보자 서둘러 일어나 가버렸다.
 “어머니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당신 알아?”
 저녁을 마친 후 박경직은 처에게 물었다.
 “글쎄요. 뭐 별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 그래도 당신에게 무슨 일로 오셨는지 얘기하셨을 것 같은데.”
 박경직의 눈치를 보던 처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어머니가 당신 신경쓸까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어머니가 아는 분한테 돈을 좀 빌려줬는데 계속 이자도 안주고 갚지도 않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소액소송을 제기했는데 패소하셨대요.”
 “뭐? 패소해? 왜?”
 박경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돈을 빌려줬다는 차용증서도 없어서 판사가 어머니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대요.”
 “뭐라고? 어머니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아니 뭐 그딴 판사가 있어? 평생 남의 것이라고는 조그마한 것 하나 탐내지 않는 분인데 믿을 수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박경직은 흥분했다. 어머니야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아, 그런 얘기를 진작하지, 왜 이제야 하셨대?”
 “그거야 당신이 그런 얘기하면 제대로 들어주기나 해요?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건 당신이잖아요?”
 그녀는 괜히 자기가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박경직에게 쏘아붙였다. 박경직은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박경직은 출입카드를 센서에 대면서 또 다시 어젯밤 꿈이 생각나 기분이 언짢았다. 어젯밤에는 유리벽에 갇힌 꿈이 아니라, 그가 누에로 변해 스스로 실을 뽑아 자기 자신을 고치 속에 가두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참 요새 몸이 허해져서 그런지 별 괴상망측한 꿈을 다 꾼다고 생각했다.
 박경직은 다음 주에 선고해야 할 사건 때문에 정신없이 기록을 검토하고 요점을 정리하고 부지런히 판결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부합의는 끝났지만 아파트 공사에 관련된 사건이라 사안이 복잡하고 증거자료가 많아 기록이 두꺼웠다. 사실 이 사건 정리 때문에 며칠째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 무렵, 하루 종일 기록을 붙잡고 씨름한 끝에 드디어 판결 초고를 완성하고 박경직은 탈진한 듯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박 판, 뭐가 그렇게 바빠? 이 변이 여러 번 전화했다는데 전화도 안 받고? 이 변 전화는 일부러 안 받는거지? 사람 참….”
 같은 층에 있는 다른 부의 유 판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유 판사는 박경직의 연수원 동기이고 이 변 역시 다 같은 연수원 동기였다. 박경직은 부 여직원에게 변호사로부터 오는 전화는 절대 바꾸지 말라고 엄명해 놓았고 휴대폰 역시 변호사가 하는 전화는 일체 받지 않았다.
 “이 변이 왜? 할 말 있으면 법정에서 하거나 준비서면으로 제출하면 되지, 전화는 왜 했다는 거야? 그리고 이 변이 선임한 사건은 이미 결심해서 더 이상 들을 얘기도 없어.”
 “야, 박 판, 이 변이 바로 그 아파트 공사사건 때문에 전화했대. 당사자들 사이에 합의가 돼서 판결문 쓸 필요 없다고 그 말 하려고 전화했다던데. 잘 됐잖아? 판결 쓰기도 골치 아플텐데.”
 “뭐? 합의가 돼?”
 박경직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 판은 운도 좋다. 그런 복잡한 사건이 척척 합의로 해결되고 말이야. 어쨌든 난 분명히 얘기 전했다.”
 유 판사는 유쾌한 걸음걸이로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박경직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러다가 정말 내가 누에가 되는 것 아닐까. 박경직은 한참동안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 그리고 빌딩과 빌딩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에 수없이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뒤엉켜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저 많은 차량들과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후 텅 빈 방안에 불도 켜지 않은 채 혼자 앉아 있던 박경직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야, 이 변! 나야, 박경직.”
 수화기 저쪽의 상대방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야, 이 변! 아직 퇴근 안했네, 잘됐다. 나 오늘 저녁 좀 사주라. 나 이 변이 사주는 밥 한번 먹고 싶다. 그래, 고마워.”
 박경직은 휴대폰을 끄고 다시 한 번 창밖의 차들과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 제발 오늘 밤도 꿈을 꾸자, 유리방이든 고치든 죽기살기로 깨부수고 말리라. 박경직은 누가 보기라도 하듯 저멀리서 작은 벌레들처럼 꼼지락대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