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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호 2004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10년 만에 받은 학부 졸업장

崔 俊 浩(56년 法大卒)인천지방법무사회 법무사

1946년 5월 당시 필자는 서울 청량리 밖 구 법전교사에서 전문부 1학년을 맞았다. 그때는 군정기로서 초대 총장은 헤리.B.멘스테드 박사, 법대 초대 학장은 키가 조그만 하고 눈, 코가 반짝이는 高秉國(50년 文理大卒)선생님이셨다.  전문부 A․B반은 예과의 성질을 띄어서 2년 수료 후 학부 1학년으로 오르게 돼있고, C반은 구제 전문학교 즉 취직위주로 전공과목 교육에 치중해서 3년 졸업제의 마지막 장이었다. 필자는 나이도 젊고 해서 A․B반을 택하게 됐다. 아마 A반이 법학과 선호, B반이 행정과 선호인 것 같았다. 청량리 교사에서는 학과 공부를 한 기억은 별로 안 나고 강당에서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소위 國大案 찬성과 반대 토론만을 구경하는 것이 거의 일과가 됐다.  바야흐로 해방 후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좌․우익 진영의 사상적 갈등이 예리하게 표출된 때여서 지도급 상급생들의 사자후는 모두 참으로 들을 만 했다. 이런 어간에 교사가 서울 을지로 사범대학교 구내로 옮겨가게 됐다. 학생들이 책상과 걸상을 메고 행렬을 지었다.  잠시 이렇게 보내다가 학교는 또 종로5가 동숭동 대학본부로 옮겨지게 됐다. 우측의 대학본부건물, 정면의 본관, 좌측의 도서관과 연구실. 이제 정말 학교에 온 것 같았다. 당시 예과의 성질을 가진 A․B반은 교양과목으로 철학, 논리학, 윤리학, 심리학, 문화사, 영강, 독강 등 백화란 만한 학과목이 줄져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나중에 미국 대사로 가신 高光林(45년 京城法學部卒)교수와 보사부 장관 및 외대 총장을 하신 朴術音교수(영강), 金曾漢(44년 京城法學部卒)(독강)․安浩相교수(철학)의 시간엔 학생이 많이 모였던 것 같다.  朴術音교수의 텍스트 첫머리에 요단강을 건너서 멀리 전선에 나가있는 이스라엘 병사의 이야기가 있었다. 강의를 한창 진행하다가 갑자기 교수는 탁자를 쾅 치셨다.  『공부하기 위해서 어려운 경쟁을 뚫고 대학에 온 여러분, 서양은 양대 흐름인 그리스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변천사입니다. 이것을 알고 떠들어요. 좌도 좋고 우도 좋아요. 그러나 공부할 때는 우선 충분히 공부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또 安浩相교수는 꼿꼿이 서서 「참」의 철학에 대해 그 카랑카랑한 목청을 돋궜다. 뻔질나게 안경에 손을 대면서 학생들을 송곳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또 다시 강의실이 옮겨졌다. 이쪽 담과 저쪽 담 사이에 구름다리가 놓여있고 그 밑으로는 학교 뒤 낙산으로 가는 호젓한 길이 뚫려 있었다. 이 다리 위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면 학교 앞 시냇가에는 개나리와 목단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책을 끼고 경성공업고등학교 시험소가 있는 교사의 강의실을 찾는다. 네 번째의 집들이다.  이때쯤엔 대부분 학생들은 고시 등 진로를 잡는데 진지했고 나 같은 사람은 좌우 힘의 압력이 싫어서 을지로 입구에 있는 국립도서관과 소공동의 시립도서관을 많이 찾았다.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안만 읽어도 읽을거리는 계속 쏟아졌고, 그러는 사이에 진짜 전공과목은 소홀히 되어 어느 틈에 고시공부는 물을 건너간 형국이었다. 학부 3학년 때 6․25가 터졌다.  6월 28일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에도 학교에 나갔다. 이화장으로 오르는 학교 담에 웬 사람을 예수님 십자가에 걸어놓듯 걸어놓고 마구 떠드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웃해봤다. 소위 인민재판이란 것이었다. 빵빵~ 빵. 우리들이 배운 것들하곤 아주 딴 판이었다. 씁쓸했다. 서로 소매를 당기며 집으로의 길을 재촉했다.  그 후 4년의 공백이 있었고 재입학 절차를 밟아 56년 봄에야 10년만에 학부 졸업장을 거머쥘 수 있었다. 도대체 내가 공부를 한 것인지 만 것인지 가늠이 안가는 학창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