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호 2008년 10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金 商 周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수장은 원장이 아니라 회장으로 부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술원을 설립할 당시이던 1954년 우리 사회는 `원장'하면 유치원 원장만 있었던 시절이라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국정원장' `감사원장'이 나오는 시대인데도 학술원(장)은 아직도 `회장'이라고 부른다. 작은 일이지만 학술원의 `마인드'를 엿볼 수 있는 단초다.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고집이랄 수도 있고 변화에 둔감한 `정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 학술원은 이 지점에 서 있다.
학술원이 대국민 서비스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잘 모르는 곳'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잘 모른다는 것이 학술원의 위상자체에 대한 불신이나 과소평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학술원은 지난 60여 년 동안 한국 지성계를 이끌어 온 그야말로 지성의 전당 중에 전당이다. 학술원 회원 가입이 교수를 포함해 학문을 업으로 삼는 모든 학자의 꿈이라는 평가에 대해 크게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7월 11일 55차 정기총회에서 모교 재료공학부 金商周(금속공학4956·77세)명예교수가 32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金회장은 춘천사범학교,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원을 졸업했다. 모교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교수, 공대 교무과장·학장, 부총장, 대한금속학회장 등을 지냈다.
서울 서초동 학술원에서 만난 金회장은 “내세울 것이 없어서 평생 나서지 않고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고 웃으면서 “동창회보에 실리는 것이니 동문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말 곳곳에 동문과 동창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 대한민국학술원이 폐쇄적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회원들은 대학교수나 연구원들입니다. 학자 숫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난 반면 회원 숫자가 적다 보니 학술원을 선망의 대상과 질시 대상으로 보는 두 가지 눈으로 갈립니다. 초창기 땐 우여곡절이 많았죠. 대통령이 직접 회원을 임명하다 보니 권력이 개입돼 문제가 생겼어요. 이후 외국의 여러 학술원을 참조해 몇 번의 법 개정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학술원법이 만들어졌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의사 결정을 하게 됐죠. 실질적인 업무는 사무국장을 비롯해 사무국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사무국장은 교육과학기술부 국장이, 그 아래 직원들은 교육과학기술부 공무원들이 파견 나와 업무를 보게 됩니다.”
학술원은 1954년 `문화보호법'을 재개정해 만든 1988년 `대한민국학술원법'에 따라 학술 발전에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고 학술연구와 그 지원사업을 하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국가기관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등 잇달아 연구기관들이 설립돼 정부 보조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이들 단체들이 임의단체인 반면, 학술원은 법으로 정해진 유일한 단체다. 그야말로 모든 학술 기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1백50명 이내의 회원으로 구성되며, 회원 임기는 4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 회장은 어떻게 선출됩니까.
“엄밀히 말해 `추대'입니다. 회원들이 총회에서 각자 한 사람씩 이름을 적어내면 한 사람이 과반 수를 넘을 때까지 투표합니다. 관례적으로 인문사회과학부와 자연과학부에서 번갈아가면서 회장을 배출하지만 이 역시 정해진 건 아닙니다. 달리 규정을 둔 것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순탄하게 회장 추대가 이뤄지고 있으니 신뢰와 합의를 바탕으로 한 가장 민주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장이라고 해봐야 예산 집행권이나 인사권을 갖는 게 아닙니다. 방향도 인문사회과학부회와 자연과학부회 각 분과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분과회, 임원회, 부회 및 총회에서 결정합니다. 대외업무를 하는 일이 주 업무죠.”
金회장은 “회원 평균연령은 80세가 조금 넘고 정원은 1백50명인데, 현재 1백45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원을 늘려야 된다는 여론이 있어서 고려해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도 1백50명 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적은 것은 아니에요. 신입회원 선출은 대개 그 분과에 결원이 생길 경우, 즉 회원이 사망했을 때 새로 선출해 왔습니다.”
- 결원이 매년 생기나요.
“회원분들이 대부분 해방 후 우리나라의 학문 기초를 일궈놓은 분들이라 평균연령이 높습니다. 평균적으로 매년 7∼8분이 별세합니다. 1백40여 명 중에서 7∼8명이 매년 돌아가신다고 하면 15∼20년이면 한 세대가 바뀐다고 볼 수 있죠.”
- 종신은 아니죠.
“처음엔 종신이었는데, 회원들 스스로 임기제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 바뀌었습니다. 4년 임기 끝나고 연임할 수 있는데 한 번 선출되면 연임 절차가 간단해 대개 회원들이 연임할 수 있습니다.”
金회장은 특히 “공정성이나 객관성면에서 학술원만큼 따라오는 조직이 드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단 2개 이상 복수 학회에서 역시 복수 인원의 추천을 받습니다. 그리고 회원심사위원회에서 각 분과 위원들이 모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가부 투표를 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 이상이면 모두에게 투표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모두 노(No)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최다 득표를 얻은 후보자를 가려서 다시 그 분에 대해 가부여부를 재투표한 뒤 총회에서 인준을 받게 되면 정식 회원이 됩니다. 어떤 기관과 비교해도 이처럼 공정하고 엄격한 절차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일반인들도 납득할 수 있죠.”
- 나이 제한은 특별히 없나요.
“따로 두고 있진 않습니다. 과거에는 연구업적보다는 공적중심으로 따졌습니다. 이것은 학술원뿐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사회적 요구사항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를테면 요즘 교수 승진도 옛날에는 그 분야에서 얼마만큼 공헌했느냐를 평가했는데 요즘엔 논문 등 업적중심으로 평가하는 추세 아닙니까. 물론 우리는 학술원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업적을 제일로 쳐야 하지만 그 다음으로는 학자로서 얼마나 모범적 삶을 사셨느냐 하는 인품도 회원들이 많이 봅니다.”
- 최고령 회원은 연세가….
“최근에 99세 되시던 분이 돌아가셨고, 현재 1914년생(94세)이신 분이 최고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연소 회원으로는 정년이 안된 65세 이하 현직교수가 2∼3명 활동하고 있고요.”
- 학술원과 관련해 학술원상이나 우수학술도서 선정과 관련해 공정성 시비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학술원에선 징크스가 하나 있습니다. 로비를 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자신의 공적이나 책을 남들에게 알리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암묵적 합의가 회원들 간에 아주 굳습니다.”
- 한국 사회는 곳곳이 원칙이나 법보다는 정치가 지배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원은 그러한 정치바람은 없었나요.
“이곳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 상당히 보수적인 면이 있죠.”
-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 사회의 지식인 및 지성 집단이 앞으로 나아가야 될 방향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액션을 취해야 되겠지만 학술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죠. 매달 각 분과 회장들이 모여 임원회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 몇 학번이신가요.
“49학번이니까 6·25전쟁 나기 1년 전에 모교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엔 춘천사범학교 공과를 졸업했습니다. 6·25 때는 학도병으로 종군활동을 하다 보니 4년이 늦었어요. 학번은 49학번인데 졸업은 56년도에 했어요.”
- 모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시대적으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강원도 춘천을 감자바위라고 했는데(웃음) 그 곳에서 서울대 들어간다는 것은 요즘 서울대 입학하는 것만큼 힘들었어요. 운이 좋았죠.”
“운이 좋았다”는 말씀에 필자는 잠시 숙연해졌다. 金회장 세대는 일제 때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은 최악의 상황에서 조국을 굳건히 세운 가장 고생 많은 세대였다. 그의 지난 삶은 `조국을 지키고 재건하기 위한 전투였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전쟁에도 참전하셨죠.
“대학교 2학년 때 6·25가 났는데 당시 공대가 공릉동에 있을 때죠. 일요일이었는데, 같이 하숙하던 부산 출신 대학동기와 시내에 영화 보러 왔다가 군인들이 갑자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노심초사하다 전쟁이 터진 지 이틀 후인 27일 집에도 못가고 그 친구와 부산으로 무조건 피난 갔습니다. 四顧無親이니 머물 곳도 없고 밥 먹을 데도 없는데, 보니까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당시 金회장과 함께 지원한 친구들 중 반 이상이 戰死했다고 한다. 金회장은 “모교가 목숨을 살렸다”고 말한다.
“당시 국군 중에서 대학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울대 공대 출신이라고 하니까 차출돼서 작전과에서 지도 작성을 맡게 된 거예요. 적의 위치를 파악해 작전을 어떻게 짤 것인가를 구상하는 것을 돕는 거죠. 당시 연대장께서 김 군, 김 군 하며 많이 아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하지만 작전 중 오른쪽 허벅지에 총을 맞아 경주 육군병원에서 68일간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 상이군인이시네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학도병에겐 군번이 없어요. 제대증을 받았으면 혜택이 있었을 텐데 뭐, 관뒀죠.”
金회장은 답할 때마다 “자랑할 것이 아닌데, 아닌데”하며 쑥스러워했다. “손자들한테나 털어 놓을 일을 뭐 대단하다고 만천하에 공개하느냐”는 거다.
필자는 그런 金회장의 모습을 보며 새삼 내가 숨 쉬고 있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선대 세대의 노고에 숙연해졌다. 틈만 나면, `이 나라는 세워지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아닌가.
- 힘든 시절 겪은 일화들이 많으시죠.
“우리 세대가 가장 어려운 시대에 살았잖아요. 일제 말기에는 전쟁에 동원돼서 공부 못했지, 해방이 돼서 이제 좀 공부하려고 하니 전쟁이 났죠. 저는 4년 밖에 안 늦었지만 저보다 졸업이 더 늦은 사람이 있어요. 모교에서 강의할 때 제 강의를 듣고 졸업한 동기생이 있을 정도니 참 불행한 시대였죠. 그러니 제대로 공부한 것도 없고요.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됐고, 강의를 하다 보니 공대 학장, 부총장 등 보직도 맡게 됐죠. 그때만 하더라도 연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학술원 회원이 되고 이렇게 회장까지 맡게 된 것 같습니다.”
金회장은 공학 분야에서는 처음 배출된 회장이다.
- 금속공학은 어떻게 전공하게 되셨는지요.
“일제강점기 때는 대개 교육받은 사람들이 법학 아니면 의학을 전공했어요. 이분들이 사회의 지식층이었죠. 그런데 사범학교 때 공학을 전공한 선생님께서 저보고 장차 철강을 공부하면 나라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광복이 되어 나라가 재건되고 부자가 되려면 자연계나 공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 `공학 분야에서 무엇을 공부하면 되느냐'고 여쭸더니 금속계통을 하래요. `왜'냐고 다시 여쭸더니 일제시대 때는 금속과 관련된 산업들이 국가의 기간산업과 직결됐기 때문에 금속 계통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금속공학과를 가게 됐죠.”
- `저합금 구조용강과 기능성 철강재료 분야 연구의 선구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좀 설명을 해주신다면.
“누가 선구자라고 알아줘야 선구자죠.(웃음) 철강재료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강도가 좋고 좋은 재질의 강판을 만들 수 있느냐를 연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부조직을 어떻게 바꿔주느냐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는지를 공부했죠. 한마디로 철강의 질을 높이는 겁니다. 저탄소 고장력강이라고 자동차 강판에 많이 쓰이는 재료로 강도가 좋아야 외부충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포스코가 생기기 전부터 그걸 오랫동안 연구 개발해왔습니다. 그 시대에는 가장 첨단 분야라고 할까요. 거기에다가 합금원소를 조금 집어넣으면 더 강력해져서 저탄소 저합금 고장력강이라고 하죠.”
- 회고해보시면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이 꿈만 같으시겠어요.
“저희 때만 하더라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학에서 연구기초를 닦은 사람들과 산업계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동량들입니다.”
- 회장님도 공대에 입학할 때 나라의 기간산업을 일궈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셨을텐데, 공학은 그러한 역할을 계속해야 되지 않나요.
“네 그렇죠.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경제가 발전하는 거고요.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이나 생산기술, 공학이 발전해야 된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해서 문제죠.(웃음)”
- 요즘 대학개혁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서울대도 많이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부총장까지 지내셨죠.
“대학개혁은 좋은 일이에요. 공대 학장을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했는데 당시 제가 교수평가제도를 도입해 경쟁을 시켜야 더 좋은 연구업적을 낼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서울대는 훌륭한 인재를 기르고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내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까 모교가 SCI 논문 수에서 세계 24위를 차지했더군요. 대학 전체가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위치에 오르기까지 공과대학이 크게 공헌했다고 자부합니다. 카이스트가 생긴 지 20년 정도 됐는데, 정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고 외국에서 많은 인재들을 데려오는 등 지원을 많이 해주니까 연구수준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죠. 서울대는 그런 지원 없이도 현재 대등한 교수 연구능력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대단한 거죠.”
- 예일이나 하버드대 출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문들의 지원이나 네트워크가 굉장히 잘 이뤄지고 있던데.
“대단하죠. 하버드대의 경우 부모가 졸업생이면 그 자녀에게도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또 지도교수가 하버드대 출신이면 그 학생도 특별대우를 받고 있고요. 우리나라에서 그랬다간 큰 일 날 일이지만요. 그런 맛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 보통 학술원 하면 지원도 많이 받고, 권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산은 깎이지, 학술활동을 하고 싶어도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여건이나 하다못해 연회비도 못 낼 판이니 정부에서 못 도와주면 자체적으로 펀드레이징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金회장은 “바깥 생각들과는 달리 학술원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서운한 마음을 표현했다. 실제로 한 해 예산 35억원도 인건비 같은 고정비용을 빼고 나면 턱없이 부족하다. 참고로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한 해 예산이 1천억원대를 훌쩍 넘는다. 35억원이라면 한 차례 열리는 대규모 문화행사 지원 정도의 예산이다.
“수당이라고 해봤자 국제학술대회에 한 번 갔다 올 수 있는 경비도 안 되니 최소한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산도 안됩니다. 우리나라에 국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서 로비활동을 하고 싶어도 무엇으로 합니까. 답답할 따름입니다.”
“학술원이 뭘 하는 곳이냐는 말씀들을 하시는데, 이곳은 평생 동안 훌륭한 업적을 낸 사람을 국가가 우대하고 보살피기 위해 만든 기관입니다. 회원들에게 연구업적을 내라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평생 학문연구에 매진하다 보면 노후에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회원 중에 어려운 분들이 많아요. 저희 때 시설 좋은 연구소가 있었습니까, 연구비가 넉넉했습니까? 이분들이야말로 고생해서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거든요.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풍토라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죠.”
金회장은 그동안 살면서 “인터뷰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왕 회장을 맡고 보니 내가 희생을 해서라도 학술원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李五峰논설위원·정리=表智媛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