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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2008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金 炯 旿 국회의장



 

- 이런 곳에 옥잠화가 있는 것은 처음 봅니다. 구례군수가 보냈네요. 옥잠화를 원래 좋아하시나요.

 "야생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의장 공관에 외국인과 국회의원들도 많이 오는데, 한국 야생화에 대해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공관에 심어 놓으면 더 낫지 않겠어요? (金의장은 동아일보 시절 선배로 사진취재를 위해 동행한 李五峰선배께 "李선배가 야생화 대가죠" 했다.) 농촌진흥청에 특별 의뢰해 심었어요. 매발톱, 구절초, 산마늘 등 수십 가지가 있어요."

 (필자는 2002년 12월 한국기자협회장 시절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한국벤처기업상 시상식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여느 국회의원들과 달리 자신의 시상 차례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모든 순서가 끝나서야 자리를 뜨는 거였다. 그 후 매년 같은 자리에서 만났는데, 마찬가지였다.)

 - 의장님에 대해 인상적인 게 두 가지입니다. 예전 벤처상 시상식 때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키셨던 것 하고 직접 전화 받으시는 것인데요.

 "할 일이 없었지 뭐. 李相起씨니깐 받았고."

 (그는 딴 의원들과는 다른 게 많다. 국회의장 명패에 새겨진 `김형오'란 한글이름 서체도 보통 쓰는 것과 다르다.)

 "우리 비서진에서 만들었는데 거의 초선 때부터 사용했어요. 명함도."
 - 이메일은 직접 보십니까.

 "요즘은 못해요. 대신 꼬박꼬박 챙기라고 하죠."

 - 핸드폰 문자는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 외에는 안 보내죠."

 - 국회의장 되시니깐 어떠세요. 우선 소감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더라고요. 매일매일 생활이 바쁘게 돌아가잖아요. 자기 전에 국회의장으로서 소임을 잘 하고 있는지, 항상 되묻고 자성을 해요. 이 시기에 의장 자리를 맡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거기 억눌려 살아서는 안 되겠다 마음먹고 있어요. 책임감에 눌려 있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하고 생각의 여유, 행동의 자유가 없어지죠. 이 자리에 오기까지 행동하고 처신했던 것들을 관철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처신은 항상 무겁게 하면서 사고는 바르게, 자유롭게. 신선한 공기를 마셔가면서 말이죠."

 - 비서관에게 의장님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맑은 힘'이라고 하더군요. 마음에 드세요.

 "내가 지은 것은 아닌데, 상당히 내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는, 좀 건방진 이야기지만 참 잘 지었다 싶어요. 추구하는 과정이고, 경구가 되기도 하고…."

 - `빛날 형, 밝을 오' 이름자가 전부 환한 거네요. 평생 남에게 비추는, 본인은 발광체니깐 괴롭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남에게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죠. 편안하게 살아가는 거죠."

 - 오늘 아침 나오면서 무슨 생각 하셨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이 만찬수준이니깐, 오늘 아침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공관 뒤에 산책로가 있어요. 제법 높아요. 서너 번 왔다갔다하니깐 기운이 들더라고요."

 - 보통 힘들 때는 어떻게 풀어가세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많으시죠.

 "정치인들은 하루하루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해요. 또 편안하게 생각을 하려고 하고. 골몰만 하면 답이 안 나와요. 밖에서 산책도 하고 그러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고 그래요. 중요한 것은 생활자체를 즐겨야 됩니다.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나는 왜 이럴까 그러면 못 사는 거죠. 이것이 나의 운명이고, 생활이다 하다 보면 사심 없이 하는 길이 열리더라고요."

 - 원로 언론계 선배 몇 분에게 의장님에 대해 물었더니 대체로 공통된 게, `성실한 기자였다, 그러나 주류는 아니었다.' 국회 쪽에도 물어봤더니 마찬가지 답이 나와요. 주류는 아니었지만 비주류도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국회의 No.1이 되신 건데 결과적으로 지난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금년 2월까지만 해도 내 스스로 의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개인적으로 한 달 이상 고민했어요. 마음을 굳히고 출마한 이후 주변에서 왜 국회의장이냐, 끊임없는 반론이 나와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서 주변 사람들과도 회의를 안 했어요. 지금도 의장 된 것에 대해서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자신 있게 내 생각을 펼치려 합니다."

 - 주류가 아닌 것과 비주류인 것은 다르죠.

 "저는 주류가 아니었어요. 또 주류가 될 만한 능력도 안 됐고요. 주류가 되기엔 내가 좀 삐딱해요. 현재와 현상에 만족하지 못해요. 거기 만족해야 주류가 되는데, 현상유지 세력에 대해 내 스스로 비판적이었고, 도전적이었죠. 그러면서도 세력을 형성하는 능력이 없어요. 조직을 확대해 나가는 능력이 굉장히 떨어져요. 그러니 주류가 아니었죠. 비주류도 세력이나 조직이 있어야 돼요. 운이 좋아서 5선까지 됐죠. 늘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나 같은 사람도 국회의원을 이렇게 오래 하는데 국회의원 하려고 아등바등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단 하루를 하더라도 대의와 공의에 입각해야죠. 왁자지껄 요란법석을 떨면서 하는 것은 싫어요. 국회의원 치고 자기 쇼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만 지나친 노출증에 걸린 사람들은 싫어해요."

 - 그게 진짜 실력 아닌가요.

 "내 자랑을 하자면, 5공 때 청와대 수석도, 비서관도 아닌 일개 행정관이었지만 상당히 중요한 일을 했어요. 동아일보에서 외교안보연구원으로 갔다가 청와대로 간 거죠. 그때 무슨 일이 있어서 사표까지 생각했어요. 촌놈이 청와대 근무까지 했으니 여한이 없다, 다만 이 일을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했지만, 안 맞아서 노선의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 생각과 같았던 아웃사이더들이 이겼어요. 사표 안 내고 승진까지 했어요. 운대가 좋았던 거죠.

 盧泰愚대통령 때 국회에 들어왔는데 어떤 보직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전국구 의원도 상임위 부위원장 등 여러 보직을 맡는데, 단 한 개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盧泰愚대통령시절 정치 분위기가 오래갔으면 나 같은 경우는 탈락 1호였을 텐데, 또 1년이 지나니깐 金泳三대통령 체제가 들어서고 조금씩 활동영역이 생겨났죠. 시운이 맞아 떨어지는 운칠기삼이라 할까…."

 (그는 "운이 좋아야 되지"하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했다.)

 "내 자랑을 굳이 한다면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로 찾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정치인' 하면 싫어하잖아요. 내 스스로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분야가 정보통신, 과학기술 쪽이었어요. 당시 모 유력 실세가 `너 왜 거기 신청하느냐, 말만 하면 원하는데 아무데나 넣어줄게. 거기는 3류나 가는 곳이야'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굳이 1․2․3지망을 거기로 썼어요. 그때는 교체위원회죠. 교체위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100% 교체된다, 재선이 안 된다 그러던 시절이었죠.(웃음)

 시대를 보는 시각을 넓히려고 노력했어요. 정보통신은 정치와 관계가 먼 분야였고 지역에서도 어린이 대상으로 환경에 관한 글짓기, 그림대회를 열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표가 되는 거였어요. `金炯旿'란 이미지가 `저 젊은 사람이 정보통신에 관심 있어, 아이들에게 환경에 관한 그림, 글짓기 시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정치화시켰죠. 그 외에 대체에너지, 풍력발전 포럼 같은 것을 4년 전에 시작했어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게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 멘토다 하시는 분 있으면 소개를 해주시죠.

 󰡒어느 곳에서나 1초의 망설임 없이 말하는데, 姜英勳 前총리입니다.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찾아간 분이 그분이었어요.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이셨어요. 언론환경이 정말 밥맛 없던 유신시절, 내가 있던 신동아는 더더욱 형편없는 의욕상실 상태였죠. 당시 원고 2백매 정도 글을 썼어요.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라고. 거기에 姜英勳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 줄 있었어요. 만난 적도 없고, 전화통화만 했는데 당신 이야기가 있으니까 신동아를 사보게 된 거죠. 그리고는 金炯旿를 데려오라고 했죠. 총리실에 있을 적에는 이분이 국무총리로 왔어요. 국회로 나간 결정적 계기도 이분이 마련해 주셨고, 정말 묘한 인연이에요.

 국회의장 된 날 저녁, 그분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했죠. 국가관이 참 바르시고 원칙에 강하면서도 겸손하고, 실력을 과시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분과 대화나 토론을 하면 상대자들이 낚시밥이 되는 거예요. 나를 내세우지 않고 굉장히 도덕적인 인생을 사시고 솔선수범하는 분, 그분 앞에만 가면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느낀다고요. 솔선수범하지, 강직하지, 겸손하지, 청빈하지, 외유내강하지, 친절하지, 봉사적이지. 나에게 너무너무 잘해주셨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崔昌潤(사학66졸)박사가 있어요. 참 훌륭한 분이셨어요. 난 처음 청와대에 공보로 갔어요. 스피치라이터 졸병으로요. 동아일보 출신 崔在旭선배 아래였죠. 연설문 초안은 내가 잡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崔昌潤선배가 자기 방에서 일하자고 해요. 그분은 정무였어요. 두 분이 군인 출신 아니다 할 정도로 비군인적이었어요."

 - 국회의장 임기 2년 동안 `金炯旿'란 이름을 걸고 내가 이것만은 꼭 하겠다 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기대하는 답변이 안 될지 모르겠는데, 내가 국회의장을 한 달 고심하고 결심했다고 했잖아요. 한 달 동안 내린 결론은 `대한민국 국회를 바꾸려고 노력했던 의장으로 기억되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다' 입니다. 내가 국회의원을 한두 해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바꾸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돼도 좋다고 봐요. 2년 임기 중 벌써 석 달이 지났잖아요. 18대 국회의원들이 4월 9일 당선돼서 엄청난 포부, 이념, 이상, 실천의지를 갖고 왔다가 넉 달 동안 완전히 산산이 부서지는 형극의 아픔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처한 현실이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거창한 국회 개혁보다 바른 길로 가야되는 모습, 선진국회의 모습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죠. 하지만 임기 중에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20년을 하라면 못 하겠지만 20개월은 잠시 지나가잖아요. 피곤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하자는 게 내 총론이자 결론이죠."

 -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굳이 더 이야기하자면, 국회 운영제도를 뜯어 고쳐 상시국회를 이루는 겁니다. 국회가 1년 열두 달 열려야 된다는 겁니다. 개원협상 한다고 석 달, 넉 달 끄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어요.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면 바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장 후진국적 양상을 이번에 보여줬거든요. 국회에 대한 신뢰감, 가치관이 낮기 때문에 내 스스로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어요. 길거리에 나서는 국회의원들을 얼굴도 못 들도록 여론에서 질타를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국회가 얼마나 형편없으면 국회의원이 밖에서 그러는 것을 국민들이 오히려 이해하려고 하나, 전적으로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국회를 정말 바르게 제대로 이끌어야겠다, 그걸 총괄적으로 묶어서 `정치의 중심은 국회로, 국정의 중심은 국회로' 하려는 거죠. 지극히 당연하고 원칙적인 것이죠."

 - 국회의원만 17년째신데, 정치인으로서 자존감, 자부심을 백점 만점으로 몇 점 정도 주시겠습니까.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점수 좀 후하게 줄려고. 어쨌든 A학점. A+도 줄 수 있죠.(웃음)"

 - 기자를 하다가 정치를 하셨어요. 요즘 그에 대해 논란도 있어요.

 "변명 아닌 변명이지만 기자생활을 3년 채 못했기 때문에 기자출신 정치인이라고 하면 겉으로는 기분이 좋지만 속으로는 좀 미안하죠. 속으로는 찔끔한다고요. 유신시절에는 기자로서 할 일이 없었어요. 펜대를 꺾고 길거리에서 저항해서 감방에 가든지 그냥 머무르든지. 그 상황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는 것은 괜찮았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되죠. 복잡다기해졌잖아요. 한 가지에 대한 정답을 말하기가 어려운 사회가 됐어요. 지금은 기자 하다가 정치권에 들어오는 환경이 만만치가 않아요. 우리 시절에는 기자 하다가 정치권에 들어오면 기대치가 상당히 높았어요. 지금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죠. 확고한 의지와 끈기, 인내가 있어야 가능하죠."

 - 모교 후배나 재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재수해서 67학번인데, 당시 서울대 배지를 수영복에도 달고 다닌다는 우스갯말이 있었는데, 그때도 안 달았어요. 서울대생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 프라이드가 외적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내면적으로 얼마나 충실한가 이걸로 자기를 판단하는 후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의 상대는 한반도 밖에 있어요. 한반도 밖 지평은 훨씬 넓고, 크고 대단히 도전적이고, 한국 안에서의 경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국내 1위 대학은 별 의미가 없어요. 철저하고 심각한 도전정신, 실력을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집무실에서 마지막 질문으로 연하장을 몇 장이나 쓰냐고 물었다. 그는 󰡒많이 하지는 않는데 직접 사인을 하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했다. 의원식당으로 옮겨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이어갔다. 金의장은 된장찌개를 시켰다.)

 - 국회의원들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 하러 국회의원 하는지' 하는….

 "의원 스스로가 표를 의식해서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국회의원이 지역에 가면 제일 많이 듣는 게 `뽑아줬더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에요. 이 말에 노예가 돼서 주중에라도 틈만 있으면 돌아다니면서 굽실굽실 한다고요. 그렇게 경조사 좇아다니면서 언제 국정을 봅니까. 시민단체들은 주중에 국회가 열렸는데 지역구 내려오면 그런 걸 고발해야죠."

 - 국회의원들의 상대 당이나 정부를 비방하는 일부 발언이 국민들 정신건강에 엄청 안 좋아요. 그래서인데, 그런 격한 단어가 나오면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지도록 하면 어떨까요. 발언하면서 유머도 좀 있고요. 품위를 높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거 아이디어네. 국회에서 무슨 말을 시작할 때 `존경하는'으로 시작하는 게 영국에서 비롯됐어요. 이야기할 때는 사람 이름 먼저 부르지 않고 `존경하는 스코틀랜드 무슨 지역의 아무개 위원님' 이렇게 함으로써 화난 게 좀 사그러들기도 하고요. 물론 실제로는 존경은 안 하더라도…."

 (그는 인터뷰 말미 서울대동창회보가 10만부 발행된다는 말에 󰡒우와 무지하게 많이 나가네요"라며 "예전에 보면 사진이 고리타분했는데, 많이 바뀐 것 같네요. 기대할게요󰡓라고 말했다.)



●金炯旿의장은


 金炯旿의장의 비서진 명함 뒷면엔 `시대를 보는 큰 눈 맑은 힘 김형오'라고 새겨져 있다. 청렴, 성실, 사고방식의 유연성 등 金의장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말인듯 하다. 야생화를 무척 좋아해 국회의장 공관에 수십 종 심었다고 자랑한다.

 경남 중․고교와 모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金의장은 1992년 국회의원(부산 영도)에 처음 당선된 후 18대까지 5선째다. 동아일보 기자(75~78년)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78~82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82~86년), 대통령․국무총리 정무비서관(86~90년)을 거쳤다. 국회에선 교통체신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위원회 등 비인기 상임위를 일부러 골라 한 우물을 팠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01~03년), 디지털한나라당 추진위원장(03년) 등을 역임했다. 한나라당 사무총장(04~05년)과 원내대표(06~07년)를 잘 수행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선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사진=李五峰논설위원․정리=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