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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008년 8월] 문화 꽁트

우리 동네 추억



해질녘의 우리 동네는 항상 부산했다.
전찻길 양쪽으로 흐르는 도랑에는 걸레를 빨러 나온 아이들과 집집마다 밤을 밝힐 남포 불의 호야(유리 씌우개)를 투명하게 닦기 위해 나온 아이들이 북적대기 시작해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북한에다 쌀을 주고 그 대신 북한의 전기를 쓸 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북한에서 그만 말도 없이 전기를 끊어 버리는 통에 이제는 밤만 되면 그 불편함을 면할 수 없었다.

우리 집도 길 건너 2층 양옥집에 살았을 때는 카바이트 불도 써보고 남포 불도 써보았지만 왜정시대 구라하시라고 불리던 큰 목재공장으로 이사를 와서부터는 공장의 발전기로 불을 밝힐 수 있어 전처럼 불편함은 없었다.

 “야. 니 그 걸레 칼클키(깨끗하게) 빨았나?”
 “으(응). 한 번 더 행구모(면) 된다.”
 “호야는 닦아서 옆에 잘 놔뚜야지 안 그라모 깨진데이.”
 “니 걸레는 방맹이질을 해야 되는데 손으로만 빨아서 되나?”
 “해지고 나서 방맹이질 하모 창곤이 엄마한테 식급한데이(혼난다). 동네가 망한다 앙카나.”
 “와? 창곤이 엄마가 동네 반장이가?”
 “니 모르나? 아무도 갈지 몬(못) 하는거.”
 “그래도 구라하시 공장 엄마한테는 행님(형님)하면서 쩔쩔매던데 뭐.”
 “그거야 동네 사람들이 다 안 그라나. 다 덕보고 산께네 그라지 뭐.”
 “우리 집도 어제 구라하시 공장에서 톱밥 한 자리(자루) 얻어 왔다 아이가.”

초등학교 4∼5학년이나 되는 머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의 대화가 동네 사정을 얘기하듯 재미있게 들린다.
뿐만 아니다. 이제 여름 해가 잠시 더 어둑해 지는가 싶으면 전찻길 바로 안쪽에 있는 막걸리를 파는 창곤이 엄마가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할 차례가 온다.

그것은 언제나 한 무리의 아이들이 골목을 약간 더 들어간 유리공장 마당에서 곧잘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놀고 있기 때문이다.

창곤이 엄마는 잠시 가게 밖을 나와 앞치마를 두른 채 “창곤아∼”하고 목청을 높인다.
 “창곤아∼ 창곤아∼”를 여러 번 하고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으레 다음에는 입에다 두 손을 갖다 대고는 다시 “차앙 곤아∼”하고 더욱 목청을 돋우는 것이다.
 창곤이라는 놈도 그렇지 이런 해프닝이 매일 해가 지면 있을 줄 알고도 언제나 얼른 대답을 하고 유리공장 밖으로 뛰어 나오는 법이 없다.
 “야∼”하고 못이긴 듯 뒤늦게 골목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다음에는 창곤이 엄마의 매일 반복되는 욕설이 튀어나온다.
 “야 이 쎄(혀) 빠질 놈아 얼른 와서 밥 쳐 묵어라.”
 이럴 때면 으레 동네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이거, 동네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어머니처럼 그저 “또 시작했네” 하시곤 껄껄 웃는 사람들이었다.

창곤이는 나보다 덩치는 작아도 나와 같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오후쯤이면 술이 곤드레가 되어 취해있는 모습이었고 어머니는 자기 작은 도단 집을 방 한 칸만 빼고는 모두 술을 파는 부엌과 좌석으로 만들어 생활을 꾸려 나갔다.

어느 봄날 창곤이는 양지바른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한 쪽 끝이 부러진 큰 가위를 든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창곤이는 얌전히 앉아있고 그 가위를 든 친구는 서 있었다.

창곤이는 어디서 싸구려 난장 이발을 했는지 미처 바리캉으로 깎이지 않은 긴 머리털이 군데군데 섞여 있어 다른 친구가 그 가위로 긴 머리털을 골라주고 있었던 것이다.
 “야. 창곤아, 니 다말래기(달리기) 너거 학교에서 잘 한다 카는 거 들었는데 나도 운동회 때 우리 학교에서 우리 반 릴레이 선수 아이가. 우리 여서(여기서) 유리공장 앞꺼정(까지) 오바레끼(전속력)로 한번 시합해 볼래?”
 내가 용기를 내 먼저 창곤이한테 도전을 했다.
 “내 지끔 가래톳이 서서 다리가 아프데이.”
 나는 벼르고 별렀던 일이라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라모 안 되겠다. 다른 때 한 번 하제이.”
 “으. 알았데이.”

이듬해는 6·25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집은 얼마 안 있어 그곳에서 꽤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나는 창곤이도 창곤이 엄마도 영 잊어버린 채 살았다.
그런데 7년 후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마악 올라갔을 때였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을 마치고 손을 씻으러 수돗가로 갔다가 반듯하게 서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도 나는 창곤이 엄마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껴? 여기는 우찌 왔습니껴?”
 “아이구∼ 내 새끼야∼ 니가 여 댕기나? 우리 창곤이가 이 학교로 전학 안 왔나.”
창곤이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반가워서 야단이셨다.
후일 들리는 말로는 창곤이 어머니는 악착같이 장사도 하고 돈놀이를 하셔서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도 가지고 현금도 꽤 있는 알부자가 되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창곤이와 같은 반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공부보다는 장난을 더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왔다.

그런데도 결국 창곤이는 후일 일류 대학은 아니었지만 어엿하게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또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우리 집도 다시 창곤이 집 근처로 도로 이사를 와 살게 됐다.

그러나 사실은 한 동네에 집이 있긴 했어도 대학이 다르고 친구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방학동안 귀향은 했어도 나와 창곤이는 자주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고 다만 오다가다 길에서 만나면 서로가 반가워할 정도였다.
 
대학 3학년 때의 어느 여름 방학동안이었다.
내가 시내로 나갔다 전찻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을 때였는데 멀리서 아래 위로는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쓴 사나이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걸이로 보아 분명 창곤이라는 짐작을 했지만 얼른 보기에는 마치 어느 촌로가 시골길을 걷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결국 서로가 마주치자 먼저 창곤이가 입을 열었다.
 “야, 니 심심한데 시내 구경 가자.”
 “나는 지금 시내에서 오는 길 아이가, 구경은 무슨 구경?”
 “내 전차 태워 줄께. 그라고 올 때는 내하고 이야기하고 천천히 걸어오면 안 되나.”
 “야, 가기도 싫지만 올 때도 전차를 타야지 걸어오는 거는 또 뭐꼬?” 나는 의아스럽게 느껴져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했다.
 “햐∼ 말도 말아라. 우리 할마시 나한테 심부름시키면서 전차표 딱 두 장만 안주나.”
 “그라모 니 혼자 갔다 온나. 나는 안 갈란다.”

자기 어머니를 할마시라고 하는 창곤이도 문제였지만 다 큰 아이를 멀리 심부름을 보내면서 전차표 두 장만 손에 쥐어주는 창곤이 어머니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나는 그 후 서울에서 줄곧 살면서 창곤이가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한 뒤 부산의 모 운수회사에서 사고담당 술상무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매우 어울리는 직업을 택한 것으로 생각됐다.

명이 짧아서일까? 물론 창곤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먼저 창곤이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그는 50을 겨우 넘기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항상 세상을 얕보지 않고 악착 같이 사셨던 창곤이 엄마와 아무리 불평이 있어도 참고 부모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던 창곤이….

애석하게도 이제는 그 시대 그 골목을 그렇게 시끄럽게 했던 창곤이도 그리고 창곤이 엄마도 이미 내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정다운 사람들이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