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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008년 8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대통령의 눈과 귀 되어 民情 빠짐없이 전달”



                                                       
대담 : 본보 金鎭國논설위원(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겸 정치·국제 에디터)


- 청와대 대통령실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매일 아침 8시에 열던 수석회의를 화·목 이틀간 9시로 바꾸셨는데 그럼 이제 `early bird'는 벗어나신 건가요. 소통을 위한 조치로 아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사실은 청와대 비서진이 진용을 처음 갖추었을 때 서로 얼굴도 모르는 가운데 어떤 식으로 협조를 해야 하는지, 어떤 계통을 밟아서 진행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 체제를 바로 잡는 과정에 쉴 틈도 없이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생겼고 정신없이 바빠서 피로가 누적돼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 중 이틀만이라도 수석회의를 좀 늦추고 청와대 밖의 사람들과 아침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도 나누자고 했죠. 또 토요일 하루는 쉬자고 말씀드려서 8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청와대가 쉬어야 행정부도 쉴 수 있어요. 게다가 에너지 절약 효과도 거둘 수 있고요. 그리고 쉬는 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 실장님은 휴가를 잡으셨나요.
 “일이 좀 많아서 대통령께서 먼저 갔다 오시면 다녀올 생각입니다.”
- 최근에 대통령 지지율이 30% 가까이 회복되고 있어서 실장님이 오시고 난 뒤에 좋아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아니고요. 제가 들어올 때가 제일 안 좋은 상태였죠. 그래서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청와대 비서진을 대폭 교체하니까 국민들도 좀 속시원해 하셨던 거죠. 그리고 촛불시위 뒤에 나타난 일부 폭력행사에는 강력하게 대응하는 등 질서가 잡혀가고 있어서 그런 것 같군요.”
 - 이 정부 조각 때도 입각 제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이번에도 여러 번 고사하셨다고 대통령께서 소개하셨습니다. 수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지요.
 “옛날에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잘 키우는 게 국가적으로 공헌하고 봉사하는 일이고 보람된 일이었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이가 좀 어릴 때는 정부에 들어와서 일하는 게 자신도 없고 겁도 나더군요. 그러다가 울산대 총장을 하면서 학교 기틀도 마련하고 정리도 하다보니 이제는 정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서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걱정도 돼서 사양했지만, 마지막으로 힘껏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수락하게 됐죠.”

- 대통령학을 연구하시고 `정책학원론', `대통령의 경제리더십' 등을 쓰셨는데.
 “미국에서 대통령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공부한 내용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게 우리 사정에 잘 안 맞아요. 그리고 우리는 미국과 너무나 다르거든요. 미국은 국회가 중요한 결정을 다 하고 대통령은 주어진 틀 속에서 움직이는데, 우리는 모든 것에 대통령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미국식 대통령 이론이 이 곳에서는 잘 안 맞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전임 朴正熙·全斗煥·盧泰愚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국정을 관리했는지에 대해 책을 썼습니다.”
 
- 현직에 들어오시니까 책을 쓰시거나 학문으로 연구하실 때와 다른 점이 있나요.
 “현실과 이론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盧泰愚대통령 시절에 책을 쓸 때까지만 해도 노사갈등이 심했지만 사회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해졌어요. 각 분야별로 제 목소리를 내고 있고요. 특히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될 정도로 다양해졌어요. 이쪽에서 일어난 일을 저쪽에서 잘 모르고, 무슨 사건이 터지면 모두 다 알고 있어야 통제가 되는데, 지금은 서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어요.
 그리고 또 예전에 비해 사회가 훨씬 불안해졌습니다. 요즘에는 취업이 제대로 안되니까 대학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도 응시합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보던 시험인데, `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어려워졌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는 가려고 합니다. 현재 대학 진학률이 83%정도 됩니다. 극빈 계층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대학에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 후에도 취업이 잘 안 된다는 겁니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대학 졸업생, 50대 이전에 퇴직하는 가장 등 이런 상황이 누적되기 시작해서 사회 전체가 답답하고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정부에서 뭐라고 하면 믿지 못하고 오해를 하는 거죠.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90%의 사람에게 혜택을 주어도, 10%의 사람에게는 피해가 갈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90%의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10%의 사람들에게는 원망과 불신이 쌓여 있으니 조금만 뭐라고 해도 표출이 되는 겁니다.”

- “행정은 총리와 장관이 해야 한다”면서 대통령실의 그림자 보좌를 강조하셨습니다. “`최고의 비서'란 대통령이 일처리를 효율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미국 백악관의 앤드류 카드 前비서실장의 말이 생각납니다. 대통령실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본격적인 인터뷰군요.(웃음) 대통령실장은 어떻게 보면 대통령의 그림자 비슷합니다. 대통령께서 못 보신 사실들을 빨리 챙겨서 전달하는, 우리 몸으로 따지면 눈이나 귀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죠. 아무래도 대통령께서 한번 나가시려면 경호 등 관련절차가 복잡하니까 잘 못 보게 되죠. 그러니까 들어오는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하는 게 첫 번째 역할이죠.
 두 번째는 브레인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정책을 놓고 대통령께서 장관들과 의논해서 결정을 하려고 할 때 혹시 빠지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완해서 챙겨드리는 거죠. 이런 것이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실장이 해야 되는 일이고요.
 정부 내각과의 관계에서는 청와대 대통령실은 참모본부 역할을 하게 되죠. 일선 사령관인 장관들이 힘을 내서 열심히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 정부 출범이 얼마 안됐는데도 대통령의 주요 공약 사항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입장이 바뀐 겁니까, 아니면 전략상 시기를 조절하는 건가요.
 “기본은 안 바뀝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보면 한꺼번에 막 몰아서 해버리는 수도 있고, 시기를 봐서 급한 것 먼저 해결하고 조금 늦게 해도 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는 등 완급조절이나 시기조절을 할 수도 있잖아요. 여하튼 국민들한테 약속한 것은, 약속해서 집권했으니까, 지켜야 되죠.”
 
- 약속을 했더라도 꼭 조정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죠, 물론. 미국 선거를 살펴보면 당내 지명을 받은 후보들이 정책 공약을 먼저 내걸어 놓고 이쪽에서 공격하면 이렇게 답변하고, 저쪽에서 공격하면 저렇게 답변하는 과정에서 정책을 다듬거든요. 그렇게 다듬어도 현장에 가보면 고쳐야 되는 것이 있어서 수정을 하니까 시간이 더 걸리는 거예요. 레이건 대통령도 선거과정을 통해 `레이거니즘(Reaganism)'을 다듬어서 집권하고 6개월 뒤에 발표해서 추진해 나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개혁은 집권초기에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선거에서는 정책에 대해 따져보는 게 부족했어요. 그동안 정책선거가 아닌 인물선거를 치러왔잖아요. 서로 인물에 대해 따지다 보니 정책을 다듬을 시간이 부족하긴 했죠. 들어와서 다듬어야 하는데, 막 촛불시위가 터지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좀 늦어지고 그렇습니다.”

-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리더십을 보여준 대통령은 어느 분이라고 평가하시는지.
 “그게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요. 朴正熙대통령을 보면 사실 그때 당시에는 어떤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 독재를 아주 심하게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그 업적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도 朴대통령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웃음) 그때까지는 제가 朴대통령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고, 겉으로 나타나 있는 것만 보고 싫어한 거예요. 정권을 계속 잡기 위해선지, 국가를 위해서 하는 건지 몰랐죠.
 여하튼 상황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고, 리더십 스타일이 아니라 후대에 뭐를 남겼느냐 하는 업적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행사해서 업적을 남기면, 그 리더십 스타일 자체도 좋게 평가를 받는 거죠. 그렇지 못한 예가 있어요. 미국의 후버 대통령인데, 이 분은 지식과 지성을 갖춘 젠틀맨이에요. 그런데 상황판단을 잘못해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서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혔죠.”
 
- 李明博대통령과는 1964년 6·3학생운동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것으로 압니다. 그 후의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십시오.
 “제가 서울대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2002년쯤에 서울시가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를 만든다며 서울대 정문 앞에서 후문의 총장관사와 연구공원 쪽으로 고가도로를 낸다고 발표했어요. 그 당시 교무회의 논의 끝에 제가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90%에 가까운 교수들의 반대서명도 받고 했었어요.
 그때 새로운 서울시장에 지금의 李明博대통령이 당선된 거예요. 그래서 鄭雲燦총장, 朴吾銖기획실장 등과 함께 시장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뜻 알았으니 걱정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 뒤에 고가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취소가 됐죠. 아마 지하에 도로를 건설하기로 했을 거예요. 그때 당시 李明博시장께서 취소 조치를 해주신 것은 서울대를 위한 것도 있지만, 청계천의 고가도로 철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기본 철학이 남다르셨던 것 때문이죠.”
 
- 행정대학원동창회장 취임 시에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학의 세계적 위상은 우수한 교육과 훌륭한 연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대가 세계적인 대학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리라 보시는지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은 사회에 나가서 지도자가 됩니다. 지도자로서 갖춰야 될 덕성과 기본적인 소양, 이 두 가지를 위해 인문학, 자연과학의 기초 등을 많이 공부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대학은 커리큘럼을 강화시켜야 하겠죠.
 요즘은 필수 교양과목을 없애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선택과목을 늘리고 있는데, 기본 소양에 대한 부분을 배우지 않으면 약자를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거죠. 그래서 최소한 신입생 때에는 인문학, 철학, 역사, 자연과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 대학시절 스터디그룹에서 부인(홍태화 여사)을 만난 것으로 아는데요.
 “예, 맞아요. 우리 때는 영어 공부하는 스터디그룹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만났는데, 우리 때만 해도 영어 공부가 부족해서….”
 - 이력서를 보면 평탄한 삶을 살아오신 것 같지만,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절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는지요.
 “저는 처음에 농민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68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농림부에 지원했는데, 8개월 동안 발령을 안 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李漢彬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농림부 陳鳳鉉차관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제가 농민들을 선동해서 반정부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발령이 나지 않은 거래요.
 그때 정말 고생했습니다. 저는 고시에 합격했으니 지금의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했거든요. 그리고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대명학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행정학은 지금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인 安秉萬동문이 가르치고 있어서 저는 경제학 강의를 했죠.”
 
- 행정고시 합격 후 잠시 농림부 기획계장으로 근무하셨는데, 이후 학자로 선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요.
 “농림부에 들어가서 2년 동안 정말로 미친 듯이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혼자서 일하다보니까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뒤에 韓鳳洙기획관리실장에게 고시 출신 좀 뽑아달라고 요청해서 최연소로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한 趙壹鎬동문 등을 데려 오기도 했죠.
 그리고 제가 기획계장으로 1차 산업 총괄책임을 맡아서 이들과 함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정교하게 짰어요. 그 내용을 金鶴烈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주재의 경제장관 회의에서 브리핑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죠. 그리고 그런 자리를 통해서 2차 산업과 3차 산업 발표도 듣게 되었고, 앞으로 중화학공업, 제조업 등을 해야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조금 지나서 농림부를 떠나겠다고 했더니 金鶴烈부총리께서 누가 괴롭게 하냐며 경제기획원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만 해도 제가 너무 세상을 좁고 작게 봤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세계, 인류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어서 떠난 거예요.”
 
- 최근까지도 젊은이들보다 더 활동량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세요.
 “아침에 한 10분 정도 맨손체조를 합니다. 울산대에 있을 때부터 했죠.”
 
-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시는지요.
 “요즘은 스트레스가 쌓일 여유가 없어요.(웃음)”
 - 폭탄주를 잘하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많이 드시나요.
 “울산대 총장으로 갔을 때 처음 2년 동안은 엄청 많이 마셨습니다. 울산대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기자와 지역 유지들의 오해를 풀고 교감을 나누며 장벽을 허물려고 하다보니 폭탄주 대장으로 소문이 났어요.”

-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행정대학원동창회장도 역임하시는 등 동창회에 대한 관심도 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동창회 발전을 위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林光洙회장님이 일을 많이 하시고, 고생도 많이 하시면서 총동창회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사재도 털고 시간도 많이 투자하셨죠. 더군다나 친화력도 대단해서 후배들을 참 잘 다독거려 주시는 분이죠. 그래서 총동창회는 정말로 중흥이 된 겁니다. 대부분의 동문이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좀더 동참해 주셨으면 하고요. 서울대 본부에서도 지원을 더 많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바쁘신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鄭正佶대통령실장은

 65년 모교 졸업 후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농림부 기획관리실 기획계장, 경북대 교수를 거쳐 80년 모교 행정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모교 한국행정연구소장, 행정대학원장, 대학원장, 울산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사진=李五峰논설위원·정리=安興燮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