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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2008년 7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문화재위원회 任敦姬위원


화제의 동문

“대한민국은 무형문화유산의 강국”
부친 任晳宰교수 代이은 민속학자

문화재위원회 任敦姬위원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舊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출 시한을 앞두고 대표목록에 올라갈 무형문화유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의 종묘제례와 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가 빠짐없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현재 유네스코 무형유산협약에 가입된 93개국 가운데 3개의 무형문화유산을 올린 나라는 한국, 인도, 일본, 중국밖에는 없다. 무형문화유산과 관련해서는 강국인 셈이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이 매회 빠짐없이 선정된 배경에는 동국대 任敦姬(고고인류64­68)교수의 역할이 컸다. 유네스코가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한 99년부터 아시아지역을 대표한 무형문화유산 선정 국제심사위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2001년에 처음 세계무형문화유산 선정이 시작됐죠. 그때만 해도 이 제도를 모르는 나라들이 꽤 많았어요. 사실 무형문화 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아직도 한국과 일본밖에 없어요. 유네스코도 이 제도를 시행할 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배웠죠. 우리의 인간문화재 제도는 유네스코가 다른 회원국들에게 본받을 만한 제도라고 권장한 것이 그 한 예죠.”

아태 무형문화유산센터 유치를

 
우리는 수나 규모면에서 유럽 등에 뒤질 수 밖에 없는 유형문화유산보다는 무형문화 쪽에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뒤늦게 다른 나라들이 무형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우리에게 대드는 기세가 만만찮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2001년 이 제도가 시작될 때만 해도 중국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세계문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확 달라졌어요. 유네스코 아태지역 유형문화유산훈련센터도 유치했고 이제는 무형문화유산센터까지 유치하려고 합니다.”
 
아태지역 무형문화유산센터와 관련해 任교수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문제거든요. 남들이 관심 없을 때 빨리 진행했어야 했는데…. 이제 일본까지 유치경쟁에 뛰어들었으니 더 어렵게 됐지만 최선을 다해서 유치하도록 해야죠.”
 
任교수는 인류학자로서, 민속학자로서 무형문화유산을 적극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하면 피라미드 등 유형의 구조물만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유네스코도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낮게 봐 유형문화유산의 경우 72년부터 보호제도를 시행했지만 무형유산협약은 2003년에서야 통과됐다.
 
“유네스코에서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도, 사실은 일본인 사무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예요. 유럽의 국가들은 무형문화유산제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편이죠.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보호제도는 지구촌화하는 시대에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예요. 이 제도 홍보에 우리나라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민속학회 회장이며 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인 任동문이 민속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친 任晳宰(철학30졸·前모교 교수)동문의 영향이 크다. 98년 별세한 任晳宰동문은 철저한 현장 조사와 기록을 중시해 문헌 위주의 연구형태에서 벗어나 현장 위주의 문화연구를 정착시킨 한국문화연구의 실천적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설화와 민요 등 다양한 민속자료를 채록해 식민지시대에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모은 자료 가운데 북한의 구전설화, 민요, 무가는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자료로 알려져 있다.
 
“제가 인류·민속학을 공부하게 된 데에는 아버님의 영향이 큽니다. 60년대 전국의 시골을 누비면서 민요를 채록하셨는데, 당시 녹음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굉장히 귀하고 비쌌죠. 크기도 크고 무거워 들고 다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60대의 나이에 그걸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셨으니 대단한 열정이셨죠. 62년에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보유자) 제도가 시행되고 그 당시 초대 무형문화재 분과위원장이셨던 아버님이 주인공들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탈춤 추고 판소리하고 국악 연주하는 분들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 시절이었죠. 그래서 많은 연희자들은 인간문화재를 시켜준다고 해도 극구 거절하고 그랬죠. 무당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아버님이 보존 기록을 위해 함경도 굿하는 분을 우리 집에 모셔서 굿판을 벌이다가 경찰들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미신 타파'라고 해서 굿을 못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 인간문화재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들죠.”
 
그동안 무형문화유산 보호 관련 일 외에도 남편 로저 자넬리(미국 인디애나대 민속학과 및 동아시아 교수)씨와 함께 한국학 관련 책을 영어로 출판해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해왔다. 80∼90년대 부부가 공동 집필하고 스탠퍼드대출판사에서 나온 `Ancestor Worship and Korean Society(조상의례와 한국사회)',`Making Capitalism : The Social and Cultural Construction of a South Korean Conglomerate(자본주의 만들기 : 한국 한 재벌회사의 사회적 문화적 구성)' 등은 한국사회와 문화를 세계학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한국사회와 인터넷'이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라고 했다.

`한국사회와 인터넷' 집필 계획

 
“한국사회 연구의 마지막편이 될 것 같은데, 쉽게 써지지 않네요. 스탠퍼드대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먼저 받은 상황이라서 빨리 써야 하는데…. 인류학자로서 한국처럼 한 세대 동안에 농경, 산업 그리고 정보화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任교수는 강릉단오제의 세계무형문화유산 선정에 대한 보답으로 강릉시 명예시민증을 받았으며, 2006년 민속문화 보호에 앞장 선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