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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호 2008년 6월] 기고 감상평

6·25특집 현대사 실록




최근 沈載甲동문이 1950년 6월 25일 이후 국민방위군으로서 제주도에서 겪은 체험담을 보내왔기에 6·25전쟁 58주년을 맞이해 현대사 실록으로 게재할 가치가 있어서 이번 호에 소개한다. 〈편집자주〉

沈 載 甲(행정52­56)吉瑛羲선생기업사업회장

제주에서 보낸 국민방위군 생활



 `쾅쾅' 북쪽 멀리서 천둥소리가 새벽부터 요란하게 들려왔다. 큰 비가 오려나 생각했다. 이렇게 1950년 6월 25일 그날, 내가 살던 개건너 佳左洞 우리 동네에서는 라디오가 없어서 전쟁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당시 인천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인민군이 남침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6월 27일 화요일, 인천중학교 강당에서는 전교생들이 모여 吉瑛羲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었다. “앞으로 사태는 심상치 않을 것 같으니 학교는 무기휴학으로 들어간다. 혼란한 시국이지만 절대로 학우들 간에 서로 적대하지 말고 감쌀 것이며 사상이 다르다고 학우를 밀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됐지만, 인민군의 남하가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7월 3일 밤 마침내 인천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학교에 가니까 국기게양대에는 인공기가 걸려있었고, `인천의 학생들은 축현초등학교로 모이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축현초등학교로 가니까 강당에는 학생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좌익 학생 대표들이 나와 조국 해방을 위해 모두 의용군에 입대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나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틈타 강당을 몰래 빠져나와 동인천역 방향의 학교 담을 뛰어넘었다. 그리곤 친구 집에 숨었다. 가좌동으로 가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의용군에 잡혀가지 않으려 산 속이나 마루 밑바닥, 다락 등에 숨어 지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용감히 싸우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9월 15일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9월 15일 마침내 인천 앞바다에 군함들이 일렬로 새까맣게 진열하더니 함포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기의 전쟁영웅 맥아더 사령관이 감행했던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인 9월 17일 패잔병 1개 소대와 해병대, 유엔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몇 채의 가옥과 가축이 불탔고 韓모 청년은 대한청년단 단원증이 발각되는 바람에 인민군에게 돌로 머리를 맞아 죽기도 했다.
 인천에 상륙한 국군 해병대와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넘어 평양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전쟁발발 3개월 동안 많은 장정들이 북쪽에 끌려갔던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國民防衛軍을 창설하게 됐다.
 해를 넘긴 1951년 1월 3일 축현초등학교에는 국민방위군에 지원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나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는 밤중에 월미도로 이동했고, 거기서 일본 수송선 신꼬마루(新興丸)를 타고 남으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배는 며칠 동안 정박해 있다가 우리를 상륙시켰다.
 당시 제주도는 제주도 전역을 공산당이 한때 장악했던 4·3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공비들이 한라산에 아지트를 정하고 민가를 습격하고 있었다.
 국민방위군은 행군하다가 중간 초등학교나 큰 회관을 지나게 되면 장정들을 몇 백명씩 풀어 주둔시켰다. 나는 유명한 일출봉이 있는 城山浦 新山里의 신산리초등학교에 주둔하게 됐다.
 하루는 국민방위군 장교가 병사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하더니 육지에서 가지고 온 돈을 모두 내놓으라는 호통이었다. 이 돈 때문에 제주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서 장정들을 윽박질렀는데 모두들 어리둥절한 상태로 조용히 있자 한 사병을 불러내서 주머니와 내복을 뒤졌다. 돈이 발견되자 마구 몽둥이질을 해대면서 나머지 모두의 옷을 뒤지겠다고 하는 말에 모두 질겁을 하고 가진 돈을 다 내놓았다.
 나는 기간사병 후보자로 선발돼 다른 몇 명과 함께 도보로 사령부가 있는 西歸浦초등학교로 가게 됐다. 그런데 이후 서귀포초등학교에서의 국민방위군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20평 규모의 교실을 근 2백여 명이 거처하는 내무반으로 사용해서 밤에 누워 잠이 들었지만 깨어나면 몸 위에 다른 사람들의 다리가 포개져 있었고, 운동장에 모여서 보면 모두들 기침을 하고 시커먼 가래침을 뱉어냈다.
 식사는 주먹밥에, 반찬이라고는 소금국에 제주도에 흔한 고사리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식사시간이면 난리법석이었다. 커다란 국통에 있는 뜨거운 고사리를 하나라도 더 건져먹기 위해 아비규환을 연출했는데 취사반장이 몽둥이를 들고 와서야 기강이 잡히곤 했다. 여기서 장정들의 일과란 것은 훈련을 하고 틈틈이 한라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 메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들 정신적·육체적으로 극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 도민들은 썩은 고구마 조각들을 멍석에 말려서 소주를 만들곤 했는데, 배고픔을 참지 못한 장정들이 행군하다가 모두들 달려드는 바람에 주민들은 국민방위군을 보기만 하면 부리나케 멍석을 걷었다. 어쩌다 썩은 고구마 조각을 햇빛에 널은 멍석만 보면 벌떼처럼 몰려가서 이를 주머니에 잔뜩 구겨 넣곤 했다.
 채소밭 옆을 지날 때는 인분을 잔뜩 뿌린 곳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들어가 당근이며 마늘 등을 뽑아서 씻지도 않고 입에 처넣었다.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장정들은 모두 앙상하게 말라갔고 병든 환자는 늘어만 갔다.
 그러다 결국 국민방위군의 이러한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사건조사 결과 수많은 멀쩡한 젊은이들을 굶겨 죽게 하고 그 보급비와 부식비 등이 막대하게 정치자금화한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서둘러 군법회의를 열었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준장 金潤根, 부사령관 尹益憲, 재무실장 姜錫漢, 조달과장 朴贊源, 朴基煥 등 다섯 명의 최고위 참모들이 대구 교외에서 공개 처형됐다. 이들이 횡령한 것은 현금 24억원, 쌀 2천 가마 등으로 밝혀졌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자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는데, 이때도 국민방위군 측의 얄팍한 술수가 있었다. 국회조사단이 제주도까지 내려온다고 하자, 환자들과 병색이 있는 사병들을 모두 한라산 숲으로 대피시켰고, 조사 일에 맞춰 처음으로 쇠고기 반찬과 쇠고기 국을 잔뜩 먹을 수 있게 했다. 피복도 새로 보급해 줬다. 국회조사단원들이 막사를 둘러보면서 애로사항을 묻자, 모두 “만족하고 있으며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전에 교육을 받았고 대답을 할 사람들도 미리 지명해 놓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후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제주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장정들을 귀향시키기 위해 이들을 제주시내 쪽으로 집결하도록 했다.
 이들은 제주시내 향교 등 공공시설에 수용됐고 지금의 제주비행장이 있는 곳에 설치된 수백 채의 천만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됐다. 극도로 쇠약해진 장정들이 하루에도 십여 명씩 죽어갔고, 그 시체는 한라산 기슭에 묻혔다.
 5월이 되자 수송선 LST가 와서 장정들을 육지로 나르기 시작했다. 한번에 3천명씩 실어 날랐지만, 며칠 만에 오다가 이후에는 십여 일씩 거르면서 왔기 때문에 장정들은 매일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仁中 모표를 단 후배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吉瑛羲교장선생님께서 제주 시내에 피난을 와 계시다는 얘길 하는 것이었다. 서둘러 어렵게 외출증을 떼고서 물어물어 선생님이 계시다는 이도동의 崔元淳변호사 댁을 찾았다.
 마침내 고향을 떠나 멀리 제주도에서 교장선생님과 재회하게 됐다. 셋방을 얻어 지내셨는데, 사모님이 삯바느질을 하시고 계셨다. 나는 반갑고 서러워 울었고, 교장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측은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사모님께서는 서둘러 갈치를 구워 식사를 차려 주셨는데, 6개월 만에 대해보는 식사다운 식사였다. 이후 나는 염치불고하고 댁을 찾아갔다.

 하루는 三姓穴로 교장선생님과 산보를 가게 됐는데 “이 넓은 섬 안에 仁中 학생이라고는 자네 沈군 하나인데 수복도 늦어지고 하니 장사를 시켜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하루속히 고향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교장선생님께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며 신원보증서를 자필로 써주셨고, 떠날 때는 귀한 깨소금 한 병을 반찬으로 하라고 주셨다.
 나는 6월 21일에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마침 노트 반쪽자리를 여러 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일기를 쓸 수 있었고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를 보존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귀국선' 노래를 부르면서 마산 항구에 닿았다. 다시 화물차를 타고 안동을 지났고 경북 의성에 도착했다.
 화물차가 움직이지 않고 義城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리들을 지게부대 요원으로 차출해서 다시 일선으로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확 퍼졌다. 기겁을 한 우리는 보따리를 챙겨 차에서 뛰어 내렸고, 인천방향인 서북쪽으로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날을 보낸 후 마침내 물집으로 부르튼 다리를 끌고 고향 개건너 가좌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제주도에 갈 기회가 생기면 가능하면 빠짐없이 가곤 한다. 당시 희생된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간 장정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제주도를 찾을 때마다 그렇게 내 가슴이 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