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호 2008년 5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2. 낙산사 無門스님 배주현 동문
낙산사 無門스님 배주현 동문
대학시절부터 십팔기에 빠져
"전생은 장군이었을 것 같아"
농경제학과 88학번 배주현 동문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無門. 스님이 되면서 받은 법명이다. 그는 무예(십팔기)가 좋아 절을 찾았고, 그러다 스님이 됐다. 그 때가 1996년 10월. 남한 최북단 고성의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에서였다. 이 사찰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훈련을 시킨 것을 비롯해 항일 독립자금을 만주로 보내는 요충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배 동문은 이후 2005년 3월 현재의 낙산사로 옮겨올 때까지 인제 백담사, 경기도 일산 정혜사와 설악산 봉정암에서 수도했다. 봉정암 시절 지금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을 상좌로 모셨다. 머리도 안 깎은 채 1996년 행자로 등록한 이후 이듬해 계를 받았으니 법랍 13년차 스님인 셈이다.
ROTC 30기로 입대해 강원도 인제 12사단에서 근무한 배 동문은 대학시절부터 무예에 빠져들었다. 서울 신촌에서 수련원을 냈던 해범 김광석 선생을 대학 1학년이던 88년 찾아가 문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는 요즘도 틈만 나면 `무예도보통지' 등 무예서적을 탐독하며 낙산사 경내에서 단련을 하고 있다."저는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출가한 케이스죠. 그저 무예가 좋아서, 절에 오면 원하는 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왔는데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생에 장군이었을 것 같아요."
그는 군 제대 후 제일제당(CJ) 제약사업부에서 2년 남짓 `정말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영업을 하다보니 술자리가 많아요. 저는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하는데 안 할 수도 없고,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절에 와 그런 자리에 안 가도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남 생각은 안 해주고 강제로 술 권하고 마셔야 하는 풍토는 사라졌으면 합니다."
배 동문의 농경제학과 동기생은 40명. 스님 된 이후에도 드물게 동창회 모임에 나갔지만 요즘은 거의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산중에 들어와 있으니 세속친구들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아 좋죠."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스님 일과 무예, 절간 생활이 참 맘에 들어보인다. 날렵한 몸매의 스님은 입가에 늘 웃음을 달고 산다. 마흔 줄에 들어선 세속나이는 30대가 채 안돼 보이는 동안이다. 無門, 법호에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하다. "백담사 오현 회주 스님이 지어주셨어요. 법명은 보통 그 사람의 성격과 거꾸로 하는데 제가 속이 좁은 걸 아시고 그렇게 지어주신 것 같아요."
배 동문은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돌이 지나 부산으로 이사해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모교 졸업 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선병치료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스님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3월 23일, 작년 여름과 초겨울에 이어 세 번째 낙산사를 찾아 만났을 때 불교에서 몸이 불구인 사람들은 스님 되는 길이 막힌 이유를 물었다. 필자가 10여 년간 궁금해 하던 주제였다. 기독교 목사는 물론 천주교에서도 장애인 신부가 탄생한 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교는 수행과 신앙을 두 축으로 해요. 몸이 불편하면 신도들한테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을 일으켜 수행하는데 덕이 안된다고 보는 것이죠. 문신을 새긴 사람들은 남한테 혐오감을 일으키니 스님이 될 수 없죠. 가령 남성의 발기부전도 몸의 순환이 안되는 것이기에 불허됩니다. 하지만 몸에 장애가 있는 분들은 수행은 어려워도 스님 이상으로 신앙심을 키울 수는 있죠. 수행이 냉정하다면, 신앙은 간절한 마음에서 자라기 때문이죠. 그래서 불교에선 수행과 신앙 모두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동창회보에 배 동문 사연을 쓰겠다고 하자 처음엔 한사코 손사래 치던 그가 승낙한 것은 4월 초께다. 원고 작성을 위해 24일 다시 전화를 걸었다. 동문들한테 전하고 싶은 말을 주문했다. 아주 간단한데 금세 필이 꽂혀왔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자신도 발전하고 사회도 미래가 밝은 것이겠죠." 〈李相起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