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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2008년 2월] 뉴스 본회소식

李 泰 鎭교수의 이야기 서울대(2)



 1875년 일본과의 국교수립 후 高宗은 일본의 서양문물 수용실태 조사를 위해 朝士視察團을 파견했다.(1881년) 이때 도쿄대학, 도쿄 사범대학, 도쿄 여자사범대학 등에 대한 조사가 이미 이뤄졌다. 학제, 학생과 교원의 수, 교과과정, 도서관 및 구비도서 현황 등이 조사 보고됐다. 모든 것이 청년 군주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은 1882년 4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그 해 말 同文學을 설립해 영어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1883년 보빙사 洪英植의 건의에 따라 미국제도를 본받기로 하고 곧 미국정부에 군사교관과 영어교수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1886년 9월 헐버트, 길모어, 벙커 등이 도착하자마자 育英公院을 전동에 설립했다. 영재를 키우는 공립학교란 뜻의 이 학교를 미국인들은 왕립대학교(Royal University)라고 불렀다. 군주와 정부는 이 학교를 대학으로 발전시킬 생각이었다.



 1882년 1월에 고종은 일본 나가사키에 체류하던 魚允中에게 중국 톈진으로 가서 李東仁을 만나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미조약의 체결로 바뀌게 될 조선과 청국의 관계에 대한 예비 접촉을 지시했다. 즉 청국과 미국은 이미 수호조약을 체결한 관계인데, 이제 미국과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면 3국은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되므로, 청과 조선은 왕래 사신제도 대신 常駐 사신제도로 바꿀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사를 표시하게 했다. 상주 사신 곧 공사제도의 도입은 5백년간의 조공책봉체제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청국의 대관들은 이 제안에 접해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크게 놀랐다.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지켜보던 청국은 2개월 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의 천자는 조선 군주에 대한 책봉주로서 이 반란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군대를 파견했다. 청국은 대원군 압송 후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속방' 조선에 군림하는 총독 행세를 하게 했다. 그는 중국 상인의 조선 내 상행위를 전면 방치하는 한편 외국무역 관련 세수를 상해 해관으로 들어가게 했다. 조선정부의 재정은 갈수록 어려워져 개화사업은 운영난에 빠졌다. 육영공원도 미국인 교수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황이 돼 1893년까지 이름만 겨우 유지했다.
 한편 일본은 1885년 내각제를 출범시키면서 정치적 안정 속에 군비확장에 진력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 때, 일본은 청국과의 동시 출병 조건 아래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농민군 봉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내정개혁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서울로 직행한 이유였다. 저들이 준비한 개혁안에는 학교제도에 관한 것도 들어 있었다. 일본식으로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차례로 설립하고, 학생 중 우수한 자는 일본 유학의 기회도 준다고 했다. 당시의 신식 교육제도는 관료 양성을 목표한 것으로, 일본의 관심도 친일 관료 양산에 있었다.
 고종은 일본군의 서울 진주와 개혁 강요를 불법 내정간섭이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한 달 여 승강이 끝에 7월 23일 일본군은 야반에 경복궁을 침입해 고종을 인질로 삼고 대원군을 앞세워 軍國機務處를 급조해 `개혁'을 강행했다. 일본은 이틀 뒤 청일전쟁을 일으켜 이 무법천지의 상황을 포성 속에 묻었다. 이것이 이른바 갑오경장의 시작이었다. 왕은 왕비와 함께 이 위기를 미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이듬해 5월까지 점진적으로 극복했다.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러시아 공사도 삼국간섭의 여력으로 조선정부에 대한 일본의 강압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선주재 공사로 현장을 지휘하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쓴잔을 들고 귀국했다.
 일본의 강압에 대처할 때, 서울의 미국 선교사들과 왕비 사이에 미국식 대학 설립이 비밀리에 협의됐다. 제중원 의사로 군주 곁을 지키던 에비슨, 언더우드와 그의 부인 릴리어스, 스크랜튼 등이 협의 대상이었다. 이들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국왕이 설립 자금 3만 달러를 준비하되, 일본측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미 선교부 사업처럼 위장했다가 최종 단계에 왕립(국립)대학임을 밝히기로 했다. 왕과 왕비의 노력은 육영공원의 실패를 만회하는 뜻도 있지만 미국, 러시아의 지원 아래 `문명국'의 조건을 속히 갖추려는 의지를 실었다.
 이 계획은 부지를 백악(북악산) 아래 어디로 정하고, 건물 신축과 교수진 확보 준비까지 협의하던 차에 일본이 기밀을 알아차리고 방해해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저들의 지원으로 귀국한 朴泳孝가 몰래 이 계획에 관계한 것을 알고 그를 왕비시해 음모자로 고발해 왕실을 혼란에 빠트려 일본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저들의 손으로 왕비를 시해했다. 왕립대학 설립 계획은 공중분해 될 수밖에 없었다.

 〈李泰鎭(사학61-­65)모교 국사학과 교수․인문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