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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2008년 2월] 문화 꽁트

'BMW 삼총사' 崔 一 玉(미학65­-69)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너나없이 지내던 삼총사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날의 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김영길 전무였다. 
 "나, 드디어 며느리 보게 됐다."
 불판에서 고기가 몸을 뒤틀며 익어가고 술잔이 한 순배 돌 즈음 김 전무가 입을 열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래 날은 잡았어? 언제야?"
 이흥기 박사와 서형민 교수는 입을 모아 반가움을 나타냈다.
 "지난 일요일에 양가 상견례 했지. 색시 집에서 날을 잡아 알려주기로 했어. 내가 현직에 있을 때 가라고 그렇게 다그쳐도 들은 척도 않더니만, 애비 끈 떨어지고 나자 장가를 간다니, 이것도 다 제 팔자지…."
 "그래 사돈 될 사람은 맘에 들고?"
 서 교수가 김 전무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맘에 들고 말고가 뭐 있나. 두 집 다 개혼이라 성사된 것만도 다행이지."
 "일단 축하 건배부터 하자."
 이 박사가 상 앞으로 다가앉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축하한다는 덕담이 오가고 셋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지금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라니까 둘이 사귄 지는 꽤 됐어. 놈이 결정을 못하고 질질 끌기만 하니 그 집에서 난리가 났지. 할건지 말건지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장인 자리가 놈을 불러다 호통을 쳤나 봐."
 "그럼, 사귀는 애가 있으면서도 네 속을 태웠단 말이냐? 도대체 뭣 땜에 애인을 숨겨 놓고 시간을 끌었대? 너도 너지만, 계수 씨가 좋아하겠다. 암튼 잘 된 일이다. 우리한테 남은 일이 이제 아이들 치우는 것밖에 더 있냐?"
 이 교수가 마치 제 일이기라도 한 양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김 전무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지수도 잘 있지? 공부 할 만하데? 이나저나 내가 걱정이다. 우리 영아는 언제나 갈는지. 요즘 여자들 결혼 안 가는 게 무슨 유행인지…, 아예 싱글로 살 작정인 것 같기도 하고…."
 서 교수가 말꼬리를 흐리며 앉은자리가 불편한지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보다 결국은 몸을 일으켜 제자리걸음을 한 서너 번 하고는 방석 세 장을 겹쳐 놓고 걸터앉듯 올라앉았다.
 "의자에 앉는 곳으로 갈 걸…. 내 정신 하곤…. 자네, 많이 불편하면 자리를 옮길까?"
 20년 전 교통사고로 대퇴부 고관절 교접수술을 받은 후 왼쪽 다리는 그나마 온전하게 건졌으나 끝내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 서 교수는 찌푸린 미간을 펴며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그냥저냥 지낼 만 한데 날씨가 꾸물거리거나 추운 날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탈 날 나인데 이만한 것도 다행이지 뭐. 자, 자. 내 얘기 그만하고, 지홍이 결혼 이야기나 마저 듣자. 그래 색싯감은 뭐 하는 아이야?"
 말은 태연하게 견딜 만 하다고 했으나 그의 앉음새는 도무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 
 "같은 회사 홍보실에 있어. 제 딴에는 집을 장만한 후 결혼을 하려고 생각했었나 봐. 말이 쉽지 집 장만이 어디 한두 푼으로 되는 일인가. 이제 돈이 얼추 됐다 싶으면 저만치 도망가고, 한 해 더 모아보자 하면 또 그림의 떡이 되고. 그러니 늦어질 수밖에. 결국 장인 자리의 으름장에 백기를 든 거지. 아들 가진 사람이 자식 명의로 집 한 채 못해 주고 대기업 이사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도 나 하나뿐일 꺼야. 다, 내가 무능해서 그렇지 뭐."
 김 전무는 자조 섞인 웃음을 술로 씻으려는 듯 받아 놓은 술잔 두 개를 연거푸 마셔버렸다. 이 박사도 서 교수도 할 말을 잊은 냥 서로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긴 한숨을 흘렸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서 교수가 빈 잔을 힘없이 식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거 왜, 자네 탓이라 생각하나. 지홍이 미국 유학까지 시켜줬으면, 그게 집 값이나 버금가는 일이지. 어디 그뿐인가. 지수 학비 또한 만만찮을 테고 말이야. 그래도 자네들은 나보다 낫지. 몸이 이 지경 되고 학교를 떠난 지 벌써 20년일세. 그나마 시간 강사 자리와 번역거리가 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지만. 이런저런 내 형편 때문에 영아가 결혼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시집 안 갈 거냐는 말도 한 번 제대로 못한다네."
 "난 자네가 학교에 매여 있었던 것보다 번역가로 이름을 날린 게 더 잘 됐다고 생각하네. 전화위복이지. 자네 일에 정년이 있나, 윗사람 눈치 볼 일이 있었나. 실력 하나로 제 자리를 당당하게 지켜온 것 아닌가. 영어 번역이다 하면 자네가 최고라는 건 출판사도 언론도 다 인정하는 일이고. 자네 손을 거쳐 나오는 책이 일 년에 몇 권인가. 자네는 건강만 허락한다면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일찌감치 잡은 셈 아닌가."
 이 박사 또한 쌓이고 쌓인 것이 많은지 서 교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인지 부러움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이제 퇴임을 앞둔 나이가 되니 자네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더군. 앞으로 할 일을 미리 알차게 잡아 놓고 그 분야에서 선두주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네들이 한 직급씩 올라가며 승승장구할 때 책상머리에 앉아 사전 들춰가며 글을 써내야 했던 내 마음이 어땠겠는가. 일거리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던 내 맘을 자네들이 어찌 알겠나.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 영어실력이 모국어나 다름없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이제 시한부 인생이야."
 서 교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푸념을 이어갔다.
 "난 자네들이 이제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정말 옛날 친구사이로 돌아가는구나 싶더라고. 마치 하루살이 같은 내 생활을 자네들이 이해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구차한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네. 
 내 술기운 빌어 한 마디만 더 하지. 소주 한 잔 하러 나오면서도 기사 대동하던 자네, 김 전무. 번쩍거리는 자가용 몰고 나오던 이 박사. 자네들이 찔뚝거리는 다리 질질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지하철 신세를 져야했던 내 마음을 알기나 하나? 이 병신아, 넌 왜 자동차 하나도 없냐? 하는 시위 같았다고 하면 자네들은 내 자격지심이라 하겠지. 자네들도 이제 지공 선생이지? 그렇지?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지공 선생 말일세. 난 지하철이 좋아. 그게 없었으면 이 너른 서울 바닥에서 어찌 살았겠나. 어떤 기사가 그렇게 제 시간에 딱 맞춰 날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오겠나?"
 "그런 말 마. 부장에서 이사되고, 이사에서 상무 전무로 올라가느냐 탈락하느냐 하는 경쟁은 공중에 매달린 외줄타기나 다름없네. 결국 전무란 자리로 마감한 나를 보게. 입사 동기 중에서 사장까지 올라간 놈은 아직도 현역이야. 말이 허울 좋은 專務지. 그거 돈 `전'자 없을 `무'자 錢無야. 전무. 전무 2년에 보따리 싸들고 집에 돌아오니 남은 거라곤, 쉬우니 선물이랍시고 건넨 양주병하고 약 봉지만 찬장 가득하더군.
 건설회사 전무자리, 그거 좋은 자리지. 한 탕 해 먹자 맘먹었으면 지홍이 집뿐이었겠나? 그러나 내가 회장에게 줄이 있나 뭐가 있나. 그 바닥 평판 하나로 버틴다 생각하고 맑게 또 맑게 살아서 그나마 전무까지 간 거지. 오죽 하면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까지 했겠나.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 해 먹으면 안 되냐고. 난 거울처럼 맑게 살았네. 자동차? 그거 회사 나오고 나니, 내 것이 아니더구먼. 마누라 타던 차 한 대 있지만, 그것도 폐차 직전이야. 사람은 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지. 나도 오늘은 지하철 타고 왔네."
 "오늘 왜들 이러나. 이게 바로 늙은 징조구먼. 내 자리 다음 세대에게 내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거, 그게 바로 늙음이야. 나라고 아니꼬운 거 없고 서러움 없었겠나? 말이 박사지, 철학 박사 그거 뭣에 쓰나. 철학이 학문의 으뜸이라는 긍지 하나로 살아왔지만, 돈이 제일인 이 세상에서 내가 설 자리는 교단 밖에 없었네. 교수평가제에서 손가락질 안 받으려면 피눈물나게 읽고 쓰고 해야 살아남지. 
 난 요즘 내 마지막 강의를 멋지게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지내네. 얼마 전에 강단에서 숨진 그 교수가 가장 부러워. 무대 위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배우가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그나마 아내가 약국을 하고 있어서 자네들처럼 막막하지는 않으나 지는 해의 서러움은 다 마찬가지 아닌가. 나도 오늘은 지하철 타고 왔네. 우리 좀 더 자주 만나세. 이제 남은 건 시간과 친구밖에 없잖은가."
 이 박사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듯 했다.
 "이제야 우리 모두 BMW를 타게 됐구먼. 우리의 BMW를 위해 건배하세."
 서 교수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BMW라니?"
 얼굴이 노을빛으로 붉게 익은 두 친구가 이 무슨 생경스러운 말인가 싶은지 술기운에 흐려진 눈을 끔벅이며 바라봤다.
 "버스의 B, 지하철 메트로의 M, 걷기 즉 워킹의 W. 이게 바로 BMW일세. 자네들 BMW 타 봤나? 난 평생 BMW만 타고 다녔지."
 "BMW를 위하여……."
 술잔을 부딪치며 목소리를 돋우는 그들 삼총사의 붉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눈가에 어리는 그늘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BMW 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