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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2008년 1월] 문화 꽁트

그리운 저고리 - 扈 源 淑




 염천이었다.
 "얘 저것 좀 봐 주고 나가렴."
 앞마당으로 내려서려는데 상사화가 올라와 흐드러져 있다. 유난히 무덥거나 불시에 장대비가 퍼부어 대거나 하는 날들이었는데, 어느 틈에 꽃대가 올라와 연분홍 꽃을 피웠다. 한여름으로는 안 어울리는 빛깔이다. 화려하면서도 어딘지 청승맞은 분홍색. 키 큰 백일홍과 봉숭아 사이로 올라왔지만 단연 돋보이고 부드러운 향기가 스치듯 느껴진다.
 연숙은 허둥지둥 나가는 민주를 잠시 불러 세워 꽃을 보게 한다.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굳이 어디 가느냐고 캐묻지 않는 게 모녀의 습관이다.
 올 여름엔 소색인조견 블라우스 차림이다. 헐렁한 검은 면바지.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려다가도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는 인조견의 감촉 때문에 자꾸만 입게 된다. 박물관에서의 호출이다.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사진 촬영 건으로 모여 달라는 게시물이 올라왔을 뿐 전화로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것도 예의라면 예의다. 복중 휴가철에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불러내는 것이니 자발성에 의존할 수밖에. 민주는 차의 시동을 걸고 오전부터 벌써 뜨거워진 차 안에 에어컨 바람을 넣는다. 덜 마른 머리를 말리는 데는 자동차 에어컨 만한 게 없다. 나쁜 버릇인 줄 알면서 머리가 마르기 전에 밖으로 나오게 된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시간과 정성이 항상 부족하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머리카락까지 신경이 써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면서…' 스스로에게 쯧쯧거리지만 무엇이든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들 휴가를 떠난 듯이 서울거리는 허룩하다. 강변북로에서 용비교로 접어든다. 표지판을 볼 때마다 지명을 입으로 외우는 버릇. 용비교 두무개다리 한남동 남산 소월길을 내려와 남대문과 시내를 관통해 신문로에 있는 박물관까지 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박물관 전시실은 벌써 촬영 준비의 판을 벌이고 있다. 새로 온 사진작가는 아예 큰 책상 위로 올라가고 하얀 판대기를 깐 바닥에 저고리를 놓고 위에서 아래로 보고 찍고 있다. 사진작가로는 무척 까다로운 심선생 스튜디오에서 아끼는 제자라고 추천해 줬으니 믿어 봐야지. 심선생한테 줄 돈의 반도 안 되는 수고비로 약속을 해 놓았다.
 30대 초반이나 될까 꼬랑머리를 한 거 말고는 별 특징이 없다. 반듯하게 머리를 넘겨 묶은 것이 단정하기까지 하다. 민주는 순간 남자가 거울을 보며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웃음을 짓는다. 옷차림이 튀지도 않고 태도는 조용하다. 하기야 사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말수가 적다는 것. 19세기 말기부터 1970년까지의 6백점에 가까운 저고리는 이 박물관의 가장 수효가 많은 유물이었고 자료정리 명목으로 따낸 기금으로 연말 안에 해내야 된다는 것, 그러려면 이 염천에 촬영을 하지 않으면 전시와 도록 발간 날짜를 맞출 수 없으니 위원들을 소집할 수밖에. 어차피 자발적인 일이니 한 사람 없다고 해서 큰 일 날 일은 물론 아니다.
 2층에 있는 수장고에서 한 상자씩 꺼내 전시실로 내려왔다. 저고리도 20점 이상 쌓이니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다. 며칠씩 실측작업을 한 것은 다 민선생의 몫이었다. 품 길이 화장 수구 진동 깃과 동정의 너비, 고름의 길이와 너비를 실측하는 것에 여러 달 전부터 거의 매일 매달렸었다. 수장고 안은 항온 항습기가 가동돼 늘 서늘하고 건조하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멀리로부터 온 냄새가 있다. 먼 시간과 오래된 물건의 내력이 내뿜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긴다. 어디선가 맡은 듯한 냄새. 그러나 알 수 없다.
 그 옷들의 주인들은 다 어디 있을까? 구한말에 세도를 부렸던 가문의 후예들이 내놓은 옷 중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진솔옷도 많다. 박물관 전시가 끝날 때마다 그 신뢰감으로 아끼던 유물들을 기증해온 것이 모인 것이다. 친일파나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비난받는 사람들의 장롱에서 나온 것들도 많다. 비취와 옥과 호박이 한 바가지씩 나왔다는 그 부귀영화는 어디로 갔을까. 불과 1백년도 안 된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옷을 제대로 남길 수 없다. 해어질 때까지 입고 소진해 버렸으니. 콩밭을 매던 여자의 땀에 젖은 베적삼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리 없다.
 이제 박물관 유물의 주인은 침방에서 조용히 옷을 지으며 자신의 솜씨와 예술성을 풀어내었던 여인들이다. 그 옷을 입고 뽐내고 권위를 부렸던 사람이 아니라 마름질은 하고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던 침방의 여자들의 작품이다. 수장고 안에 들어오면 옷을 짓던 여자들의 한숨과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저고리 하나를 올릴 때마다 작은 탄성이 터진다. 저고리 속에 넣은 중성지를 꺼내고 깨끗한 거즈로 때와 먼지를 닦아내고 다림질을 해 고름을 매어 사진을 찍도록 가져가는 작업이 조심스럽게 이뤄진다.
 솜을 둔 저고리인데도 지은 솜씨가 뛰어나 맵시가 있고 포근하다. 분홍빛이 살아 있다. 수자와 표주박 문양은 의미를 담고 있어 숙연하다. 어쩜 이렇게 얌전하게 솜을 뒀을까. 누군가의 감탄이 흘러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미끈하게 달려가는 사슴무늬는 자유스러운 기백을 보여준다.
 1910년대의 갓저고리는 박쥐무늬가, 구름무늬가 그려졌다. 얼마나 따뜻하고 대단해 보였을까. 요즘 흔한 밍크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될 권위가 느껴진다.
 은조사 적삼에서 가늘게 떨리는 관능이 느껴진다. 적삼은 젖가슴이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저고리이다. 민주는 가슴이 뻐근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소색의 저고리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소재도 다르고 모양도 문양도 같은 것이 없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것이 아니기에.
 "이건 궁바느질이에요." 전문가의 눈으로만 알 수 있는 고수의 손바느질 저고리는 그 품격이 다르다.
 사진기사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밑에서 한 점씩 올라오는 저고리를 찍는다. 번호를 붙이고 고름을 매고 뜨지 않도록 살짝 핀을 꼽고 하는 작업이 말없이 이뤄진다.
 민주는 사진기사와는 별도로 사진을 찍어 놓는다. 문양과 저고리의 맵시 부위별로 따로 디카에 담는다. 보도자료를 만들려면 자신이 만든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지만 30점도 찍지 못했다.
 마침 장선생이 뛰어들어오듯 들어온다. 비를 흠뻑 맞고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밖에 비가 오는 줄 몰랐는데….
 점심을 싸들고 온다. 스스로 마당발이라고 하는 기획을 맡은 장선생이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아무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전시실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전시실 밖 통로에 간이 식탁을 차리고 서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장선생의 음식 준비는 엽엽해서 늘 감탄을 하곤 한다.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동글동글하게 빚은 찰밥과 입에 쏙 들어가게 썬 오이지다. 서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면서도 든든하다. 무엇보다 그 간단함이 열중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정도라 좋다.
 얼마 전 구십이 가까운 시어머니를 노인병원에 보낸 장선생은 마침 올라온 포도무늬 모본단 저고리를 보며 노래하듯이 말한다.
 "우리 노친네 모본단 저고리에 금 단추 다시고 지내셨던 그 당당함 어디 가셨을까. 그 서슬퍼런 품위 어디 가셨을까. 외며느리는 용케도 알아보시고 욕을 해대시는데 네 년이 다 훔쳐갔다고 도둑년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소리 하시네. 여기 나와서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자네. 그 욕 소리 들려서."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기지만 아직 1백점 가까이 밖에 찍지 못했다.
 밖은 한 차례 비가 지나갔건만 거리에는 무더움이 그대로 배어 있다. 열중한 뒤의 뿌듯함과 허무함이 같이 몰려온다.
 민주는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저녁 드셨어요?"
 "오이지 무쳐 먹었다. 그게 제일 낫구나. 속이 다 가라앉는구나."
 연숙은 민주에게 낮에 꾼 꿈 이야기를 한다.
 "얘 요즘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서랍에 잔뜩 저고리가 있지 않겠니?"
 "웬 저고리요?"
 민주는 놀라서 묻는다. 연숙은 딸이 하루 종일 박물관에서 저고리와 묻혀 지낸 걸 알기나 하듯 대낮에 꾼 꿈 이야기를 한다.
 "해방 전 개성서 보던 갓저고리부터 너 낳았을 때 입었던 포플린 저고리에다가 조세트 저고리 모본단에다가 참 이상도 하지 그게 지금 어디 있겠니? 그런데 그 저고리들이 서랍 가득 있는 거야 저고리 사이사이 넣어 뒀던 통장을 찾다 찾다 잠이 깨었다. 너도 알잖니? 옛날엔 저고리 사이사이 돈도 넣어 놓고 집문서도 넣어 놓고….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구나."
 연숙은 외아들이 죽은 후 장롱 서랍 속에 있었던 한복은 모두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허룩하게 서랍은 비운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