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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2008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具 平 會 (주)E1 명예회장․본회 고문



 - 본회 장학빌딩 건립기금으로 10억원을 쾌척하신 데 이어 지난 10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되시는 등 올 한 해 모교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우선 부족한 제게 뜻 깊은 상을 주신 동문들께 감사드립니다. 해방 후 혼란기에 모교에 입학해 전쟁 중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에서 졸업장을 받은 연유로 그동안 제대로 된 모교 졸업장이 없었는데, 이번에 동문들께서 주신 상을 명예졸업장 삼아 고이 간직하고자 합니다."

 - 근황을 소개해 주신다면. 
 "경영일선에선 95년에 물러났으니 이제 후대들에게 경영을 일임하고 나서지 않는 편입니다. 평생을 기업을 일구고 나름대로 사회활동을 하며 80을 넘기고 나니 이제 좀 여유를 찾아야겠다 싶습니다. 아니, 차라리 하나 하나씩 정리하고 비워내고 있다고 해야겠죠. 그러나 평생 분주히 살아온 버릇 때문에 별일이 없는 한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한미협회 등 몇몇 단체의 일을 챙기고 있습니다."

 - 마포 옛 동창회관을 건립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총동창회와의 인연은 꽤 오래 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이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관악시대가 열렸는데, 단과대별로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재학생과 동문이 하나로 뭉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총동창회 설립 후 열심히 참여하던 중 모교지원을 위한 재단법인 관악회를 만들게 되면서 제가 창립멤버로 현재까지 관여하며 조금씩 지원해 왔습니다. 
 마포에 총동창회관을 지을 때도 당시 金埈成부총리께 간곡히 요청해 그 터를 마련하는데 기여했습니다. 林光洙회장이 취임한 후 장학빌딩 건립내용을 살펴보니 이를 추진하는 데 고생도 많이 했고, 앞으로 완성시키는 데도 고생을 참 많이 하겠구나 싶어 당연히 힘을 보태야겠다는 마음에 10억원을 한꺼번에 출연하게 됐죠."

 - 경영자로서는 은퇴하셨지만, 지난 11월 제6회 한미 친선의 밤을 개최하셨는데.
 "2001년 한미협회장 취임 후 `한미우호상'을 제정해 올해 도널드 P. 그레그 前주한 미국대사에게 수여했습니다. 매년 양국 각 분야의 주요인사들이 교류하는 민간외교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미친선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제가 조금 희생을 해서라도 재정적 기반을 다져 이러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해오고 있죠."

 -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한미관계에 변화가 예상되는데, 한미협회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저는 민간관계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안보․통상․국제외교분야 등에 있어서 다양한 교류와 서로간에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많이 만들어주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갈 생각입니다. 국내외 학자들이 한미안보에 대한 로드맵을 연구하는 것을 지원한다든지, 드러내놓기 보단 스폰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합니다."

 - `재계의 외교관'으로 알려져 계십니다. 그동안 보람된 일도 많았고 아쉬웠던 부분도 있으실텐데, 가장 보람됐던 순간은 언제일까요.
 "저에게 그런 과분한 호칭을 붙여주시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기업을 하다 보니 정계와 재계, 나아가 한국과 세계 속에서 제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아보려는 의도에 기꺼이 그런 역할을 한 부분도 있습니다. 외교력이 부족했던 한국적 기업환경 역시 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자본과 자원이 열악했던 한국의 경우, 누구라도 만나고 누구라도 설득해 한국 재계의 입장을 관철할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람됐던 것은 일본으로 거의 유치가 확정적이었던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고 성공적인 개최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힘과 역동성을 세계에 보여줬던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이끈 과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를 회상하신다면. 
 "사실 전 축구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제 고향 진주사투리로 `축구'는 `멍청하다'란 뜻이거든요. 축구에 `축'자도 모르는 제가 월드컵 유치운동을 했으니 돌이켜 보면 참 `축구'했죠.(웃음) 李洪九총리 후임으로 월드컵 유치위원장에 추대된 것이 1994년이었는데, 들어가보니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몇 년 전부터 표밭을 착실히 닦아온 터라 멀찌감치 앞서 있었고, 유치활동을 위한 재정기반도 전무하다시피 했죠.
 월드컵이란 행사는 외양상 스포츠 행사이지만 그에 앞서 국가간 외교력이 총동원되는 가장 정치적인 유치과정을 거치는 까닭에 체육계의 유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鄭夢準부위원장이 직접 투표권을 가진 체육계 인사들을 설득했다면, 저는 배후에서 정․재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유치활동을 펴는 역할을 했죠. 
 이 과정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94년 한일 양국 유력인사들이 참여했던 한일포럼에서 제가 한 발언입니다. 행사가 끝나갈 때쯤 작심하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한일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를 위해 월드컵을 한국에 양보하라'고 말이죠. 돌출발언에 황당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분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많은 계산 끝에 공동개최에 대한 일본 재계의 협조를 염두에 두고 던진 말이었지만 내심 걱정도 되더군요. 다행히 그날 저녁 저를 찾아온 일본 경단련 회장이던 도요타 쇼이치로 회장과 공동개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고 일본 재계가 공동유치에 적극 협조하기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가정입니다만 아마도 다시 청년시절로 돌아가 꿈을 펼쳐보라면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모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이 국제정치학, 그 중에서도 국제기구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1951년 6․25의 와중에 대학을 졸업한 저에겐 국제정치는 꿈과 같았죠. 그 후 잠시 현실정치에 참여했다가 내 길이 아니다라고 판단한 후, 평생을 기업인으로 나를 규정하고 살아왔지만 요즘 국제무대에서 맘껏 능력을 발휘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많이 부럽죠."

 - 1954년 민간 기업의 첫 뉴욕주재원으로 활동하시면서 해외활동도 활발하게 하셨는데, 당시 일화를 소개해주신다면.
 "1954년 당시에는 해외에 나간다는 일 자체가 힘든 때였습니다. 국민소득은 80불 수준이었고 해외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요. 비자도 나오지 않아 때마침 멕시코 시티에서 주니어챔버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국 대표로 참가한 뒤 뉴욕에 들르는 방법을 택해 2년 넘게 머물게 됐습니다. 
 정부기관도 변변히 해외에 사무소를 내지 못했던 시절 맨하탄에 국내 민간기업의 첫 해외주재원으로 도착했을 때의 막막함이 기억에 뚜렷합니다. 타자기 하나 있는 작은 사무실을 꾸리고 미국 콜게이트사 주변을 맴돌며 저의 모든 영업수완을 동원해 기업가와 기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치약 제조기술에서부터 다양한 핵심기술을 수집했고, 형님이신 具仁會 LG창업주께 세계 경제의 동향과 신사업 관련 정보들을 보고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小國인 한국이 살길은 세계와 교류하는 것이며, 항상 글로벌한 관점에서 Business를 고민해야 한다는 제 나름대로의 국제감각을 익힌 게 아닐까 싶습니다."

 - 그 시절 영어를 잘 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외국어 실력은 어떻게 쌓으셨는지.
 "어릴 적부터 영어를 좋아한 것도 있고, 중학교 시절 여담입니다만 제가 전교에서 영어성적이 제일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 영어선생이 우리 집에 와서 술 한 잔 얻어먹고 Japan Times를 종종 읽어줬습니다. 해방 후엔 지금의 남대문 도서관 자리에 영어어학원이 생겨 2년 정도 배웠습니다. 그때 한국열차는 유리창이 다 깨져 있었고, 좌석은 스프링만 남아 석탄가루를 마시면서 선 채로 서울과 부산을 오갔었는데, 미군들에게 영어 몇 마디만 하면 현대식 미군열차를 공짜로 얻어 타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죠."



 - 한국무역협회장 시절엔 삼성동 코엑스 건립과 아셈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朴龍學씨가 취임해 회장을 맡던 중 여러 가지 이유로 사퇴압력을 받게 돼 제가 후임자로 거론됐는데, 좋은 선례를 만들기 위해 임기를 다 마치면 다음 회장을 맡겠다고 버텨 95년 총회에서 정식으로 취임했습니다. 회장을 연임하며 저 역시 월급도 안 받으면서 정말 봉사하는 마음으로 여러 사업에 올인했는데, 언론에 잘못 비쳐져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 건강까지 악화돼 99년 3월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코엑스 아셈센터 건립사업이었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로는 1조4천억원이나 드는 시설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라는 논란이 많았어요. 그러나 내심 코엑스 아셈센터는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컨벤션 산업이라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무사히 마무리됐고 정상회의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죠. 또 요즘 지방마다 코엑스를 본 딴 컨벤션 시설이 생기는 걸 보면 당시 제 예상이 틀리지는 않은 듯 합니다."

 - 역시 설립을 주도하셨던 호남정유(현 GS칼텍스)가 GS소속이 됐는데, 아쉬움은 없는지.
 "제가 사람인 이상 아쉽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일 테지만 미련은 없습니다. 1960년대 허허벌판이었던 여수에 민간기업이 대규모 외자를 도입해 그것도 석유화학기업을 일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죠. 어쨌든 호남정유는 현재 가장 모범적이며 성공적인 한미합작기업으로 평가받고 있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에너지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개인적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모름지기 가지려면 어려워지고, 버리면 더 큰 게 생기는 것 아닐까요."

 - 함께 나누는 문화가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구씨와 허씨간 아름다운 동업을 부러워합니다. 비결이 있다면.
 "사돈과의 동업은 서로간의 믿음이 확고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허씨 집안과는 고향인 경남 지수에서 선조 대대로 존경하고 사귄 집안이고, 두 가문간 친분을 유지하는 바닥에는 信賴와 中庸의 정신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두 집안의 가풍이 오랜 유교적 전통 위에 절제의 정신이 몸에 배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고 또 여기에서 LG의 인화정신도 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무릇 조그만 한 것은 접어 두고 기본으로 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자제들에게 경영을 맡기셨는데, 만족하시는지.
 "열심히 뛰어 제가 처음 맡은 구간을 남보다 뒤쳐지지 않고, 다음 주자에게 무사히 바통을 넘겼으니 이제 뛰는 것은 후세들의 몫이죠. 또한 2세들은 컴퓨터와 인터넷 세대인데 낡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패러다임을 가지고 그들에게 충고한다는 건 넌센스입니다. 세대마다 그 세대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제가 나서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무대의 주연에서 조용히 객석으로 옮겨 박수 칠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2세들이지만 오랜 시간 일반 사원들과 근무하며 기업문화를 익혔고, 철저한 검증과 연차에 이르러서야 경영자의 역할을 맡겼기 때문에 별다른 부침 없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 전시 중 대학을 졸업해 학창시절 기억이 많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자주 연락하시는 동창이 있다면. 
 "해방 후 경성대학에 입학해 학창시절 학우들의 치열한 사상논쟁과 국립대 설치령에 대한 학내소요가 계속됐고, 이후 6․25가 발발했으니 평온하고 학구적인 대학시절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친구들은 해방 후 조국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있어서 모두 정치․외교․언론계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심지어 월북했던 친구들도 그 곳에서 성공했으니 모교 동문들의 역량은 대단한 듯 합니다. 
 문리대 친구들과는 웃고 떠드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騷騷會'란 이름으로 자주 모임을 가져왔습니다. 모두 친하지만 방송작가로 유명했던 韓雲史나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鄭一永 등과는 허물없이 지내죠."

 - 정치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정치에 대한 꿈은 없으셨는지. 또 사업을 하시면서 전공이 도움이 됐던 적은 언제인지요.
 "전시에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피난정부에 근무하며 내무부 소속으로 잠시 정계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해외 언론을 담당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발췌개헌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현실정치는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계를 떠나 이후 줄곧 기업에서 활동해 왔지만 이때 익힌 Political Mind가 많이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경제 역시 정치와 분리될 수 없었던 한국적 정치현실 탓이기도 하겠지만 국가경제의 기반이 열악한 상황에서의 경제 독재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필요했던 현실을 고려한다면 정치와 경제의 밀착은 일부분에 있어서는 필요악으로 평가해야 할 점도 있다고 봅니다. 
 여하간,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살아왔으나 기업가로서 정치학을 공부했다는 태생덕분에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인연은 각별해 정계에 친분이 두터운 편입니다. 이런 까닭에 가끔 정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농을 하기도 하죠. `내 인생에 가장 큰 성공은 기업인으로서 욕심부리지 않고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죠.(웃음)"

 - 당시 국회의원 출마 제의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화당 창당 멤버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집권당과 소속 국회의원을 선출해야 되는데 형님이 국회의원을 지내셨고 제가 정치학과 출신이고 하니 자기들 마음대로 제 이름을 집어넣은 거예요. 공화당 당사를 몇 번이고 찾아가 끝까지 안 하겠다고 사정을 해 1분 만에 이름을 집어넣은 것을 취소하는데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 팔순을 기념해 독특한 화보형태의 회고록을 내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현실정치를 떠나 기업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항상 기업과 경제 이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더군요. 두 분야가 분리될 수 없는 시절에 기업활동을 하면서 정치권으로부터 많은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을 모아 회고록을 한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제목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의 정치와 경제의 이면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창'(Rear Window․히치콕 감독의 영화제목이기도 함)으로 정했고요.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는 이런 회고록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팔순을 맞으려다 주위의 강권에 지금껏 분주히 살아온 생을 간략히 정리도 할 겸 또 도와주신 분들과 그 추억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부끄럽지만 화보집을 발간하게 됐습니다."

 - 협회 일도 관여하시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시면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젠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좋아하던 테니스와는 멀어진 지 오래고, 그래도 가끔 골프는 합니다. 요즘은 젊은 시절 즐기던 등산을 계속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가 가끔 하는 말이 있는데 `골프를 하면 하루가 즐겁고, 테니스를 치면 이틀이 유쾌하고, 등산을 하면 사흘이 상쾌하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등산은 운동효과도 좋을 뿐더러 기분전환에도 더없이 좋은 취미죠. 가끔 나가는 골프 외에는 주로 독서와 화초를 가꾸면서 시간을 소일합니다."

 - 아호가 `松崗'이신데, 호를 갖게 된 경위가 흥미롭습니다.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선친의 호가 `春崗'인데 국회 부의장을 한 형님(具泰會․LS전선 명예회장)이 `春'을 가져갔기 때문에 동생(具斗會․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에게 빼앗길까봐 `崗'자를 얼른 가져왔습니다.(웃음)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가 좋아 소나무 `松'자를 택해 호를 송강(松崗)이라 지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저를 `PH, KOO'로 부르니 영어로는 제 호인 松崗 즉 `Pine Hill'과도 뜻이 통해 제게는 딱인 것 같습니다."

 - 모교가 2025년까지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끝으로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으로 모교를 부를 때 `국립' 서울대로 지칭하는데, 바로 이 국립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봅니다. 막상 모교가 우수한 자원을 가지고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국립'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주한 것도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국립 National이란 단어는 글로벌한 관점에서는 어감도 좋지 않습니다. 뭔가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현재 모교가 추진 중인 일련의 개혁과정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작업들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동문들의 지지와 헌신이 있을 때, 모교는 서울대 하나의 이름만으로도 세계적인 대학이 돼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진=李五峰논설위원․정리=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