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호 2004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한국치과원로학수회 吳應瑞회장
조부·부친·조카 등 4代에 걸쳐 15명이 동문 남동생·차남도 치의학 발전 위해 헌신
만 65세 이상의 치과분야 원로들의 모임인 「한국치과원로학수회」. 회원 수는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모두 치과의사협회장, 치대 학장 등을 역임하고 치의학 발전에 헌신한 일등공신들이다. 올해 치과원로학수회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치과진료센터를 개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吳應瑞(47년 齒大專門部卒)동문은 이처럼 평생을 국내 치의학 발전과 노인복지 향상, 이북 실향민과 미국 교포 사회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다. 평양 출신인 吳應瑞동문은 문장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故 吳德三(11년 法學校卒·前평양상공회의소 부회장)동문의 영향을 받아 일본 명치대 법학전문부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 공습이 심해 홀로 서울로 유학을 와 모교 치대에 들어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남동생 吳應煥(59년 齒大卒·美뉴욕 치과 전문의)동문과 吳應瑞동문의 차남 吳聖鎭(77년 齒大卒·예치과 대표원장)동문은 현재 치과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吳應煥동문은 졸업 후 구급차 한 대를 Dental Clinic Car로 개조해 각 지역의 무의촌을 돌아다니며 무료진료를 펼쳤으며, 말레이시아에서 6년간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 현재 뉴욕에서 치과의사를 하며 한인 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다고. 吳應瑞동문이 중학교 시절부터 유도선수로 활약했듯 차남 吳聖鎭동문은 고등학교 시절 축구부 주장이었으며, 대학시절에는 단과대학 체육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아들의 원래 꿈은 공학도였으나 제가 좀 설득을 했죠. 졸업 후 생계를 위해 잠시 명륜동에서 치과개업을 했을 뿐 평생을 사회발전을 위해 뛰다보니 치과의사로서의 본업에 충실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아들이 제 뜻을 알아준 것 같아요. 치과개업을 할 당시 아들과 축구부 단원들이 매일 우리 집에 놀러오면서 제 생활이 부러웠는지 고스란히 모교 치대를 지원하여 대부분 합격을 하더군요. 고교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 친구 4명과 다시 의기투합해 종합치과병원인 예치과를 개업, 현재 전국에 52개의 예치과 분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吳應瑞동문이 자연스레 모교에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가족 중 서울대를 거쳐간 동문들이 많기 때문. 부친 故 吳昌杰(27년 京城法專卒)동문을 비롯해 조부 吳德三동문의 형제인 종조부 故 吳永鍵(10년 水原農林學校卒·前진도·곡성·고흥 군수)·故 吳德七(25년 京城醫專卒·前평양 중앙병원장)동문, 吳永鍵동문의 아들인 종숙 故 吳允杰(26년 京城法專卒)동문과 吳德七동문의 사위인 종고모부 尹定熙(37년 京城藥專卒·前자선당제약 사장)동문이 모교를 졸업했다. 또 지금도 부자지간처럼 지내고 있는 종고모부 尹定熙동문의 아들 尹鴻植(60년 師大卒·모교 천문학과 명예교수)·尹鴻基(64년 醫大卒·前美뉴욕의대 교수)동문과 사위 吳有燮(64년 醫大卒·강릉병원 산부인과 과장)·金裕眞(74년 齒大卒·안상규&김유진치과 원장)동문을 비롯해 吳允杰동문의 손주이자 吳應瑞동문의 조카인 재종질 朱龍宰(64년 農大卒·건국대 농대 학장)동문과 재종질녀 朱瑛子(73년 美大卒)동문에 이르기까지 서울대 동문 가족의 代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후 우리 가족을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보살펴준 고모부(尹定熙동문)는 순수한 국내 자본으로 설립한 자선당제약을 운영하면서 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큰 몫을 한 분』이라며 지금도 매일같이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묻곤 한다고. 한편 吳應瑞동문은 안정적인 치과개업의로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그가 이를 마다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일본 식민지 시절, 대학 동기들과 함께 두 가지 약속을 했어요. 독립의 그날이 오면 덕수궁에서 재회할 것과 국내 치의학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치자고 눈물로 결의했는데, 지금까지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국내 치무행정의 기초를 확립하며 국립의료원 사무총장으로 활약하기도 한 吳應瑞동문은 체육 분야에서도 유도와 각종 구기 선수들의 후배 양성에 힘쓰며 몬트리올과 LA 올릭픽 대회에 감독으로 출전,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이산가족 재회운동에 앞장서며 재미 교포들의 언어 장벽과 열악한 의료시설 개선을 위해 한국의료원을 설립했으며, 대한체육회를 통해 재미 교포들을 단결시키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친구들과 굳게 결의한 약속을 지금까지 간직하다보니 이렇게 바쁘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吳應瑞동문. 오늘도 그는 45년 무사고 운전 실력으로 다음날 있을 치과모임 준비를 위해 바쁜 길을 재촉한다. 〈表〉 종조부 故 吳永鍵(10년 水原農林學校卒) 故 吳德七(25년 京城醫專卒) 조부 故 吳德三(11년 法學校卒) 종숙 故 吳允杰(26년 京城法專卒) 부친 故 吳昌杰(27년 京城法專卒) 종고모부 尹定熙(37년 京城藥專卒) 재종 尹鴻植(60년 師大卒) 尹鴻基(64년 醫大卒) 재종 매부 吳有燮(64년 醫大卒) 金裕眞(74년 齒大卒) 남동생 吳應煥(59년 齒大卒) 차남 吳聖鎭(77년 齒大卒) 재종질 朱龍宰(64년 農大卒) 재종질녀 朱瑛子(73년 美大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