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호 2007년 12월] 문화 꽁트
얼음 꽃

"마, 한 발자국이라도 현관 밖으로 나가시면 큰일나요. 여긴 미국에서도 사기꾼이 널려있는 나성이에요. 만에 하나 누가 와서 벨을 누르면 모른 척 숨어 있다가 저에게 전화를 하세요. 아주 다급하면 911 돌리세요."
40줄에 들어선 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타이르듯 고희를 넘긴 친정어머니에게 당부를 한다.
"았다. 이곳은 눈을 멀쩡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가는 곳이라고 넌 말하고 싶은 거지."
딸은 살짝 윙크를 보내면서 어미가 온다고 지난달에 새로 구입한 렉서스에 발동을 건다. 어떻게 우리 엄마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들어가기 어렵다는 S대학을 다녔는지 몰라 하는 토를 달지 않은 것만도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박보희 여사는 현관문을 잠갔다.
최근에 호호파파 할머니인 그녀가 집안의 웃음거리요 바보천치 같은 취급을 받게 됐다. 서울에서 당한 사건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어제 모처럼 시간을 내서 사위랑 딸이 나성에서도 제일 유명하다는 중국집 용궁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중에 입에 올리기도 창피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명주수건을 뒤집어쓴 것처럼 늙어버린 노인이 자꾸 박 여사를 보고는 빙긋빙긋 웃는 것이 아닌가. 그녀와 마주 앉아있는 탓에 노인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애인이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다. 앞에 놓인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그저 멍청하게 박 여사만 보고 있어서 나중에는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죽겠는 것은 옆에 앉아서 장모님 이것 드셔보세요, 저것도 잡숴보세요 하면서 아양을 떨고 있는 사위 눈에 그 노인이 잡힌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위는 흘끔흘끔 노인을 노려보았다. 풀 코스로 시킨 탓에 거의 두 시간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가족만의 오붓한 시간에 노인으로 인해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딸만 노인을 등지고 있어 사위와 장모의 곤혹스러움을 눈치 채지 못하고 연신 요즘 새로 구입해 재미를 보고 있는 리커 마켓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차 뒤를 그 노인이 악착스럽게 따라붙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위도 불안한지 웨스턴에서 알바라도로 우회전하면서 골목으로 파고들어 뒤따르는 노인의 차를 떨쳐내려고 거칠게 차를 몰았다. 그래도 여전히 노인의 빨간색 캠리는 박 여사의 차를 따라붙었다. 늙은 주제에 흰색 차도 아니고 빨간색이라니….
손자 녀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군이 좋다는 나성의 북쪽인 라카나다에 집을 사서 이사했기 때문에 산중턱에 있는 집까지 훤하게 뚫린 길을 사위는 차를 거칠게 몰았다. 집 근처까지 뒤를 악착같이 추적하던 차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위가 밤에 베개 밑에서 딸에게 그 말을 했을 게 뻔하다. 아침 밥상에서 딸은 자꾸 실실 웃어죽겠다는 눈길을 던졌다. 한국에서 남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미국으로 피해왔는데 이상한 노인의 추파로 인해 곤경에 처해진 셈이다. 박보희 여사는 달걀형의 미인은 아니어도 동글납작한 얼굴에 뺨이 사과처럼 발그레하고 쌍꺼풀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었다. 수학과 20명 중 유일한 홍일점이라 교수의 충고에 따라 대학에 다니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빨간색 옷을 입어본 적도 없고 야하게 화장을 한다거나 입술을 빨갛게 칠한 적도 없었다.
지금의 남편은 같은 대학 공대출신인데 부모들끼리 혼인을 약속한 터라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생활로 골인했다. 남녀공학을 다니면서 로맨스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남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에 열중했고 몸을 도사렸던 탓이다. 물론 죽겠다고 따라다니던 사람은 있었으나 그게 무슨 문제인가. 요즘 드라마에서는 몇 번 만나고 바로 키스를 하지만 전쟁 뒤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 간엔 좋아하면서도 사랑 담긴 눈만을 번뜩거렸지 감히 손도 잡지 못한 추억이 있게 마련이다.
아침 햇살이 거실의 통유리를 타고 파고든다. 살이 통통하게 찐 맑은 햇빛이라 박 여사는 조촘조촘 창가로 다가갔다. 앞뜰 화단에는 강렬한 햇볕을 받고 꽃잎을 활짝 폈다가 저녁이면 입을 오므리는 사막지대의 채송화가 눈부신 진분홍색을 강렬하게 내뿜었다. 이런 땅에 고추와 깻잎을 심으면 얼마나 잘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길가를 보니 어제 따라붙었던 빨간 차가 있지 아니한가.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다. 사기를 치려고 따라붙은 모양이다. 어떻게 박 여사가 바보라는 걸 알고 이렇게 악착같이 추적하는 것일까. 급히 방으로 들어가 금목걸이와 사위가 준 1백불짜리 지폐를 양말 뒤축에 꾸겨 넣었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911을 돌릴까. 영어를 못해도 911만 돌리면 바로 5분 안에 경찰차가 온다니 그렇게 할까. 박 여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딸의 옷이 잔뜩 걸린 작은 방 크기의 옷방(Walking Closet)으로 들어가 옷들 뒤에 몸을 숨겼다. 가슴이 떨리면서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건 순전히 남편 탓이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얼마나 엄하게 그녀를 집안에 가둬놓고 야단을 쳤는지 모른다. 그녀의 행동범위는 안방과 부엌과 시장이 전부였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그 안에서 날마다 뱅뱅 돌았다. 총명해서 천재란 말을 들었던 그네는 남편의 이상 망측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줄줄이 사탕으로 낳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기르면서 시집살이를 하고 날마다 솥뚜껑 운전만 하다 보니 아마도 바보로 진화한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용하게 참고 살아왔는데 지난달에 터진 사건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타였다.
"여기는 국제사건을 다루는 강력수사부입니다. 전화 받으시는 분이 누굽니까? 이름을 대세요."
"제 이름은 박보희입니다."
"댁의 남편 성함은……."
"김성한입니다."
"맞습니다. 김성한 이름으로 된 비자카드를 도용한 홍콩 마약밀수업자들이 6천5백만원을 빼갔습니다. 전화를 끊고 기다리세요. 지방검찰청 수사반장이 전화할 것입니다."
5분 뒤에 걸려온 검찰청 수사반장은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빨리 그 돈을 지정한 계좌에 넣지 않으면 남편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남편은 그 시간 제주도로 친구들과 골프를 치러갔으니 전화를 해도 통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판에 먼저 돈으로 해결하자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남편이 은퇴자금으로 받아 아주 소중하게 저축해둔 돈을 헐어 요구액을 몽땅 부쳐버렸다. 늘 바보라고 구박하면서 가정에 틀어 앉혀놓았던 여자가 제일 어려운 고비를 넘겨줬으니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수없이 할 것이란 기대로 콧노래까지 나왔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돌아온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 펄펄 뛰면서 바보니, 멍텅구리니, 이런 여자가 어떻게 S대학을 다녔느냐는 등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그녀는 완전히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그 사건을 빌미로 대한민국 곳곳에서 엇비슷한 일이 계속 터져서 박 여사는 어리석은 가정주부요, 바보가 됐다. 무슨 큰 멍텅구리를 만드는 블랙홀에 빠져든 기분이었다. 남편의 구박이 매일 계속되어서 같은 밥상에서 식사할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러 바보 멍청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꽝꽝 얼어붙은 상태였다.
남편의 구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궁여지책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딸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절대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저려오는 다리를 주물렀다.
사위가 너무 조용해서 살살 옷 방을 빠져 나온 박 여사는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빨간 차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똑똑한 할머니로 알고 포기한 모양이다. 손발을 잘 주물러서 혈액순환을 시킨 뒤에 박 여사는 용감하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성의 날씨는 집안에 있으면 상큼하고 시원하지만 때로는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다. 흐트러지게 입을 벌린 사막의 채송화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강렬하게 뿜어내는 빛에 한껏 취해 꽃잎을 만지는 순간 큼직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뒤를 돌아보니 바로 그 노인이 아닌가.
"아악!" 박 여사는 벌렁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런 그녀에게 노인은 손을 내밀면서 빙긋 웃었다. 야! 이 사기꾼아 물러가라! 하고 고함을 질러야하는데 입이 지퍼라도 닫은 듯 벙끗할 수조차 없었다. 노인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박 여사의 어깨 밑에 두 손을 넣어서 일으켰다. 무슨 사기꾼이 이렇게 다정하단 말인가! 박 여사는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귀엽게 토라지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노인이 빙긋 웃었다. 아아!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머리가 명주 색으로 발해서 그렇지 눈빛이랑 입가가 낯이 익었다.
"누구세요? 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저 역사과 김주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언뜻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난로불기가 전혀 없던 학교도서실까지 악착같이 따라붙었던 남학생이다. 심지어 집까지 미행을 해서 친정식구들이 모두 뛰어나와 심할 정도로 구박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백발이 된 나이에도 미행을 하세요?"
"제 일생 유일하게 미행하게 되는 여자입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사막의 채송화 옆에 앉았다.
`아하! 난 45년 전처럼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구나. 난, 난, 바보 천치 멍텅구리 솥뚜껑 기사가 아니고 단지 얼어붙은 꽃일 뿐이다. 다시 옛날의 나로 돌아가자.'
박 여사는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생명력이 강한 채송화처럼 활짝 웃어가며 당당하게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