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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호 2007년 12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李泰鎭교수의 `이야기 서울대'





 지난 봄, 대한의원 1백주년 기념 행사에 보낸 원로들의 축하 메시지 가운데 최고령이신 朱槿源선생의 술회가 특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알려지자 경성제대 의학부의 한국인 의사와 학생들은 모두 시계탑 아래로 뛰쳐나와 거기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그때 저쪽에서 두루마기 입고 갓 쓴 한 노인이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더라고 했다. 다가가니 시계탑을 가리키며 저기 올라가서 시계 밑 사면에 히노마루(일장기의 원)를 벗기면 태극 문양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정말로 태극 마크가 나오더라는 것이다.〈사진下〉 개화기의 시계탑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 회고를 들으면서 특별한 감상에 빠졌다.
 1907년 대한의원 건물이 낙성될 시점에서 시계탑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고종 황제 한 사람뿐이었다. 조선왕조가 5백년간 국교로 삼아온 유교 사상에서 시계는 군주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군주는 요 임금이 그랬듯이 시각을 재서 백성들에게 農時를 알려줄 의무가 있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이 과업을 세종대왕이 모범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蔣英實로 하여금 자격루를 제작하게 하여 이를 궁중에 설치해 표준시계로 삼았다.
 그런데 이 자격루가 1880년대 말에 기계추 시계로 대치됐다. 당시의 군주 고종이 서양 기계문명 수용의 의지 표시로 건청궁(경복궁 후원 일대)에 시계탑을 세우고 거기에 서양식 기계추 시계를 달았다.〈사진下〉 이 시계탑은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이제 서양 기계문명 수용에 나섰다는 표지로, 대내적으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이 뜻을 모두 함께 따라 달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1907년 완공된 대한의원 건물에 시계를 단 것도 같은 뜻이었다.
 현재 서울대 의대와 병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한의원 자리는 본래 왕실의 景慕宮이 있던 곳이다.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莊獻世子로 추존하면서 이곳에 궁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세운 다음, 1899년에 장헌세자를 莊祖로 추존하여 태묘(종묘)로 위패를 옮겼고, 이에 따라 경모궁은 용도 변경이 가능해졌다.
 이 무렵 황제는 궁내부 산하에 일반 인민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병원 하나를 설립하고 싶었다. 이 계획은 1905년 대한적십자사 병원의 발족으로 구체화돼 대동(효자동 쪽)에서 문을 열었다. 새 건물이 지어지면 옮길 예산이었다. 당시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의 국권을 빼앗으려 들어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입지 확보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야 할 판이었다. 황실은 1900년대 초에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경운궁(덕수궁)에 석조전을 짓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병원 건물의 설계도 하딩의 힘을 빌렸던 것 같다. 대한의원으로 준공을 본 이 건물의 여러 장식이 석조전에 쓰인 기법과 닮은 것들이 많다.
 대한적십자사 병원 사업은 1905년 11월 일본이 드디어 보호권을 강제로 획득함으로써 파행의 길로 들어섰다. 1907년 3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內部 병원(광제원, 종두소), 學部 의학교, 육군병원, 적십자사 병원 등을 하나로 통합해 대한의원이라고 이름을 붙여 신축 건물을 사용하게 했다. 건물 공사도 일본인 토목업자들에게 맡겨 외견상 통감부의 실적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고종황제는 재위 중이었고 따라서 시계탑의 사면에 태극마크는 설계대로 표시됐다. 시계탑은 이 건물이 황제의 뜻으로 세워진 대한제국의 문명시설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학부 의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의학교요, 내부 병원은 1885년의 제중원을 잇는 것이지만 전자의 부속병원의 성격을 띠었다. 일본에 의해 왜곡된 경로가 있었지만 경모궁(함춘원은 이의 부분) 터에 들어온 두 기구는 오늘의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그 병원의 시원에 해당한다. 대한의원은 그 후 총독부 병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이어지는 험난한 역사가 있지만 경모궁 자리에 일반 서민 대중의 수혜를 목적으로 대한적십자사 병원을 세우고자 한 황제의 뜻은 지워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