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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2007년 11월] 문화 꽁트

싸가지 K여사의 `辯'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월담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었다. 들고 있던 핸드백은 담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그 담장을 붙잡고 말을 타듯해야 담은 넘어갈 수가 있었다. 평소 퇴행성 무릎관절로 뒤뚱뒤뚱 걷는 처지에 까딱 잘못하면 큰 변을 당할 게 뻔하니 신중하고 조심성 있게 발을 딛는다. 간편한 바지차림도 용감한 월담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그 찰라, 뜻밖에도 어려서 뜀틀 넘던 추억까지 되살아나 젊음을 되찾은 듯 몸과 마음이 거뜬해지기도 했다. K여사는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주변을 조심스레 돌아봤으나 천만다행으로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터널을 이룬 오솔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불과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어느새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걷어 갔다. 이렇게 시원한 숲길이 가까이 있었다니,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띤다. 백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집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러 가는 이 지름길은 작렬하는 暴炎에 짓눌려 헐떡이던 가슴에 시원한 공기와 녹색향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짹짹'거리며 여사의 모험을 격려하듯 지저귄다. 하늘을 향해 겹겹이 받쳐 든 작은 손바닥 같은 푸른 잎들은 싱그러운 향기로 그녀를 포근히 감싸 안아 마치 소금에 푹 저린 배추처럼 더위에 지쳐 늘어진 온몸을 순식간에 되살려준다.
 지난 해 봄이었던가. 반상회에서 `뒷담의 한 곁을 헐고 출입구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논의가 있었다. 團地주민들의 여론조사 결과 대다수가 찬성을 했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에 가까운 여사의 거처인 2동과 그 옆 3동의 전 家口는 반대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두 동이 예정된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선호되는 요즘 풍토라 한들 이런 일을 다수결로만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담을 헐면 출입구 가까이 놓일 두 동의 주민들이 불량상인이나 무단 침입자를 억제할 장치 없이는 절대불가를 외쳐서 겨우 무산시켰던 터였다. K여사가 `절대반대'의 편에 섰던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한데, 어느 새 누군가가 출입구를 내려던 그 곳에 통나무 토막을 안으로 겹겹이 쌓아 올려 계단을 만들고, 밖으로는 플라스틱으로 된 맥주병 박스를 받쳐둬 담장을 쉽게 넘을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아파트 뒤편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느덧 10여 년이 넘어 제법 하늘을 가리는 숲을 이뤄 이끼 낀 그늘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섭씨 30도가 넘나드는 뜨거운 어느 낮, 매사에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여사의 남편까지도 `한 번 그리로 지나가 봐'하며 은근히 권하는 바람에 그동안 망설이던 마음을 누르고 그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간 것이다. 뙤약볕을 피해 숲 속 오솔길에 들어서니 그 시원하고 상쾌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지름길이니 시간도 절약돼 담을 넘는 약간의 거북함은 오히려 가벼운 흥분까지 맛보게 한다.
 이렇게 시작된 숲 속 오솔길 모험 나들이에 여사는 요즘 부쩍 재미를 붙였다. 실인 즉, 입학원서에 제1지망 건축, 제2․제3지망 모두 건축이라고 쓰더니 기어이 그 과를 전공한 막내 녀석이 고2되던 해에 설계를 해서 남편이 손수 지휘해 지어 20년을 살던 2층집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거기 아담한 마당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었고, 감나무를 비롯해 대추, 모과, 포도나무 등의 그 수확마저도 즐기며 아이 셋이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마친 우리 집 애환의 역사가 송두리째 얽혀 있는 추억이 되살아나 그리움에 흠뻑 젖어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 누가 `교육자라는 저 사람이…'하고 손가락질을 하지나 않을까 늘 조마조마한 양심의 발동을 느껴 자신에게 자문자답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너도 별수 없지 뭐냐? 세상에 싸가지가 따로 있던가. 남이 한다면 못하게 막고, 남이 해놓은 것은 나 몰라라 잘도 넘어 다니니. 쯧 쯧 쯧, 좋은 나이를 하고….' 스스로도 어이없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흔히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낭만이다.' `남이 알뜰하면 구두쇠고, 내가 하면 알뜰한 절약가' `남이 하면 변덕쟁이, 내가 하면 순발력 있는 사람'이란 말을 쉽게들 하지만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싸가지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그녀는 나무숲 오솔길을 거닐 생각을 하면 덧없이 가슴이 설레고 상큼한 숲 향기가 코끝에 스쳐와 그 유혹을 떨치질 못하니 어찌하랴.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 동료 중에 툭하면 아이들에게 `싸가지'란 말을 잘 퍼붓는 남자교사가 있었다. 그것도 다 큰 여고생들을 향해서이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들을 봤나, 쯧 쯧."
 분명 탓하는 말일 텐데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한다. 순시 차 지나치던 교장선생도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음을 머금은 채 스쳐가던 장면이 새삼 떠오른다. 싸가지란 거친 말을 들으면서도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여고생들. 말하기도 듣기도 껄끄러운 말을 여고생에게 내뱉고도 그들과 함께 정겹게 웃어넘기는 선생님. 도무지 이해하기 쉬운 상황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모습의 한 단면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처음 `싸가지'란 단어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 말이 어느 지방의 사투리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단어가 욕설에 해당하지만 어쩐지 구수하고 사람냄새가 풍기는 재미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사전을 뒤척거려 봤다. 보통은 `버릇이 없다'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 등의 가벼운 의미로 많이 쓰이며 또 `마음 씀이 장래희망이 어둡다는 뜻, 식물로 비유해 자라나는 새싹이 곧바르고 충실하지 못하고 삐뚤어지고 꾸부러져 장래 충실한 나무가 되지 못하고 열매도 거둬질지 의심된다'는 의미라고 했다.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행동과 심성이 장래성이 없는, 뭐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인다는 것이다.
 때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교통체증이 심해 약속시간이 빠듯해지면 좌석에 앉았어도 안절부절 몸이 달아오르며 속마음으로 운전기사를 재촉하게 된다. 비록 입 밖에 내진 못하지만 내심 `신호를 좀 어겨서라도 빠져나가 줬으면…'하는 아쉬움이 인다. 그러나 자신이 운전을 하거나 건널목을 지날 때, 신호에 걸린 차들이 억지로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띄면 `저 싸가지 봐!' 하고 비아냥거리게 되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받을 만큼의 교육과 교양을 갖추며 제법 문화시민인양 처세하는 신분이건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짜 싸가지'가 아니고 무엇일까 생각하니 스스로 서글프고 민망하며 씁쓸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적인 자화상이 비단 나만의 것일까.
 K여사는 부지런히 자기합리화에 머리를 쓴다. 항간에 쉽게 접하는 무단횡단, 불법 쓰레기투기, 불법 갓길운전 등 갖가지 싸가지들의 횡행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된 몰래카메라. 게다가 심지어 사회진출을 위한 허위학력 사태까지 그 사례를 이루 들 수 없는 것이 요즘 우리의 세태가 아니던가.
 만일 이곳에도 몰래카메라가 설치됐었다면 나는 영락없이 찍혀 망신살이 뻗혔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평범한 이치를 새삼 되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대체 인간은 어느 수준에 가야 이 `싸가지 근성'을 멈추게 되며, 善을 지향하는 사회풍토를 조성할 수 있게 될까. 준법정신이 강하고 누구보다 양심적이라 자부하던 내가 이러한 몰골이니 하고 몇 번이고 자신의 가슴을 쳐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일까, 예년에 없던 고온다습한 아열대의 긴 여름 탓에 그 길 아닌 숲 속 길을 월장하며 지나다닌 싸가지 주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며칠 전 반상회서 다시 `뒷담에 출입문을 내자'는 문제가 제기됐다. 많은 주민이 이번 더위와 함께 양심적 고통과 월담하는 불편을 감내한 아픔이 있었던 걸까. 단지의 전 가구가 완전합의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이 가을에는 아마도 그 숲 속의 오솔길은 아담하고 작은 뒷문과 연결돼 마을주민에게 사랑 받는 예쁜 풀밭 길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비록 아직 숲 속의 문이나 길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젠 떳떳하게 누구의 눈치도 살필 것 없이 가슴을 펴고 그 오솔길을 지나며 담장을 넘게 됐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K여사는 지금 오솔길에 멈춰 서, 짙게 덮인 진초록 성하의 나뭇잎을 우러러본다. 갖가지 나무들이 서로 얽혀 함께 서 있어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자태를 유감없이 지키며 아우러져 보다 넓은 품으로 인간에게 무수한 덕을 베푸는 나무들, 자연은 언제나 사람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깊은 호수처럼 짙고 푸른 우리의 가을하늘에 스쳐 가는 바람처럼, 그녀는 빈 가슴으로 가을하늘을 떠도는 한 점 바람이고 싶어지는 스스로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