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호 2007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평생 자산이 될 `카불' 입성기


"내일 아침 카불로 들어간다."
두바이에 급파된 취재팀에 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피랍사태를 계기로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된 아프간 현지에 대한 정부의 취재허가가 떨어졌다는 얘기였습니다.
미리 두바이로 건너가 호시탐탐 카불 입성을 노리던 기자들을 대상으로 밤사이 공동취재단이 꾸려졌습니다. SBS 취재기자, 카메라기자를 비롯한 5개 언론사 기자 6명이 다음날 새벽 카불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2시간 반 정도 비행 끝에 카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 낮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두바이와 비교하면 한결 선선한 날씨였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외교통상부 직원은 조금 전 있었던 상황부터 설명했습니다.
"오시기 직전, 공항 앞에서 외국인을 노린 폭탄테러가 있었습니다. 사람도 죽었습니다."
이날 아침, 현지 대사관은 미국 측으로부터 테러가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폭탄트럭 두 대가 외국인 차량을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는데, 실제로 폭탄테러가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이날 폭발한 트럭은 첩보에는 나와 있지 않은 차량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정부 관계자는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는 동안, 폭탄트럭 두 대가 카불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주더군요.
공항을 나와서 들어선 카불시내. 차량이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출 때마다 전통복장을 한 잡상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창문을 두드리며 무엇인가를 사라는 몸짓을 했습니다.
집들은 대부분 흙으로 벽을 쌓아 만든 현지 전통가옥들이었는데, 간간이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과 그을음이 보였습니다.
길가의 시장은 나름대로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중무장한 현지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검문지역 몇 곳을 통과한 끝에 석방된 피랍자들이 묵고 있는 세레나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당초 피랍자 19명 전원이 나오기로 했던 기자회견장에 유경식 씨와 서명화 씨 두 명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두바이를 떠나기 전, 공동취재단에게 19명 전원의 기자회견을 약속했던 외교통상부는 카불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언론사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어쩔 수 없다며 이들과의 인터뷰만 허용했습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사태 43일 만에 최초로 국내 언론의 현지 직접 취재가 이뤄졌다는 데 의미를 부여해야 했습니다.
피랍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외신보도와 추정에 의존했던 납치 당시와 억류 당시의 상황이 피랍자들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게 현지시각 1시 반쯤. 한국 시각보다 4시간 반 정도 늦기 때문에 8시 뉴스에 맞추기 위해서는 숨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기자회견 동영상을 위성을 통해 한국으로 전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텔에서 1~2km 정도 떨어진 현지 통신사로 테이프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탈레반 무장세력의 주요 테러 목표 중 하나인 영국 대사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위치였습니다. 하지만 방송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위성송출 작업을 무사히 끝마친 뒤에도 취재는 이어졌습니다. 기자회견장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金萬福국정원장과 `선글라스 맨',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는 19명의 석방 피랍자들, 벌떼 같이 달려든 외신들의 취재열기.
석방 피랍자들과 취재진, 국정원 VIP 등을 실은 두바이행 UN특별기가 카불 국제공항을 떴습니다.
지친 듯 창밖을 내려다보는 피랍자들의 표정은 생존의 기쁨과 목숨을 잃은 동료에 대한 슬픔이 묘하게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국인 23명 피랍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와 단 하루밖에, 그것도 소수의 기자들에게만 주어진 현장취재 기회.
`사건 초기부터 현지에서 취재할 수 있었더라면….'
아쉬움은 남았지만, 3년차 기자에게는 평생 자산이 될, 더할 나위 없이 뜻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