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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2007년 8월] 문화 꽁트

내 눈아, 왜이리 고달프냐.





 요즘 들어 내 눈이 자꾸 침침해져서 안과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눈알을 들여다보는 검안기에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유치원 아이처럼 눈을 대고 턱을 받혔다. 그러고 나서 한참 있다가 바쁜 걸음의 구두 소리가 다가오더니 "눈을 크게 뜨세요" 하는 의사 선생의 애교 있는 목소리가 바로 내 코앞에서 들렸다. 이어 검안기의 렌즈가 번쩍하면서 찰가닥 소리를 몇 번 내고 나더니 검사가 끝났는지 검안기를 옆으로 밀치면서 빠른 속도로 한 마디 했다.
 "백내장 기가 좀 있기는 합니다만, 수술하기는 아직 일러서 좀 더 기다려야겠네요" 하면서 안약 한 방울을 내 눈에 떨어뜨리고는 나가라고 했다. 나는 기다란 의자에 촘촘히 앉아 있는 눈병 환자들 틈에 끼여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것이 억울해서 더 자세한 검사와 설명을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듯이 다음 환자를 호명했다. 나는 검사실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주사 맞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곁눈으로 검사하는 상황을 살폈더니 나만의 속결처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빨리 쫓겨 나오는 늙은이가 있어서 속이 조금 풀렸다.
 검사 결과는 백내장 초기라고 했지만, 내 눈은 그의 말과는 달리 종일 안개가 자욱해 어디서 뱃고동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낭만에 젖어들어 비린내나는 고깃배라도 빌려 타고 멀리 떠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당장 한 줄의 글읽기가 어려운 눈병 환자이고 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내 눈은 어려서부터 말썽이었다. 언제나 눈 가장자리가 눈물에 젖어 있어 초등학교 시절의 수업이 불편했고, 그래서 성적은 보잘것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성적 불량을 수분이 많은 눈에다 핑계대면서 또한 나의 어머니를 원망했다. 오다가다 들은 동네 아줌마들의 말에 의하면 임산부가 아기를 가졌을 때 젓갈을 먹으면 아기의 눈가가 배냇병으로 노상 젖어 있어 지적지적하다는 것이다. 항간의 여자들 입으로 왕래하는 이 설이 바로 어머니 탓으로 돌리게 된 나의 분명한 이유였다. 어머니는 젓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눈은 주변이 조금 지저분하다는 것일 뿐, 시력은 그런대로 정상이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본다면 이러하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철 마을 뒤 개울에서 꼬마들과 멱 감을 때 물 밑으로 몰래 헤엄쳐 들어가 눈을 부릅뜨고는 가슴까지 차 오른 물 한가운데 서서 뭔가 종알대고 있는 그 녀석들의 아랫도리 싱싱한 풋고추의 형태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물을 먹을까봐 입을 꼭 다물고는 웃음을 참고 있다가 잠수부처럼 자연스레 물위로 떠오르곤 하는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싶다. 같은 짝의 친구가 안경을 끼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하도 근사해서 한번 빌려 껴 봤더니 옆에 있던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이광수를 닮았다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나는 방과후에 슬그머니 안경집을 찾아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눈에 안경을 끼기가 염치없어서 검안을 할 때 시력 검사표의 2.0까지 보이는 것을 잘 안 보인다고 속여 몇 단계를 더 낮춰 검정테의 도수 안경을 맞춰 끼기 시작한 것이 한평생의 진짜 약시가 돼버린 것이다.
 도수가 눈에 맞지 않은 까닭으로 처음에는 어지럽고 머리가 띵하면서 칠판 글씨도 아른아른해 수업시간의 필기에 애로가 많았지만, 존경하는 대문호 이광수를 닮기 위해서 참고 견디다 보니, 두세 달 만에 그 멀쩡하던 눈이 도수 안경에 적응이 되어 멋쟁이 문학 소년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이제는 안경을 벗으면 10미터 앞의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 병신이 되어버렸다. 긁어 부스럼 낸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눈병은 순전히 어머니 탓이었지만, 중학 시절의 약시는 문학에 대한 나의 철없는 욕망 탓이었던가.
 내가 한 달 전에 서울에 일 보러 갔을 때 날씨도 화창하고 친구들이랑 만나 낙지볶음 점심도 얻어먹고 해서 즐거웠는데도 눈물이 자꾸 나고 침침해 곧장 병원을 찾았더니, 시골이나 서울이나 가는 곳마다 노소 환자가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을 검사하는 종류도 다양했다. 옛날에는 의사 선생의 그 무딘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까서 뒤집어 보는 것으로 검사는 간단히 끝났지만, 요즘은 그것이 아니었다. 현미경 같은 검안기로 간호사와 조교 의사 선생이 번갈아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한 놀라지 말라고 미리 경고까지 하면서 눈에다가 딱총 같은 소리를 펑펑 터뜨리면서 돈 많이 갖고 왔느냐고 겁을 주는 눈 검사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눈동자를 팽창시켜 검사하기 위해 병원에 오기 두 시간 전에 집에서 넣고 오라고 준 약은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처럼 우중충했지만, 도리 없이 넣었더니 눈 속이 순식간에 수제비 국물 범벅이 되어 괜한 늙은이 병원 길에 아침부터 더듬어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었다.
 인총이 많아 팥죽 솥처럼 끓고 있는 이 서울의 한 복판에서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소리 없이 가는구나 싶어 세상이 어지럽고 귀찮았다. 이렇게 하여 얻은 검사 결과는 시골병원 검사와 마찬가지로 `백내장'이었지만, 우선 정도가 심한 한 쪽만 수술을 받고 시골로 내려와 버렸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오는 다섯 시간의 버스길은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신나는 수학여행과는 또 다른 흥겨움이 있었다. 기차와 자가용에 빼앗겨버린 버스의 승객은 불과 열 명 남짓한데, 호남고속도로 버스 안의 앞 천장에 붙여 놓은 텔레비전은 종일 연속극 필름을 돌려댔고, 핸드폰은 한여름 절간의 매미처럼 끊이지 않고 신나게 울어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 신호음도 가정집 안방이나 사무실에서 따르릉 따르릉 하며 주인을 부르는 촌스럽고 시끄러운 소리였는데, 이 몇 년 사이에 세상은 변해서 온통 노랫소리 천지가 되어버렸다.
 "어이, 순탠가. 나 지금 서울 가서 백내장 긁어버리고 오네. 세상이 훤하시. 내일 만나세. 술 값 좀 챙겨 갖고 오소잉."
 60대 초반의 술잔께나 비우게 생긴 남정네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나는 귀가 번쩍 띄어 세상이 훤하게 됐다는 백내장 수술에 관한 자세한 것을 그에게 물어보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핸드폰을 두 개씩이나 갖고 있는지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잇따라 울려댔다. 이번에는 바로 내 옆자리의 핸드폰에서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금매 말이요. 애써 가꾸어논 고구매를 그놈에 멧돼지들이 다 파 묵어부렀단 말이요. 시상에, 우리는 뭘 묵고 살까 모르겄소."
 70대 초반의 머리가 하얀 할머니의 걱정이었다. 휴대전화는 이쪽에서 걸기도 했지만, 걸려오는 전화가 더 많았다. 서울에 사는 아들, 딸들이 골라 넣어준 듯한 신호음악도 가지각색이었다. 서울에서 백내장을 긁어버리고 온다는, 그 살벌한 말투의 주인공인 60대 초반의 남정네에게 내가 백내장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핸드폰에서 울려나오던 장윤정의 `짠짜라' 때문이었다.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차 속의 승객들이 들으라고 앞자리의 머리 쪽에 다리를 치켜올려 뻗어놓고서는 비스듬히 드러누워 얼른 전화를 받지 않는 그의 저속한 몰취미가 얄미워서였다. 차 속의 손님이 몇 사람 안 된다고는 하지만, 이런 싸가지가 있단 말인가. 자기 딴에는 대단한 클래식인 줄 알고 내 노래 선곡 수준을 좀 평가해 달라는 심산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본의 아니게 번번이 체험하는 고속버스 안의 이런 잡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구수한 남도의 사투리와 함께 한 판 벌이는 동네잔치에 마음을 풀기도 했다.
 시골집으로 돌아와서도 수술 뒤끝은 계속 좋지 않았다. 시나브로 낫겠지 하고 며칠을 참다가 결국에는 이곳 병원을 찾았다.
 검안기를 들여다보더니 백내장을 수술한 눈임을 당장 알아냈다.
 "수술을 서울서 했소? 시골 사람들은 뭘 묵고 살라고 모조리 서울로 가버린다요."
 진찰 카드에서 종전의 내 병력을 다시 확인하고 있던 의사 선생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서울에서 수술한 환자는 치료 안 해준다며 농담 아닌 정색을 했다. 고객을 바로 앞에 앉혀 놓고 이런 횡포를 부릴 수 있나 싶었지만, 시골 병원의 분통을 이해할 만도 했다. 자잘한, 이런저런 눈병의 종일 치료보다 한두 사람의 백내장이나 녹내장 수술의 수입이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시골에서 애쓰고 돈 벌어 서울 사람들 먹여 살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방 불신 현실에 대한 분통인가. `마른 놈은 보기만 해도 운다'는 속담도 있더니 
시골에 사는 나도 그와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기가 무서웠다. 나의 이 침침한 백내장 때문이 아니라, 나날이 치솟는 물가가 나의 목을 죄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나라를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며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며 목에 심줄을 돋우는 통치 지망자는 장꾼처럼 많지만,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우리나라의 앞날이 오늘도 내 눈을 이토록 피곤하고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난번 고속버스 안에서 듣던 `짠짜라'나 다시 한 번 신나게 들으면서 잠이나 한 숨 푹 자고 나면 속이 한결 풀릴 것만 같았다.
 "내 눈아, 왜 이리 고달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