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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007년 7월] 문화 꽁트

1977년 관악사의 늦은 가을




 1977년 관악캠퍼스의 남학생 기숙사인 관악사의 한 방에서, 수형은 늦은 시각에 시를 쓰고 있었다. 기숙사 개방행사인 오픈하우스 축제가 닷새 후로 다가왔다. 주최측에서는 행사 홍보 팸플릿을 만들면서 거기에 인사말과 일정 외에 축시도 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축시는 기숙사생들의 작품들 중에서 선발하기로 하였다.
 대학 신입생인 수형이 축시 현상공모 공고를 본 것은 이미 열흘 전이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응모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시를 쓴다고 했지만, 자신의 작품들이 난삽하고 지리멸렬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는 원칙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렇다고 즉흥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은 우연히 그의 시를 읽고서, 연못 속에 두레박을 던져 넣었다가 끌어올려서 거기에 담긴 것을 되는 대로 나열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는데,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적절한 지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축시 당선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이 술이라는 데 있었다. 당선자와 당선자의 파트너에게는 생맥주를 무한정으로 마시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아직 생맥주 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어서, 학생들에게 맥주는 귀한 술이었다. 관악사에는 수형의 고등학교 동기가 여럿 들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호주가들이었으며, 그들이 그 공고를 보고서 자기들 못지않게 술을 좋아하는 수형을 부추긴 것이다.
 단순히 부추긴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그 축시 공모는 수형을 위한 것이고, 그러니 자연히 부상으로 제공되는 맥주도 수형의 것, 아니 그들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들이 그렇듯 의기투합하여 묘하게 추켜세우는 통에, 그는 우쭐해진 마음과 술기운에 힘입어 그만 자기도 모르게 승낙해버린 것이었다. 역사상 술자리에서 술김에 한 약속으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 심지어 인생을 망치기까지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다음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당연히 그로서는 후회막급이었다. 심지어 그로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친구들의 짓궂은 음모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철석같이 약속한 마당에 시 쓰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지금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서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메워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그는 '젊은이는 춤꾼이라오'라고 썼다. 이미 며칠 전에 떠올린 구절이었다. 그 뒤로 영 진척이 되지 않아 매일 밤과 새벽에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예감이 달랐다. '왼쪽으로 돌 때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감성을 불 밝히고.' 얼마 후 그는 다음 줄을 썼다. '오른쪽으로 돌 때는 땅 위의 대기를 호흡하며 지성을 번득이고.' 그 뒤의 시구들도 줄줄 이어졌다. 이윽고 그는 세 대의 담배를 피운 후에 마지막 줄을 썼다. '모두 함께 우정의 두레박을 드리웁시다.' 결구가 다소 유치한 진부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팸플릿용 시에는 오히려 적절하지 않겠는가. 내친 김에 그는 제목도 그렇게 달았다. `모두 함께 우정의 두레박을 드리웁시다.'
 다음날 일어나서 그 시를 다시 읽어보니, 전날 적잖이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그런대로 잘 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은 그에게 연못 속에 두레박을 던져 넣듯이 시를 써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그 혼란스런 연못 속에 젊음의 두레박을 드리웠다가 뭔가 제대로 된 것을 하나 건져 올렸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수형은 곧바로 그 시를 행사 주최측에 전달했고, 다음 날 저녁 그는 당선 통지를 받았다. 그로서는 백일장을 포함한 문예공모전에서 처음으로 당선의 영광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 기쁨이 의외로 컸던 탓에, 이제 비로소 앞날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하리라는 과장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 암으로 타계한 그 국어선생에게도 뒤늦게나마 빚을 갚았다는 느낌도 뒤따랐다.
 다음 날, 그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인근 대학의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파트너가 정해졌을 때, 그는 짐짓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동기들에게 축시 당선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열띤 목소리로 축하를 했으며, 아울러 같은 방식으로 자기들끼리 자축을 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의 파트너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축시의 제목이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수형은 무심결에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모두 함께 우정의 두레박을 드리웁시다'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 여대생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이 잠깐 어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분명 미심쩍어 하고 의심하는 듯한 냉소적인 기색이 스쳐지나간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멋쩍어졌고 흥이 깨졌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으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 그가 하고 있는 짓이란 어린 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그녀도 수형의 반응을 보고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뭔가 만회하고 보상하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그로서는 고개를 드는 일도 힘들어졌다.
 다음날 오후, 그러니까 오픈하우스 하루 전날, 마침내 군인들이 장갑차를 타고 교정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아뜩했다. 전날 막연하게나마 가졌던 불길하고 거북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단으로 진입한 군인들은 교직원을 제외한 학생 모두를 학교 밖으로 내보낸 뒤 교문과 학교 진입로를 봉쇄했다. 곧 학교를 무기한으로 폐쇄하는 강제 휴교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기숙사 역시 군인들의 감시하에 들어갔다. 그날 밤, 기숙사의 각 방으로 사감 교수의 경직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도 폐쇄될 것이므로 기숙사생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음 날 정오까지 방을 비우고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기숙사생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으나, 방에 고립되어 갇힌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상급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산발적인 항의가 이루어졌으나, 군인들의 완강한 침묵과 직선적인 행동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다. 마침내 정오가 되었을 때, 군인들이 건물 안으로 진입하여 방문들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며, 당장 떠나지 않으면 체포하여 연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수형을 포함하여 기숙사생들 전원은 가방과 책 보따리와 이불 짐 등등을 들고서 하나씩 기숙사 건물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수형이 주위를 돌아보니, 상급생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고, 하나같이 신입생들뿐이었다. 그들은 짐을 둘러멘 채 둘 셋씩 짝을 이룬 채 열을 지어 경사진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건기가 닥쳐 어미 펠리컨들이 떠나고, 새끼 펠리컨들이 자기들끼리만 남겨진 채 본능적으로 물을 찾아 행렬을 이루어 걷기 시작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미 행선지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언덕 아래에 있는 단골 술집으로 몰려갔다. 두 명의 과부가 운영하는 그 술집의 모든 방은 이른 시간에 학생들로 빽빽하게 채워졌고, 곧 이어 막걸리와 소주와 부침개 따위가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고 간 보따리들은 창고로 쓰이는 방에 부려져 있었다.
 수형은 구석진 방에 앉아 있었다. 동석한 이들 중에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저 얼굴만 알고 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의 심정은 하나같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울화와 분노에 차 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그 불안정함은 술기운과 위태롭게 결합하여 수시로 자체 분란과 자기 파괴의 기미를 드러냈다. 결국 그들 사이에서 그 상황에서는 그리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서 말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한쪽 구석에서 시작된 부질없는 시시비비가 모두에게 번져나간 것인데, 엉뚱하게도 '안절부절하다'가 맞느냐 '안절부절 못하다'가 맞느냐 하는, 이른바 표준말 논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렇듯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는 곧바로 온갖 방면으로 번져나가면서 그들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외부로부터 난데없이 날아든 충격이 그들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고 불협화음을 유발한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거칠고 미친 춤꾼들이었다. 왼쪽으로 돌 때는 절친한 친구들을 머리로 들이받고, 오른쪽으로 돌 때는 바닥에 넘어진, 자신이 넘어뜨린 친구들의 사지에 걸려 자기 자신도 넘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정의 두레박들이 서로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개중에는 퍽퍽 깨어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정 무렵에 하나둘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늦은 시간에는 술집에서 자는 것이 허락되었다. 수형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귓가에 통금 해제 사이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몸이 반쯤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소주와 막걸리와 맥주가 쏟아져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방안은 술의 연못이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주인 아주머니들의 배려로 방바닥은 따뜻했다. 그 방에서 십여 명의 동료들이 그렇듯 미지근한 술에 몸이 흥건히 젖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수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안에서는 술의 늪지 위에 썩고 깨진 젊음의 두레박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순간, 수형은 코와 눈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유독 그쪽으로 피가 격하게 몰려든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