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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007년 7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장학빌딩…모교 지원센터이자 서울의 명소될 것"






   2002년 3월 15일에 열린 서울대총동창회 정기총회
에서 본회 제19대 회장에 林光洙(기계공학48-52) 임광
토건 회장이 선출됐다. 林회장은 취임사에서 "모교의 
절실한 요망과 동문들의 염원을 수용해 30만 서울대 
동문의 요람이 될 동창회관 신관 건립을 추진하겠다"
고 밝혔다. 이후 충분한 검토 끝에 2004년 구 마포 동
창회관 자리에 '장학빌딩'이라는 명칭으로 동창회관
을 재건축 하기로 선언하고 앞장서서 50억원을 쾌척, 
건립기금 모금의 불을 당겼다. 그리고 지난 6월 25일 
마침내 역사적인 장학빌딩 기공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에 林회장으로부터 3년 뒤 완공될 장학빌딩에 대
한 동문들의 궁금한 사항과 그동안의 소회,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 장학빌딩 기공식이 성황리에 개최됐습니다. 30만 동문의 숙원인 새 동창회관을 드디어 착공하게 된데 대해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모교와 동창회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왔습니다. 제 일생의 마지막 봉사로 장학빌딩을 지어 모교와 동창회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시에 동문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자긍심을 선사하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역사적인 기공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동창회 집행부를 신뢰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돕고 지원해주신 동문들에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장학빌딩을 건립하겠다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요.
 "공대 동창회장 시절 관악캠퍼스에 동창회 사무실과 이벤트홀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엔지니어하우스(공대 동창회관)를 건립했는데 건립기금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무난히 건립, 완성할 수 있었고 회관 운영도 유명하고 큰 호텔에 맡겼기 때문에 품위있는 회관이 되었습니다. 또 건물을 지을 당시 예술적 측면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미국 명문대에서 방문한 교수들이 훌륭한 회관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높이 평가받아 총동창회 수석부회장에 임명된 것 같습니다. 당시 많은 동문들께서 마포 동창회관이 낙후된 데다 동문들이 애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론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총동창회장에 취임한 뒤 좀더 훌륭한 동창회관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죠."

 - 처음엔 관악캠퍼스 쪽에 짓고자 학교측과 많은 논의를 한 것으로 아는데.
 "그동안 동창회관이 모교 캠퍼스와 동떨어져 있어 모교와의 협조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서 회장 취임 2년 전부터 李基俊 당시 모교 총장께서 먼저 제의를 해왔습니다. 캠퍼스 안에 동창회관을 지으면 동문과 재학생에게 효율적인 서비스를 할 수 있으니 총장공관 옆 부지를 할애해주겠다는 것이었죠.
 여러 차례 현장답사를 해보니 교수회관 부지가 전망도 좋고 녹지공간도 풍부하더군요. 당시 모교가 추진하려던 컨벤션센터 부지로 그 일대의 개발계획이 확정된 상태였고요. 그래서 5백석 이상 수용 가능한 컨벤션센터를 겸한 동창회관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안을 가지고 2003년 모교에 부지 할애를 요청했습니다."

 - 그런데 성사되지 못했죠.
 "2년 가까이 지난 뒤 모교 측으로부터 교수회관 할애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래의 마포 동창회관 자리에 보다 큰 규모의 회관을 건립, 임대수익금을 통한 모교 지원 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이곳을 심도 있게 검토해보니 도시계획상 마포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고, 영종도 공항으로 통하는 지하철역 부지로 확정된 곳이어서 캠퍼스 안에 짓는 것보다 오히려 여러 면에서 좋은 조건이었어요. 많은 동문들께서 교수회관 자리에 지었을 경우 운영상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텐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격려해주셔서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장학빌딩 건립계획을 추진하게 됐죠."

 - 장학빌딩 건립을 추진하는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재건축을 위한 첫번째 절차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았습니다. 아파트 재개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이미 재건축된 건물은 30년 이내엔 다시 재건축할 수 없다'는 법적 제한을 두게 되면서 재개발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계각층의 건축 관련기관을 찾아 해결책을 강구, 마침내 건설교통부로부터 "도심지에 위치한 상업 및 업무지역이 지역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고, 건물 사용면적을 극대화했을 경우 재건축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받아냄으로써 재건축 허가를 받게 됐죠.
 특히 지난해 6월말 건축허가를 받아냄으로써 7월 1일부터 시행된 개정세법에 의한 기반시설부담금 25억원을 절세하게 된 것도 건립 추진의 큰 활력소가 됐습니다."

 - 짧은 기간에 건립소요액 3백억원을 거의 모금하셨는데 캠페인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단순히 기금을 출연하는 기부 형식은 서울대인의 위상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동문과 재학생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미있는 모금방법을 찾던 중 장학기금 모금이란 방법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됐죠. 작은 돈이라도 전 동문이 동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하고, 많은 동문들이 형편껏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 거액을 출연할 동문을 물색하는 방법을 병행하기로 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모금 캠페인의 시작을 알린 것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 의결이 확정된 직후인 2005년 10월 홈커밍데이 겸 친목 등산대회 때였습니다. 많은 동문이 모인 그날 공식적으로 장학빌딩 건립안을 소개하고 동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습니다."

 - 10억원 이상 출연한 분이 15명에 이르는데, 모금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거액 출연자에 대한 예우와 혜택을 다른 기부단체나 장학재단과 차별화했습니다. 1천만원 또는 5천만원 이상을 출연하면 개인명의의 기금 또는 특지장학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출연금을 납부한 날부터 은행 금리 이상의 이자를 지급해서 개별장학금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많은 동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갔다고 생각합니다.
 또 개인장학회를 설립하려면 비용과 인력은 물론 운영비가 들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이를 감안할 때 장학빌딩 기금 출연을 통해 개인장학회를 만들면 추가비용이 필요없고 관리 또한 동창회에서 투명하게 한다는 사실이 많은 동문들의 동참을 결심하게 한 것 같습니다."

 - 각종 동창회 행사에 동문들의 참여가 늘어난 것도 林회장님의 노하우가 반영됐다고 보는데요.
 "처음엔 동창회 행사 참석자가 2백명도 안되고 동문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홈커밍데이 행사 때도 점심만 먹고 가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래서는 모교 사랑도 그렇고 동창회가 추진하려는 사업도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 직원이 비상체제에 들어가 참석 여부 확인을 여러 차례 하고, 단과대학별 좌석도 마련하고, 기념품을 배포하는 등 동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등산대회 때는 끝까지 남을 수 있도록 자동차를 경품으로 협찬하는 등 투자(?)를 한 결과 등산대회는 5천명 이상, 기타 행사는 7~8백명 이상 참석하고 있습니다."

 - 모금은 계속 해나갈 계획이신지.
 "건립모금액 3백억원은 거의 달성했습니다만, 실제 기금을 출연한 동문은 전체 30만명 중 1천5백명이 채 안됩니다. 장학빌딩 맨 윗층에 명예의 전당을 멋지게 꾸며 그 벽면에 기부자 이름을 새길 예정인데,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적다고 봅니다. 5만명 정도면 벽면이 가득 메워지는 데다 많은 사람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모래알 같다는 서울대인의 명예도 지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실천도 보여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금액의 다과에 관계없이 최소한 5만명 이상의 참여를 목표로 계속 모금을 독려할 작정입니다."

 - 장학빌딩의 기능은 어떻게 되는지요.
 "장학빌딩은 서울대인의 긍지와 위상에 걸맞는 만남의 장이 될 뿐만 아니라 모교를 세계 속의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지원센터 역할을 해나갈 겁니다. 또 동문과 재학생이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도 되리라 봅니다. 주변 일대에 공원이 조성되고 신공항철도가 회관 바로 옆 공덕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서울의 명소로도 크게 각광받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 임대수익금으로 모교 장학금 및 교수연구비를 지원한다는 계획인데, 수익창출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지금 추세로 볼 때 건축비의 13% 이상 임대수익이 나오면 그 중 은행금리 이상은 무조건 기금 및 특지장학금을 출연하신 동문의 기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분 통장에 입금해 별도 관리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추정할 때 매년 38억원 정도의 순수익이 예상됩니다.
 그렇게 되면 재학생 1천명에게 약 2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매년 2백50명에게 5억원을 지급하고 있는데 은행금리가 낮아 기금이 잠식되는 형편입니다. 나머지 18억원 정도는 교수 해외연수비와 연구지원 등에 쓰여지도록 할 예정입니다."






 - 시대에 맞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쓰일 것이라고 했는데,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
 "누가 봐도 서울대 동창회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상징성을 고려해서 문화공간도 갖춘 건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 특성상 접근성이 용이한 만큼 이벤트홀을 만들 계획입니다. 예식홀로 이용하고 음악홀로도 사용 가능하게 하면 모교 출신을 비롯한 신진 음악인들이 애용할 수 있을 테죠. 또 1층에 미술품 전시장을 마련, 미대 동문들이 활용하는 건물로서 지역 발전에도 보탬이 되리라 봅니다."

 - 그밖에 세부사항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됐나요.
 "건립위원회에서 건축․토목․설비를 전공하고 모교와 동창회에 대한 열의를 지닌 위원들로 소위원회를 구성, 세부사항을 차근차근 정하고 점검하도록 하려 합니다. 2010년 말 완공을 목표로 3년간의 건립기간이 있는 만큼 경우에 따라 최선의 방안을 적용할 생각입니다."

 -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셨는데 학창시절 추억담을 들려주신다면.
 "1946년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광복 직후 좌우익 사상 투쟁에 이은 6․25전쟁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시기였어요. 저는 다행히 부산에서 미8군 사령부 직할부대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공부를 계속, 정상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음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건설업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대학 졸업 후 고향인 청주의 공업고등학교에서 2년간 교사로 봉직했고, 서울 수복 뒤엔 교통부 공정국 기계과에서 ICA 원조자금으로 철도공작창 기계복구사업을 담당하기도 했죠. 외국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중 1957년 부친이 작고하시는 바람에 부득이 선친이 경영하시던 임광토건을 맡게 됐죠. 스물아홉살 때였어요. 지금은 큰아들이 운영하니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셈이고요."

 - 어떤 스타일의 사업가이신가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29살 때 선친의 회사를 물려받아 50년간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맡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직접 총괄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점검을 해야 했습니다. 막상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선친과 함께 20~30년동안 일했던 분들이 제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니 더더욱 결재에서부터 자재구입까지 꼼꼼히 체크해야겠다고 판단하게 됐습니다. 그런 습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죠."

 - 그런 점에서 임직원들이 힘들어하지는 않나요.
 "마음에 안 들 때도 있겠죠. 그러나 저희 회사가 경쟁력을 가지고 현재까지 건실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철저하게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챙긴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습니다. IMF 때도 그랬죠. 제가 신년교례회 때마다 전 임직원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정하지 말고, 부실공사 하지 말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맡은 일을 능력껏 하면 회사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어려움은 있었으나 한번도 부실공사를 했다거나 부도를 냈다거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수많은 공사를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사를 소개해주신다면.
 "지금은 아파트 건설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원래 전공은 토목이에요. 토목건설 분야에서는 10위권을 유지하고, 특히 항만공사 부문에서는 2~4위를 달렸지요. 인천항 화물부두 건설로 10만톤급 화물 전용선이 동시에 접안 가능한 부두공사를 비롯, 방파제, 매립지 호안공사 등 항만기반 시설공사를 맡아 함으로써 오늘의 인천 항만의 기반을 구축한데 대하여 남다른 긍지를 갖지요. 또한 동해의 태산만한 성난 파도를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축조한 북평항만 공사가 눈에 선하군요.
 또 수도권의 상수원지인 팔당호의 수질오염 방지를 위하여 신공법인 철강재우물통 거치공법을 개발하여 수질오염 없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된 제일 넓은 호반 위에 2,180m의 당시 국내 최장대교량인 양수대교를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높이가 53m나 되는 연륙교인 거제대교를 급속한 해류를 물리치고 시공, 완성시킨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고속전철 건설 때는 조치원에서 대전까지 연결되는 구간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공사가 끝날 때마다 정부로부터 당해년도 최우수시공 건설업체로 선정되어 건설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여러 차례 받곤 했지요."

 - 다른 단체활동도 다양하게 하신 것으로 아는데.
 "1976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항만청이 개청되면서 (사)한국항만협회가 창립됐어요. 제가 초대 회장을 맡은 뒤 다섯 차례 연임하며 한국항만 발전에 기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고향 충북과 서울의 가교 역할 및 재경 충북인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는 (사)충북협회 회장을 21년간 맡았습니다. 일곱 번 연임한 셈이죠. 고향 발전은 물론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어요. 하숙비가 없어 휴학하는 충북 출신 학생들을 위해 1989년 개포동에 충북학사를 사비로 건립했습니다."

 - 가족 소개를 해주시죠.
 "2남2녀를 뒀습니다. 큰아들이 임광그룹을 맡고, 작은아들은 대성공업과 그랜드CC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큰사위는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崔鍾璨(무역68­72)동문이고, 작은사위인 趙聖相(경제73­77)동문은 현재 미국에서 한국계 은행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1백세인 모친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난 5월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됐었는데 얼마나 강인한 분인지 지금은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 손자는 몇 명인지.
 "친손자 외손자 합해서 10명입니다. 두 딸은 아들 둘씩 낳았고, 큰아들은 아들 둘 딸 하나, 작은아들은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뒀습니다. 아내가 38년 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 것 외엔 가족 모두 건강하게 제 길을 잘 가고 있어 저 자신 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특별히 건강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있다면. 또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시는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워낙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단거리 선수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유도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에 취미가 있었어요. 대학 땐 아령, 역기, 평행봉 등을 했죠. 40대 때부터는 나만의 요가법을 개발해 매일 새벽 1시간 반 내지 2시간 정도 요가를 합니다. 때로 좋은 친구들과 담소나 골프를 즐기기도 하고요.
 살다보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죠. 저는 일일신신(日日新新)의 초고속 정보화시대에 대응키 위해 국내외 최신 간행물을 되도록 자주 봅니다. 역사책이나 역사소설도 많이 읽고요. 역사는 항상 되풀이되니까요. 사리 판단에 큰 도움을 받고 그 덕에 스트레스가 없어지곤 하죠."

 - 평소 신념이나 좌우명은 무엇이며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먼저 건강하십시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다 잃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건강이 없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실력을 기르고 닦으십시오. 꾸준한 공부와 연찬을 통해 지적 소양과 견식을 넓고 깊게 하세요. 실력이 없으면 그 사람은 있으나 마나 하니까요. 아울러 사회봉사와 여행, 독서를 통해 상상력과 창의, 그리고 인간적 감성의 세계를 넓히십시오.
 그리고 명분을 중시하는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닦으십시오. 명분은 도의요 도덕이며, 원칙이자 순리입니다. 사회를 정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면 우선 지식인의 도덕적 원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 시공사로 임광토건이 선정됐는데, 어깨가 무거우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회의석상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당초 일반 공개경쟁 입찰을 할 작정이었지 제가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사회에서 건물의 건축시공 경험이 많은 洪性大부회장 겸 관악회 상임이사 등 여러 분께서 부실공사를 방지하자면 저희 회사가 시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해 고심 끝에 수락하게 된 것이죠.
 회장 취임 시 약속한 사업이고, 50년 건설 경험에 부실공사를 하지 않고 잘 짓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또 설계 예가(4백3억원)가 당초 모금 목표액(3백억원)보다 많이 나오고 출연금 약정이 대부분 5년간 분할납부 방식이어서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다른 업체에게 맡겼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회장인 제가 맡는다면 손익에 구애받지 않고 동창회 사정에 맞춰 명예를 걸고 지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회장단, 상임이사회와 관악회 이사회 연석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맡겨주셨습니다. 제가 회장인 만큼 모든 문제에 대한 무한책임 아래 기필코 30만 동문들께서 진정 자랑스러워하고 1백~2백년이 지나도 건재할 훌륭한 장학빌딩을 짓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사진 = 본보 李五峰논설위원․정리 = 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