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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호 2007년 6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은반 위의 탱크



세계피겨선수권 이틀 전 김연아는 극심한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이번 대회를 포기하자고 했다. 가슴은 무너졌지만, 어머니로서 딸의 미래를 위한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딸은 그럴 수 없었다.
영광의 2006년은 저물었다. 세계주니어 선수권 우승. 성인무대 첫 해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석권했다. 허리부상을 참고 이룬 쾌거였다. 화려한 드레스 밖으로 인대 강화 테이프가 너덜너덜하게 나풀거리며 펼친 투혼의 연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2007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지난 1월 충격적인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은 뒤 김연아는 모든 국내 대회, 동계아시안게임까지 포기해야 했고, 캐나다 전지훈련에서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여기에 훈련 도중 넘어지며 엉덩이 꼬리뼈까지 다쳤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2분짜리 쇼트프로그램, 4분이 넘는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화할 수가 없었다. 부분 기술만 떼어서 훈련해야 했다.
최대 이벤트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경기 이틀 전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그래서 어머니는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리하다가 더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아는 출전을 강행했다. 어머니는 딸의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지난 3월 23일 밤 8시.
영화 `물랑루즈'의 주제곡 `록산느의 탱고'가 도쿄체육관 빙상장에 흐르는 순간 어머니는 조용히 관중석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경기장 밖으로 광란에 가까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7세 소녀는 신들린 무희처럼 관중들, 아니 세계 피겨 팬들을 매료시켰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71.95점. 세계 여자 피겨 싱글 쇼트프로그램 사상 최고 점수를 받는 일대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경기장 밖까지 울려 퍼지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함성을 들으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소녀는 자신의 점수를 확인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취재구역으로 김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담담했다. "허리가 좀 아팠지만, 견딜만했어요. 내일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잘 될 것 같아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김연아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다리에 힘이 없다. 허리통증도 여전하다. 훈련부족으로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주위에서 진통제를 권했지만 김연아는 거절했다. 지난 그랑프리 대회에서 진통제를 맞고 뛴 적이 있다. 통증은 못 느꼈지만, 몸이 나른해져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진통제는 통증뿐 아니라 정신력까지 누그러뜨렸다. 그래서 김연아는 애써 통증을 참기로 했다.
이튿날 프리스케이팅 연기 직전 다리에 근육강화 침을 맞았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력으로 버텼다. 주제곡 `종달새의 비상'에 맞춰 연기를 시작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2분이 흐르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직 3회전 점프가 3번이나 남아 있다. 힘차게 얼음 위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두 번이나 넘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쇼트프로그램의 선전으로 동메달, 한국 피겨사상 세계선수권 첫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뤄냈다. 취재구역으로 김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담담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아쉽진 않아요. 이 정도면 만족해"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을 때도, 두 번이나 넘어지며 최악의 점수를 받았을 때도 김연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17살 사춘기 소녀는 강했다. 김연아의 눈빛에는 상대를 빨아들이는 강렬함이 담겨있다. 소녀답지 않은 이런 강렬함이 계속된 시련을 넘어선 것이다. 그녀가 만든 기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대회직후 허리는 다행히 거의 완치됐다고 한다. 김연아는 얼마 전 다시 캐나다로 떠났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프로그램 주제곡과 연기를 모두 새로 바꿀 계획이다. 지난 1년간 영광을 함께 했던 `록산느의 탱고'와 `종달새의 비상'을 추억 속에 묻어 두고 새롭게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꾸며….
얼마 전 `파트너일까, 라이벌일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로 다른 것 같은 남녀 저명인사를 짝지어 공통점을 분석한 책이다. 그렇다면 김연아의 파트너(?) 혹은 라이벌(?)은 누구일까? 탱크라 불리는 사나이 최경주를 꼽고 싶다. 김연아의 눈빛과 최경주의 눈빛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김연아를 `은반 위의 탱크'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