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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호 2007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李漢彬․崔禎鎬동문간 오고간 편지 출간




화가를 이야기하고 국궁을 인문학적 맥락에서 고찰하던 모교 환경대학원 金炯國(사회60­64)교수가 이번엔 모교 선배의 왕복 서신을 엮어냈다.
李漢彬(영문54졸)前부총리가 1960년대 주스위스 대사로 재직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崔禎鎬(철학52­57)울산대 석좌교수와 주고받은 편지 52통을 엮은 `같은 내일을 그리던 어제'(시그마프레스刊).
해외서는 괴테-실러, 알랭 푸르니에-자크 리비에르, 피들러-힐데브란트의 왕복서한집 등 뜻 있는 편지왕래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우리의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현대사속 인물의 왕복서한집은 이 책이 유일하다.
그런데 어떻게 편지 주인공이 아닌 金炯國교수가 이 일을 하게 됐을까?
"두 분이 모두 스승이십니다. 李漢彬선생님은 학교에서 만난 스승이고 崔禎鎬선생님은 마음에서 만나 사숙한 스승입니다. 李선생님 밑에서 조교생활을 하며 한국미래학회 일을 도왔는데 그때 崔禎鎬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 오다가 李漢彬선생님 추모 3주기를 맞아 두 분의 왕래편지를 엮게 됐죠. 두 분이 서로의 편지를 정성스럽게 간직해 오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우연히도 金교수는 李漢彬?崔禎鎬동문에 이어 한국미래학회 3대 회장을 지냈다.

그림?음악?국궁에 탁월한 식견

이 편지들의 내용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면 책 발간이 큰 의미가 없었을 텐데 1960년대 한국의 사회 모습과 국제 정세 등을 엿볼 수 있는 서한들이라 가치가 있다. 아울러 우리 도서 시장에 이러한 책이 거의 전무한 점도 한결 값짐을 더해준다.
金炯國교수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지만 국궁에도 일가견이 있다. 지난 2004년 출간한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 국궁(효형출판刊)'은 `활쏘기의 사회문화사를 종합적으로 짚어낸 최초의 책'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金동문은 김경원 사범지도로 2003년 봄 황학정에서 入射했다.
""교직생활 내내 마땅한 소일거리를 못 갖다가 갑년에 즈음해 문득 정년퇴직 후의 일상이 무료할 것 같아 활을 잡았습니다. 활쏘기는 예로부터 궁도라 해서 인간수양의 방편이라 했지만, 습사의 연조가 낮은 탓인지 아직 도의 경지 문턱에도 가지 못했죠. 다만 활쏘기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무아지경에 들 수 있음은 실감합니다."
耳順에 활시위를 당기는 게 쉬울리 없었다. 팔꿈치의 힘으로 제대로 조절하지 않아서 팔뚝도 여러 번 시위에 맞았다. 한 巡에 다섯 발씩 모두 맞으면 `몰기'라 하고 그때부터 그 사람을 `접장'이라 한다. 접장이 되는 데 1년이 걸렸다.
요즘도 매일 활을 쏜다는 金동문은 "활은 골프와 마찬가지로 멘털게임이라 컨디션과 마음가짐에 따라 기복이 심한 운동"이라며 "올해는 작년만큼 잘 맞지 않는다"고 웃었다.
골프도 등산도 아닌 국궁을 취미로 삼은 것은 金동문의 예술취향 계발과도 관계가 깊다. 어린시절부터 고전음악에 취해 고향 마산에서 잘 들리는 일본 후쿠오카 송출 아침시간 대의 음악방송을 줄곧 즐겼고 대학에서는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문고판 화집을 구하고 틈나는 대로 미술관을 드나들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작가로 이어져 張旭鎭선생 전기까지 집필(장욱진 : 모더니스트 민화장, 열화당刊)하게 된다.
"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은 문리대의 영향이 컸다고 봐요. 문리대는 단연 전인적 교양을 강조하는 교풍이었습니다. 文史哲의 학습과 자유학예(liberal arts)을 중시했죠. 이것은 동양에서 옛 성인들이 기대했던 소양과 다름이 없죠. `詩?書?畵'의 자질 말입니다. 또 六藝라 하여, 특히 남자의 덕행 함양에 요긴한 여섯 덕목을 강조했는데 예절?음률?활쏘기?말타기?글읽기?셈하기의 `禮樂射御書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음악, 국궁, 그림, 글에 대한 관심은 인문학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金교수는 이번 학기를 끝으로 30년 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한다. 교직에 몸담으며 金교수가 쌓은 업적은 많다.
학과장 시절 박사과정을 신설하고 원장을 맡았을 때는 교수인원을 늘려 환경대학원의 위상을 강화했다. 좋은 위치에 멋진 단독 건물도 확보해 오랜 셋방살이를 청산했다. 대외적으로는 도시빈민사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달동네 주민들의 주거문제를 공론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토지문화관 건축위원장을 맡아 땅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던 朴景利씨의 집을 문화재로 지정 받고, 한국토지공사의 도움을 받아 `토지문화관'을 짓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金교수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여러 명망가들의 碑文을 써준 일.
"비문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 주인공들을 대소간에 후세가 기억할 수 있게 해야겠다 싶기도 했지만 사람의 글이 古碑를 통해 오래 전해진다는 사실 때문에 어줍잖아도 내 글도 그렇게 남겠다 싶어 전심전력으로 해 왔죠."

올해 정년 "碑文 써준 게 보람"

선친의 비문을 직접 지은 이후 張旭鎭 탑비와 생가비, 모교 權重輝 前총장 묘비, 李漢彬교수의 행적기념비, 보해양조 林廣幸 前회장?운산그룹 이용구 前회장의 묘비와 공덕비 등이 그가 지금까지 지은 비문이다.
퇴임 후 계획에 대해 묻자, 닥쳐봐야 알겠다며 단지 지금은 환경대학원에서 정년을 맞이한 일이 기쁠 따름이라고.
"일찍이 마음에 두었던 보람의 일자리에서 정년을 맞이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召命의 기회에 나아가 전통시대의 미덕이던 一生一業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기 때문이죠." <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