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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호 2007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30여 년 공직생활 마치고 장학.복지사업에 헌신

롯데 복지․장학재단 盧 信 永이사장


"제 바로 뒤에 있는 사진 속에 시계가 보이죠? 인디라 간디 인도수상과 작별인사를 나눌 때입니다. 73년 인도와 국교수립을 맺은 후 인도대사에서 외무부 차관으로 승진돼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진 마지막 면담이었습니다. 그때가 오후 4시 30분이었는데, 정말 좋은 날이었어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간디 수상이 저에게 `두 나라가 같이 독립했는데 한국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발전하게 됐는지 참 부럽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모교 법대 졸업 후 고등고시에 합격, 외무부 장관.안기부장.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盧信永(법학50­54)롯데 복지.장학재단 이사장. 한?인 국교수립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는 盧이사장은 훤칠한 키에 걸맞지 않은 부드러운 인상과 정겨운 말투로 3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소개하며 公人이 갖춰야할 자세 그리고 퇴임 후의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 32년간 공직생활을 하셨는데, 재단사업을 맡으면서 전과 달라진 점은 무엇입니까.
"외무부 시절부터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사생활이라는 게 없었죠. 집사람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저는 일에만 전심전력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근무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재단 일을 하면서부터는 모든 면에서 여유가 생겨 복지와 장학사업을 동시에 해도 힘든 점보단 보람이 큽니다."

- 83년 롯데장학재단, 94년 롯데복지재단이 설립된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온 것으로 압니다.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롯데재단은 기금의 90%이상을 장학과 복지사업에 사용하기 때문에 투명한 운영을 자랑합니다. 장학재단에서는 전국의 초?중?고?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복지재단에서는 외국인근로자를 비롯해 불우한 이웃과 복지시설을 돕고 있습니다."

- 올해 계획중인 사업은.
"장학사업 중 하나로 조선일보와 함께 도서보급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16개 학교에 1만6천권의 도서를 지급할 예정이며, 해외에 있는 중국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한 한국국제학교에도 도서를 보급할 계획입니다. 올해 복지재단에서는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무료진료소와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시설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찾아갈 생각입니다."

- 복지재단에서 일차적으로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지원을 많이 하고 있군요.
"재단이 설립되기 전 金壽煥추기경께서 어느 날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들어온 필리핀 근로자들과 중국의 조선족들이 회사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도울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는 꼭 1주일 뒤에 辛格浩회장께서도 많은 외국인근로자들이 서러움을 받고 고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데, 기금을 출연할 테니 함께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이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돕겠다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 이사장까지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직접 출연한 사람이 재단을 운영할 수 없게 돼 있어 제가 대신 맡게 된거죠."


- 개인 또는 단체에서의 기부활동과 사회환원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과거의 기부활동은 사회 특권층의 의무와 권리로 간주돼 왔으나 최근에는 사회전체가 참여하는 바람직한 문화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기업과 개인의 기부활동이 단순히 소비적인 `부의 배분'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기부를 통해 풍요로운 사회문화를 조성해 제2?제3의 생산적 기부를 낳아야된다고 봐요. 이러한 생산적인 기부문화가 우리사회에 뿌리내릴 때 보다 선진화된 사회로 진일보하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기부에 대해 좀 인색한 편이죠.
"오랫동안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지난 5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죠. 해외공관에서 근무할 때 국외로 입양되는 한국 고아들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국력이 신장해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그에 따라 점차 오르고 있으니 이러한 문제도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 `어떤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완수하는 인물'로 통하시는데.
"그러한 기질과 성격은 모두 선친(盧昌烈옹)으로부터 물려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친께서는 부지런함과 검소한 생활 그리고 저축으로 제가 태어날 무렵 자수성가해서 가족이 먹고 살만큼의 땅을 가진 지주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꼭 무언가를 하고 계셨던 분이셨어요. 편지를 받으면 누가 문을 두드린다 생각하고 꼭 답장을 쓰라고 하셨고, 남보다 한시간씩 더 노력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일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자세로 임했으며, 남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지어준 게 아닌가 싶은데요."

- 父性愛가 남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매일 일기를 쓰도록 해 주말마다 검토하시곤 했어요. 한번은 여름철 저녁 무렵이었을 거예요. 모깃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있는데 갑자기 `신영아, 밥을 먹을 때는 검은 개가 지나가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뭐라도 던져 주는 게 사람의 도리다'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가 단신으로 월남했기 때문에 선친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 임진각에 위치한 망배단에 가서 예를 갖추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하는데, 사실 이 망배단은 86년 국무총리 시절 제가 건의해서 만들었습니다."

- 좌우명도 선친께서 지어주셨나요.
"저 뒤에 있는 액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를 위해 적어주신 겁니다. `人必自侮而後人侮之, 家必自毁而後人毁之, 國必自伐而後人伐之'. 즉, 사람은 자기가 모욕당할 만한 일을 한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집안은 스스로 훼손당할 일을 한 뒤에 남으로부터 손괴를 당하며, 나라도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후에 타국으로부터 침범을 당한다라는 뜻이죠."

- 이사장님 세대야말로 국익을 제1의 목표로 삼고 활동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나는 선후배를 소개해주신다면.
"관직에 갓 들어가서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崔圭夏?金東祚?金溶植 前외무부 장관을 존경했고, 이분들로부터 官學을 배웠습니다. 바로 윗선배로는 李源京 前장관과 金永周 前차관이 있고요. 후배들 중에 潘基文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孔魯明 前장관, 李祺周 前차관, 崔東鎭 前주영국 대사는 제가 직접 발탁한 인재들이죠."

- 요즘 학자들 가운데 정치계로 가는 분들도 계신데, 관직의 한 사람으로서 公人이 가장 중요하게 갖춰야할 점은 무엇일까요.
"일단 관직을 맡게 되면 능력에 따라 계급이 올라가기 때문에 다시 내려오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세대는 오직 National Interest, 즉 국익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특히 대외업무를 마치고 중앙청사로 돌아올 때 나를 향해서 정성껏 경례를 하는 수위아저씨들을 보면서 `이분들은 내가 국가를 위해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예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이분들을 배반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고,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늘 합니다."



- 27년간의 외무부 생활 중 가장 보람됐던 일을 소개해주신다면.
"인도와 국교수립을 맺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제 역량을 다해서 일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은 60년대 인도와의 교역량도 미미하고 교민수가 많지 않은데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거기에다 남북 동시 국교수립을 반대하던 북한과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었고요. 그래서 한?인친선협회를 결성하기 위해 1년간 인도의 행정부와 의회, 언론계 및 실업계의 많은 인사들과 친교를 맺으며 한국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나깨나 인도와 하루빨리 외교관계를 수립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일했죠. 62년 뉴델리에 총영사관이 설치된 후 11년만인 73년 인도와 국교를 맺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가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왜곡사건이 그때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시정하고 반일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克日에 포커스를 맞춰야겠다고 판단하고 국민의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열심히 모금하러 다니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 87년 8월 15일 개관하게 됐죠."

- 85년 국무총리로 임명돼셨는데, 그 당시 사건도 많았죠.
"지금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건 故 朴鍾哲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저 역시 단순사고로만 알고 있다가 며칠 뒤 일간지를 통해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놀랬습니다. 朴군 장례식 때 아버지가 울면서 `종철아, 잘 가거라'하시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고 지금도 그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 공직생활을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는데, 모교에서 강의제의를 받는다면.
"97년부터 2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통상과 지역협력 등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기력이 남아 있으니까 괜찮았지 지금은 잘 알던 사람 이름도 생각이 안 날 정도가 됐으니 재단활동 이외에는 일체 맡고 있지 않습니다."

- 살면서 좋은 일이 있으면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인데요. 회한은 없으세요.
"지금에 와서야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공직생활을 하라면 다시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삶을 살았어도 부지런하게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공직으로 가지 않았다면 역사학과 교수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 길을 갔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웃음). 그런데 당시 주변에서 장래가 보장되는 분야에 갈 것을 권유하는 바람에 법대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학기 중 6?25전쟁이 나면서 3년간 군복무 생활을 하게 됐는데, 사법관보다는 행정관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부산에서 고등고시 행정과3부에 응시해 합격하게 됐죠."
- 가족 소개를 해주시죠. 장남이 서울대 교수인 것으로 아는데.
"3남2녀를 뒀고, 장남인 慶秀는 현재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慶秀가 하버드?예일?스탠포드대에 동시 합격했는데, 제가 하버드대에 갈 것을 권유해 해외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스탠포드대에서 강의도 했죠. 둘째는 스탠포드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경영대학원에 들어갔으며, 작은딸은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에서 각각 학위를 받았으니 세 대학과는 모두 인연을 맺은 셈이죠."

- 자녀들과는 자주 모이는 편이세요.
"제 원칙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녀들의 일과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아버지로서 열심히 지도하자는 주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자기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겼는데, 아이들이 다 잘 자라줬다고 봐요. 바쁜 공직생활 중에도 유학 가 있는 자녀를 대신해 손녀를 길러주는 등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생활했죠. 지금도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다같이 모이는 편이죠."

-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시는지.
"특별한 건강비결은 없습니다. 공직시절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생활하는 게 곧 건강을 유지하는 일이었다고 봐요. 요즘에는 사무실 옆에 있는 헬스클럽에 다니고 있습니다."

- 모교인 서울대가 세계대학으로 가기 위해 국제경쟁력 면에서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선진대학이 될 수 있나요. 지난 반세기동안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서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며, 이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벽돌을 쌓듯이 체계적으로 기반을 닦아 올라간다면 머지않아 세계 명문대학으로 우뚝 서리라 확신합니다."

-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군요. 저는 지금도 매달 7~8권의 책을 읽습니다. 현재는 영국의 사학자인 Gibbon이 쓴 `로마제국흥망사' 일본어 문고판 총 10권 가운데 9권째를 읽고 있어요."

-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故 千寬宇선생을 예로 들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사학계 거목에서 신군부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통일관련 기관의 장을 맡게 돼 한순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엇갈린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자면, 李光洙선생이 당시 친일을 했다고 칩시다. 잘못된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문학자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잘못한 부분을 전체로 놓고 이를 확대해석함으로써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그만의 문학적인 기여도를 무시하고 평가하는 것 역시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崔南善선생도 친일파로 비판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부분은 감춰서는 안되겠지만,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큼 인정해주고 대접해주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올바른 가치관이 아닐런지요."

-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떻게 보십니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96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이후 중국 외무장관을 역임한 黃華씨가 저에게 천안문 중턱에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어보더군요. 내용인즉,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화혁명 때문에 30년을 후퇴하게 됐고, 1천만에 가까운 엘리트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의 잘못은 - 30이지만 세운 공은 +70이기 때문에 화폐와 천안문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더군요.
또 가까운 일본을 봅시다. 메이지유신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이코 다카모리는 신분을 잃어버린 사무라이들과 함께 정부에 대항해 세이난전쟁을 일으켜 역적 중에 역적으로 몰렸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내전 주동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훌륭한 지도자로 더 높이 평가하며 동상까지 세워줬습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 사람을 평가할 때 좋은 점은 본받고, 반대로 잘못된 점은 되짚어보면서 우리 후손들에게 교훈을 심어주는 것이 국민으로서 가져야할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 盧信永이사장 약력

△30년 평남 강서 출생 △강서 덕흥공립국민학교?평양 제2공립중학교 졸업 후 단신 월남 △서울대 법대 재학 중 6.25전쟁으로 3년간 군복무 △군복무 중 고등고시 행정과3부(외교) 합격 △54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55년 미 켄터키주립대 석사학위 △55년 외무부 입부 △주LA?주뉴델리 총영사, 주인도.주제네바 대표부 대사 역임 △18대 외무부 장관.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18대 국무총리 역임
〈사진 = 본보 李五峰논설위원.정리 = 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