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호 2007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30여 년 공직생활 마치고 장학.복지사업에 헌신
롯데 복지․장학재단 盧 信 永이사장
| |||
- 32년간 공직생활을 하셨는데, 재단사업을 맡으면서 전과 달라진 점은 무엇입니까. "외무부 시절부터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사생활이라는 게 없었죠. 집사람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저는 일에만 전심전력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근무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재단 일을 하면서부터는 모든 면에서 여유가 생겨 복지와 장학사업을 동시에 해도 힘든 점보단 보람이 큽니다." - 83년 롯데장학재단, 94년 롯데복지재단이 설립된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온 것으로 압니다.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 올해 계획중인 사업은. - 복지재단에서 일차적으로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지원을 많이 하고 있군요. | |||
![]() | |||
- 개인 또는 단체에서의 기부활동과 사회환원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과거의 기부활동은 사회 특권층의 의무와 권리로 간주돼 왔으나 최근에는 사회전체가 참여하는 바람직한 문화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기업과 개인의 기부활동이 단순히 소비적인 `부의 배분'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기부를 통해 풍요로운 사회문화를 조성해 제2?제3의 생산적 기부를 낳아야된다고 봐요. 이러한 생산적인 기부문화가 우리사회에 뿌리내릴 때 보다 선진화된 사회로 진일보하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기부에 대해 좀 인색한 편이죠. - `어떤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완수하는 인물'로 통하시는데. - 父性愛가 남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 좌우명도 선친께서 지어주셨나요. - 이사장님 세대야말로 국익을 제1의 목표로 삼고 활동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나는 선후배를 소개해주신다면. - 요즘 학자들 가운데 정치계로 가는 분들도 계신데, 관직의 한 사람으로서 公人이 가장 중요하게 갖춰야할 점은 무엇일까요. | |||
![]() | |||
![]() | |||
- 27년간의 외무부 생활 중 가장 보람됐던 일을 소개해주신다면. "인도와 국교수립을 맺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제 역량을 다해서 일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은 60년대 인도와의 교역량도 미미하고 교민수가 많지 않은데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거기에다 남북 동시 국교수립을 반대하던 북한과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었고요. 그래서 한?인친선협회를 결성하기 위해 1년간 인도의 행정부와 의회, 언론계 및 실업계의 많은 인사들과 친교를 맺으며 한국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나깨나 인도와 하루빨리 외교관계를 수립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일했죠. 62년 뉴델리에 총영사관이 설치된 후 11년만인 73년 인도와 국교를 맺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가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왜곡사건이 그때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시정하고 반일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克日에 포커스를 맞춰야겠다고 판단하고 국민의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열심히 모금하러 다니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 87년 8월 15일 개관하게 됐죠." - 85년 국무총리로 임명돼셨는데, 그 당시 사건도 많았죠. | |||
![]() | - 공직생활을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는데, 모교에서 강의제의를 받는다면. "97년부터 2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통상과 지역협력 등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기력이 남아 있으니까 괜찮았지 지금은 잘 알던 사람 이름도 생각이 안 날 정도가 됐으니 재단활동 이외에는 일체 맡고 있지 않습니다." - 살면서 좋은 일이 있으면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인데요. 회한은 없으세요. | ||
학기 중 6?25전쟁이 나면서 3년간 군복무 생활을 하게 됐는데, 사법관보다는 행정관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부산에서 고등고시 행정과3부에 응시해 합격하게 됐죠." - 가족 소개를 해주시죠. 장남이 서울대 교수인 것으로 아는데. "3남2녀를 뒀고, 장남인 慶秀는 현재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慶秀가 하버드?예일?스탠포드대에 동시 합격했는데, 제가 하버드대에 갈 것을 권유해 해외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스탠포드대에서 강의도 했죠. 둘째는 스탠포드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경영대학원에 들어갔으며, 작은딸은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에서 각각 학위를 받았으니 세 대학과는 모두 인연을 맺은 셈이죠." | |||
![]() | |||
- 자녀들과는 자주 모이는 편이세요. "제 원칙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녀들의 일과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아버지로서 열심히 지도하자는 주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자기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겼는데, 아이들이 다 잘 자라줬다고 봐요. 바쁜 공직생활 중에도 유학 가 있는 자녀를 대신해 손녀를 길러주는 등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생활했죠. 지금도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다같이 모이는 편이죠." -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시는지. - 모교인 서울대가 세계대학으로 가기 위해 국제경쟁력 면에서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故 千寬宇선생을 예로 들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사학계 거목에서 신군부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통일관련 기관의 장을 맡게 돼 한순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엇갈린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떻게 보십니까.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 盧信永이사장 약력 △30년 평남 강서 출생 △강서 덕흥공립국민학교?평양 제2공립중학교 졸업 후 단신 월남 △서울대 법대 재학 중 6.25전쟁으로 3년간 군복무 △군복무 중 고등고시 행정과3부(외교) 합격 △54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55년 미 켄터키주립대 석사학위 △55년 외무부 입부 △주LA?주뉴델리 총영사, 주인도.주제네바 대표부 대사 역임 △18대 외무부 장관.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18대 국무총리 역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