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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호 2007년 5월] 문화 꽁트

벽창호(碧昌牛)


인물이 그중 뛰어난 위에 성품 또한 서글서글해 살아생전 선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둘째 여동생은 제 적성에 맞게 공대 출신의 경상도 총각한테 시집을 갔다. 결혼 첫해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사업에 뛰어들어 억척을 떨더니 나이 50에 벌써 성공한 실업가소리를 듣게 컸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업을 벌려놨던 탓에 외동딸을 시집보낸 그 해에 불어닥친 IMF풍파에 어이없게 부도를 내고는 그 길로 부부가 함께 중국으로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서울 어딘가에 남아 살고 있을 조카딸이 궁금하긴 했어도 나 또한 일을 접고 그 사이 두 번이나 이사를 하는 통에 그 후로 소식이 끊긴 채 훌쩍 7년이 지났다.
지방엘 다녀올 일이 생겨 집을 나서는 참에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뜻밖에도 둘째다. 음성이 밝다. 국내에 처리할 일이 생겨 어머니도 뵐 겸 어제 귀국했단다. 잘하면 내일쯤 짬을 낼 수 있겠다는 목소리가 가볍게 들떠 있다. 타고 올 버스와 내릴 정류장 이름을 일러준 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이 늦어 어두워서야 돌아오게 됐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비보호 신호등이 설치돼있는 아파트 앞 큰길에서 대충 좌우를 살핀 다음 좌회전해 입구로 들어섰다. 헌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 입구를 막 지나려는 참에 횡단선의 반대편 출구차선에 가로로 서있던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후진하면서 내 차를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게 아닌가! 왼쪽 어깨 너머로 그 차의 후미 등이 보인 건 순간적이었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며 경적을 울려보았지만 막무가내, 그대로 달려들어 내 차를 들이받고서야 멈춰 선다. 놀라 내려보니 운전석 문의 앞쪽이 볼썽사납게 찌그러져 들어갔다. 고약하고 황당해 정신이 다 멍했다.
차 문을 열고 나온 상대방 운전자가 내 옆으로 더덜뭇 다가오더니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느냐 공손하게 묻는다. 요즘 젊은이와는 달리 인사성이 밝다 싶어 물어주어 고맙다며 다친 데는 없노라 엉겁결에 답해줬다. 금세 젊은이의 허리가 곧게 펴진다.
다행이네, 괜히 떨었잖아.
중얼거리듯 혼잣소리를 내흘리며 선뜻 몸을 돌려 건너편 보도로 훌쩍 가버리고 만다. 담배를 꺼내 피워 물고 여유 있게 연기를 내뿜는다. 거리 쪽만 바라보며 내겐 눈도 주지 않는다. 잘못했다든가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괘씸했다. 따라가 그 앞에 다가서서 물었다. 어째서 그곳에서 유턴할 생각을 했느냐, 거기가 어디 유-턴하는 자리냐. 경적소리도 못 들었느냐고 재우쳐 다그쳐도 묵묵부답, 종내에는 다친 데가 없으면 그만이지 그깟 차 좀 찌그러진 것 가지고 점잖은 어른이 뭘 그리 역정을 내느냐고 오히려 볼을 불린다.
뒤 창문을 반쯤 내리고 사태를 관망하던 젊은 아낙이 차에서 내려 또박또박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늑자늑 내게로 걸어왔다. 젊은이의 누이라고 신분을 밝힌다. 1백프로 잘못을 시인한다고 대신 사과를 하면서 바로 사고접수를 하겠단다. 자기 쪽에만 알려도 충분할거라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젊은이는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계속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표정하게 서서 수수방관한다.
뭐를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는 터에 젊은 사람과 다투는 것도 짜증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읽은 아낙이 차분하게 나를 달랜다. 보험회사에서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조금도 염려 마시라며 자기 핸드폰 번호를 적어준다. 어정쩡 쪽지를 받아든 채 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뒤는 여전히 찜찜했다. 조금 지나 핸드폰에 사고접수가 되었다는 문자 메시지가 떴다. K자동차보험의 사고담당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올라 있었다. 전화를 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전에 자세한 경위를 듣겠노라며 긴 통화를 꺼린다. 현장을 보면 알겠지만 아마 쌍방과실이 확실할거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여운이 묘했다. 시비가 분명한 일을 쌍방운운 하다니!
다시 걸었다. 마지못해 전화를 받는 담당자의 말하는 품이 영 경우에 어긋난다. 곱지게 자기 의견만 고집한다. 티격태격 언성을 높인 끝에 사고현장에서 만나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한 시간 뒤 아파트 입구에 나타난 젊은 K보험 담당자는 자초지종을 다 듣기도 전에 대뜸 입구로 진입하던 나에게도 주의운전 소홀의 책임이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잘못이 없다고 판단됐으면 왜 사고순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으름장이다.
납득이 안됐다. 비보호 좌회전이란 내가 가로지르려는 차선에 차가 없고 진입해 들어갈 진행차선에 사람과 차가 없는 것만 확인하면 됐지 어째서 반대차선에 서 있는 차까지 주의를 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 차가 불법 유턴이든 어떻든 턱에 걸려 진행을 못하고 후진할 것까지 예측을 해야 된다니! 그것도 운전해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판단해야 한다니 날보고 귀신이 되라는 말밖엔 더 되냐, 세상에 이런 횡포도 있나. 이게 보험사회의 생리인가.
"사진을 몇 장 찍더니 주의의무 소홀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겠거든 당신이 가입해 있는 D보험에 사고접수를 하고 잘잘못을 가리라며 그냥 자리를 뜨려고 한다. 당신이라니!"
"아니, 지금 날보고 당신이라고 했소? 정황이 뻔한 일을 갖고 아무리 설명해도 제고집만 부리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당신 벽창호야? "
"제기랄."
"? "
대뜸 나오는 담당자의 말이 예상 못하게 쌍스럽다.
"뭐라고?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왜요, 혼잣말도 못 합니까?"
어연번듯한 정장차림인건 둘째로 곱상한 얼굴과 무툴세게 내뱉는 말이 영 따로따로다.
"아니 애비뻘되는 사람한테…,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셨나."
"그건 알아 뭣하시려고, 나이가 많으면 답니까? 봉건적이거나 보수적이기 밖에 더합니까. "
전혀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다. 지난번 선거 후 더 뚜렷해진 사회현상이니 새삼스레 노소 갈등을 운위한들 나만 더 몰골이 말 아니게 될 것 같아 그만두고도 싶었지만 참기가 쉽질 않다.
"자네는 애비도 없나? "
"아버지요? 아버지는 왜요? 흥. "
뜻 모를 코웃음을 치고 나서 담당자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며 타고 온 차를 몰고 휭 하니 내빼버리고 만다. 젊은 아낙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은 내가 잘못인성 싶었다. 부랴부랴 D보험에 연락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서야 나는 나의 D보험 담당자와 사고현장에서 K보험측 담당자를 다시 만나 상황을 설명하며 시시비비를 가렸다.
"여기를 보쇼, 여기 이 아파트 입구에 어디 차를 돌리라는 표시가 있소? 그리고 어디 여기가 차를 돌릴 만큼 넓기를 합니까."
하지만 담당자는 표정이 없다.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어르신네가 법규정을 모르셔서 그렇게 일방적인 주장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아요."
K보험사 담당자의 얼굴은 확신에 차있다. D보험 담당자는 현장을 살피며 듣기만 했다.
"젊은이가 정말 벽창호네. 여-보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당신은 애비도 없소? 어제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가버린걸 보니까 없긴 없나본데, 도대체 당신 나이가 얼마요?"
K보험 담당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진다.
"나이타령 좀 고만하십쇼, 저절로 먹은 나이가 뭐 그리 자랑이십니까. 아버지는 왜 자꾸 들먹입니까?"
"이 사람이!"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멱살잡이라도 할 참으로 젊은이에게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애비가 있으면 옳고 그른 것을 배웠을 테고 정의가 뭔지도 알게 아닌가. 내게 유리하면 정의요 법이고, 내게 불리하면 안 지켜도 되는 악법이고, 자기에게 불이익이다 싶으면 이마에 붉은 띠를 매는 게 요즘 세상이라곤 하지만 명명백백한 사실을 왜곡하고도 당신이 옳다고?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따위로 억지를 부릴 수 있나!"
그때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내린 누이가 나를 부르며 허겁지겁 길을 건너온다.
"어마나 오빠, 여기서 이게 웬일이우? "
놀란 얼굴로 다가오다가 멱살 잡힌 담당자를 보더니 화들짝 더 놀란다.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
고개를 돌려 여동생을 바라본 젊은 K보험 담당자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태가 심상치를 않다. 손에 힘을 풀면서 동생에게 물었다.
" 누구냐, 아는 젊은이냐?"
"참 오빠두, 이 사람이 자영이 신랑이야, 하긴 결혼식 때 한 번 보고 7년이나 지났으니 모를 만도 하겠네. 그런데 이름도 서로 기억 못해? 참 너무들 했다.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사고처리로 만난 할아범이 벽창호라더니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