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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호 2007년 5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극단 학전 金敏基 대표

뮤지컬'지하철 1호선'3천회 돌파

金敏基(회화69-78)동문은 많은 이들에게 `살아서 신화가 되다시피 한 인물'로 불린다. 19세 때 작곡한 `아침이슬'을 비롯, `상록수', `친구' 등 수많은 노래들은 국민가요가 됐고, 그가 대본 연출 제작을 맡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원작자(폴커 루드비히)로부터 독일극보다 낫다는 평을 받으며 국내 뮤지컬 사상 최장수 공연을 기록하고 있다.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쑥스러워 하는 성격으로 인터뷰를 극구 마다하던 金동문을 평소 자주 들른다는 서울 대학로 `張' 레스토랑에서 만나 지나온 삶과 장차 계획에 대한 솔직하고도 담백한 얘기를 들었다.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세요.
`지하철 1호선'은 6개월마다 팀이 바뀌어요. 그 팀원들 연습시키는 게 가장 주된 일이지요. 사무적인 일도 많아요. 새 대본도 준비해야 하고.
- 지난 3월 독일에 가서 괴테메달을 받고 오셨지요. 상당히 영예스러운 상이죠.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상금은 얼마나 되나요.
상금은 없고 메달만 받았어요. 보여 드릴까요. 엽전처럼 생겼는데…(웃음). 괴테메달 말고 괴테상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상금이 있다고 해요. 메달은 독일 정부, 괴테상은 프랑크푸르트시가 주는 건데 프랑크푸르트시가 돈이 더 많아서 그렇대요. 그래도 상 받으니 좋고, 우리 부부 왕복 비행기표(비즈니스석)를 보내주고 좋은 호텔에서 숙식을 제공해서 잘 지내고 왔어요.
-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괴테메달을 받은 사람이 또 있나요.
70년대에 국립극장장을 지낸 徐恒錫씨가 받으셨고 뒤에 尹伊桑, 白南俊씨도 수상하셨어요.
- `지하철 1호선'(이하 지하철)은 지금까지 총 몇 회나 공연했나요. 배출한 배우도 엄청나죠.
3천3백60여 회 될 거예요. 거쳐간 사람은 2백명이 훨씬 넘고요. 설경구, 방은진, 조승우, 황정민씨 등도 `지하철' 출신이죠. 영화 쪽 말고 뮤지컬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요. 요즘엔 공연 대부분이 뮤지컬이잖아요. 대학로에서만 뮤지컬 몇 십 편이 올라가니까요. 주연급은 거의 다 `지하철' 출신이에요.
- `지하철' 출신 배우들과는 모임이 있나요.
다들 바빠서 만나기 힘들어요. 요즘엔 초등학교 아이들도 괜찮다 싶으면 메니지먼트 회사에서 관리해요. 일단 계약하면 개인적인 자유가 없어요. 그래도 지난 주말 괴테메달 수상 기념 파티엔 많이 왔어요.
- 6개월마다 새 팀을 구성한다고 했는데 신인은 어떻게 뽑나요. 어떤 사람들이 지원하는지요.
3차에 걸쳐 오디션을 봐요. 11명 뽑는데 3백명 정도 옵니다. 30대1의 경쟁률이죠. 1차는 노래실력, 2차는 연기와 몸 움직임, 3차 때는 앙상블을 봅니다. 2차까지는 실력을 보고 3차는 조합이 맞는 팀원을 뽑는 거죠. 지원자 중에는 7, 8수씩 하는 사람도 있어요. 1년에 두 번 뽑으니까 3~4년씩 매달리는 셈이죠. 연극영화과 출신이 가장 많고, 다음은 성악과 출신이에요. 음대 나와도 마땅히 할 게 없잖아요. 젊은 성악도들은 뮤지컬 쪽으로 많이 와요.
- 좋은 사람이 많이 오면 개중엔 뛰어난 사람도 있을 텐데, 문제는 대우겠지요.
`지하철' 공연을 시작할 때만 해도 뮤지컬이 본격화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대형 상업 뮤지컬이 많은데 그쪽에선 엄청난 개런티를 줘요. 영화에 투자하던 사람들이 뮤지컬에 투자한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가내수공업식 규모여서 출연료를 많이 줄 수 없죠. 좋은 배우들이 저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뮤지컬배우가 되려면 `지하철' 공연을 6개월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인 거죠.
- `지하철'은 상당한 성공작인데 재산은 좀 모으셨나요.
일산 호수마을에 아파트 한 채 있어요. 얼마인지도 몰라요. 처음 분양받은 거라 다른 재산은 없어요. 소득이라야 학전에서 받는 월급이 거의 전부고요. 제가 대표이긴 하지만 월급 받아요. 액수는 남들이 들으면 웃어요.(웃음)
- 댁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라고 하지는 않는지요. 저작권료도 있을 텐데요.
결혼할 때 수입이 한 푼도 없었어요. 그런 줄 알고 결혼했기 때문에…. 벌어오란다고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저작권료는 많지 않아요. 그나마 처음엔 학전 수입으로 다 넣었다가 지금은 30%만 학전으로 넣고 나머지는 판공비로 써요. 그래도 CF 찍으란 말은 안 하니깐.(웃음)
- 지금까지 작곡하신 게 전부 몇 곡이나 되나요.
93년에 CD 넉 장짜리 전집을 냈어요. 대략 40곡 정도. 97년 저작권협회에 가입했는데 얼마 전 정리하는 거 보니까 뮤지컬 곡까지 합쳐 1백곡 이상 되더군요.
- 지금 공연장으로 쓰는 학전이 두 군데죠. 구입한 건가요.
극단을 하면서 어떻게 건물을 사겠어요. 계산이 안 나오는 직종인데요. 임대해서 쓰는 거죠. 91년에 학전 블루, 96년에 그린을 오픈했어요. 영화는 한 번 찍으면 조조에서 심야까지 여러 극장에서 계속 상영할 수 있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은 한정된 공간에서 공연하는데다 매일 배우들이 직접 출연해야 하니까 돈을 벌 수가 없어요.
- 학전의 식구는 모두 얼마나 되나요.
월급을 주는 사람은 10명이고요. 6개월 단위로 출연하는 계약직이 50명 정도 됩니다. 함께 밥 먹는 사람이 60명 되는 셈이죠.
-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관에 자주 가신다던데 요즘도 그런가요.
재작년까지는 자주 갔죠. 예술인 창작실이 있거든요. 일종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인데, 4개월 정도 생활하면서 창작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원해주죠. 돈 낼 필요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정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작년엔 못 갔는데 올 여름엔 또 들어갈 계획입니다.
- 토지문화관이라면 朴景利선생님 개인 재산이 아닌가요.
토지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걸로 돼 있는데 기금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몇 해 전부터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문광부가 작가에게 숙식비를 대주는 것이죠. 예술인 입장에선 아주 필요하고 긴요한 프로그램입니다.
- 올 여름엔 그곳에서 무엇을 할 계획이세요.
아동극을 몇 편 준비해야 해요. 내년에 유럽 아동극 몇 편을 국내에 소개하려고요. 우리나라도 근래 아동문화 쪽에 의욕을 보이긴 하지만 앞섰던 작업 내지 모델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장애아와 왕따문제를 다뤄볼 예정이죠. `개똥이'도 다시 손질해야 할 테고요.
- 왕따나 장애아를 소재로 하는 건 중요한 작업이지만 일반인에게 어필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텐데요.
우리의 경우 아동문화 영역에 대한 관심이 싹트곤 있지만, 방향을 못 잡고 있는 듯합니다. 앞으로 소개하려는 건 아주 초보적인 리얼리즘 계열입니다. `아동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죠. 지금은 아동극이란 게 막연한 판타지물뿐이잖아요. 기본적인 몇 가지를 제시하고 소개하면 국내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작업의 결과는 언제 볼 수 있나요.
`우리는 친구다'는 3, 4년 전에 했고, 매년 새 작품을 시리즈로 내놓을 생각입니다.
- 뮤지컬은 음악도 중요하지만 스토리가 탄탄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뮤지컬은 구체적인 대본 없이 감각적인 상황을 설정해 얼기설기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서사 없이 감각적인 것들을 짜깁기해 만든 뮤지컬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죠. 지금은 관객들이 그런 작품을 보지만 오래 가진 않을 거예요. 때가 되면 서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한국영화도 허약한 구성 때문에 한동안 엄청나게 성장하다 거품 빠지고 있잖아요. 뮤지컬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 그래도 지금처럼 뮤지컬 시장이 좋을 때 기초가 쌓여야 하지 않을까요.
당장은 젊은 관객이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거품이 빠지겠죠. 스토리, 문학성, 예술성이 요구가 되겠죠. 앞으론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 뮤지컬 말고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더 나이 들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전공이잖아요. 주변에 입버릇처럼 말해요. `지금 난 딴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환갑이 되면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고. 젊어서 이상하게 딴 길로 흘러가서 너무 오래 돌아가는 것 같아요.
- 미대에 진학할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죠. 집안에 미술을 공부한 분이 계셨나요.
어려서부터 그림밖에 몰랐어요. 중학교 1학년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6년 내내 `미술반 귀신'처럼 살았죠. 넷째 누나가 이화여대 미대를 나왔고, 셋째 누나가 申秀貞(기악59-63), 崔郁卿(회화63졸)씨와 서울예고 동기였어요. 郁卿이 누나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제 그림을 보고 지도도 해주고 그랬죠.
- 그런데 왜 대학에선 음악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됐나요.
음대를 나온 셋째 누나가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기타를 사주더라고요. 취미가 늘어난 거죠. 대학 입학 당시 통기타가 유행했는데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나 여기저기서 반주 부탁이 들어왔어요. 양희은씨 반주를 해주고 노래까지 만들게 됐죠. 노래가 유명해져서 허명을 타게 됐죠.
- 그게 `아침이슬'이죠. 아무튼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고 투사 이미지도 강한데 처음부터 세상에 저항할 의도가 있었나요 아니면 시대 상황이 만든 건가요.
전혀 그럴 생각 없었어요. 그저 당시 학생운동이 태동되면서 여럿이 함께 부를 노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토론회나 데모 현장에서 사랑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사랑 내용이 안 들어간 노래를 찾다 보니 제 노래를 부르게 됐던 듯해요.
- 한때 저도 `금관의 예수'를 즐겨 불렀어요. 어떻게 작곡하셨는지요.
73년인가, 미대 옆 문리대에 친구가 많았어요. 金芝河(미학59-66)씨는 선배였고 그 아래로 무용하는 李愛珠(체육교육65-69), 탈춤 蔡熙完(철학70-74), 연극 林賑澤(외교69-75)?金錫滿(지리70입)?李相宇(미학70-77), 국악 金永東(국악71-75), 작곡 李鍾九(작곡67-75) 등 각 방면의 친구들 그룹이 생겼어요. 소위 `문화운동 1세대'였죠. 그러다 金芝河선배와 함께 가톨릭 문화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일환으로 金선배가 `금관의 예수'라는 희곡을 썼죠. 첫 공연에 가는 도중에 희곡에 나오는 시를 노래로 만들어볼 수 없겠냐고 해서 작곡하게 됐죠.
- 미대 다닐 때 학점은 어땠어요.
1학년 때 낙제했어요. 커리큘럼도 싫었고. 실은 제 앞이 金良洙(회화69-76)라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대신 출석부르는데 답하고 시험도 대신 쳐주다 제 걸 챙기지 못했어요. 수업도 재미없고. 서울대가 아방가르드한 것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갑갑하고 방황도 많이 했죠.
- 서양화과 동기는 어떤 분들인가요. 가끔 만나시는지. 대학시절 추억이라면.
張和震(회화69-73), 金良洙, 朴貫旭(회화69-74), 朴英男(회화69-73) 등. 연말에 林英芳선생님과 만나는 술자리에서 봅니다. 연건동 시절은 괜찮았는데 조금 있다 이런 저런 일에 휘둘려 힘들었어요. 걸핏하면 학교로 잡으러 오고 그랬으니깐. 긴장되고 피곤했던 기억이 많죠. 그래도 공릉동 공대에 가서 공부하던 시절 張和震이랑 몇몇 친구들과 조형학회도 만들고 전시회도 열고 그랬어요. 그땐 참 아름다웠는데.
-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운동권이어서 면제받진 않았는지요. 어디서 복무했는지.
74년에 갔어요. 병적기록부에 ASP라고 써 있었죠. Anti student Power.(웃음) 처음 2개월 동안 카투사에 배속받아서 AFKN에서 근무를 했는데 곧 강원도 원통으로 쫓겨갔죠.
- 처음엔 어떻게 카투사로 가셨나요.
군대를 늦게 갔더니 훈련소에서 나를 알만한 군대 고참들이 좋은 데로 빼준 거죠. 그런데 명동성당에서 3선 개헌 반대 행사가 있었는데 제 노래들을 부르기로 돼 있었나봐요. 어느 날 보안사에서 나와 서빙고로 데려가더라고요. `네가 왜 여기 있어' 하면서(웃음).
- 한동안 농사를 지으셨죠. 자료마다 다른데 농사짓고 서울로 돌아온 시기와 장소가 정확하게 어떻게 되나요.
딱 5년 지었어요. 1979년 1월 전북 익산군 팔봉면에서 새경 받고 남의 집 일을 했죠. 이듬해 김제에서 소작농을 했고요. 81년 전곡에서 숙부와 함께 있다 혼자 민통선 마을에 들어가 2년동안 혼자 지냈죠. 백학 못 미친 곳이었는데 83년 말 집에 불이 나 84년에 서울로 돌아온 거죠.
- 불이 왜 났어요. 민통선 마을에 있을 때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를 통해 사업 수완을 발휘하셨다던데.
혼자 살다보니 이웃들이 와서 불을 때줬는데 과열됐던 모양이에요. 화재만 아니었으면 계속 농사지었을 거예요. 남쪽과 달리 북쪽에선 겨울에 할 일이 없었어요, 전곡에 있을 땐 탄광에 들어갔죠. 한 겨울 광부 노릇해서 번 돈으로 민통선에 흉가 한 채 샀던 건데 불탄 거죠. 민통선에서도 겨울에 할 일이 없어 동네청년들과 쌀을 직접 내다 팔았던 거예요. 산지가와 소비자 가격에 차이가 크더라고요. 돈이 모이면 동네 목욕탕을 짓기로 했는데 못했어요. 아쉽지요.
- 형제가 몇 분인가요. 익산에서 태어났고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한 걸로 돼있는데.
5남 5녀. 누나 한 분이 돌아가셔서 현재 9남매가 있습니다. 제가 막내에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재동초등학교로 올라왔죠. 형제들이 먼저 서울로 유학 와 있었어요. 어머니는 시골에 남아 계시고요. 아버지는 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 어머님의 교육열이 대단하셨나 봐요.
산파를 하셨어요. 세브란스 1기생으로 입학하셨는데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하셨대요. 학교 기숙사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데 항의해 데모하셨대요. 원산이 고향인데 할 수 없이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고 남해안에 정착해 산골 진료를 하다 결혼 후 산파를 하신 거죠. 어머니(김하련)가 도와 태어난 아기만 해도 수 천명은 될 걸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시던 간장공장과 사이다공장도 운영하셨어요. 66년쯤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셨죠.
- 85년에 결혼하셨죠. 자녀는 몇인가요.
아들 둘입니다. 큰 아들(종화, 21)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 다니는데 현재 군복무 중이고 작은 아들(소윤, 19)은 올해 국민대 디자인계열에 들어갔죠. 원주 장일순 선생님께서 큰애 이름을 소윤이라고 지어주셨는데 큰애는 돌림자를 써야 할 것 같아 다시 짓고 작은애를 소윤이라고 지었어요.
- 얼마 전 趙英男동문이 중앙일보의 `내 마음의 별'에서 金동문을 마음 속 별로 지목했는데요. 趙동문과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趙동문의 첫 전시회를 열어줬다고도 하던데. 趙동문의 그림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글쎄. 70년인가 71년쯤 만났어요. 그림은 다 자기 식으로 그리는 거죠. 누가 잘 그렸다 못 그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식으로 하면 잘하는 거죠.
- 경기 65회 동창들과는 자주 만나세요. 가까운 분은.
생활주기가 다르니까 통 만나지 못해요. 요새 잘 나가는 친구로는 미대 같이 다녔던 이노디자인 金暎世(응용미술70-74)대표 정도.
- 자녀들에게 삶의 방식이랄까 철학에 대해 조언한다면.
미친 듯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라는 말밖에 없어요. 저도 당시 경기고에서 미대에 진학한다고 하면 `또라이'라고 그랬으니까요.
- 외부 강연이나 강의를 안 하시는 걸로 유명한데. 왜 안 하시는지. 요청이 많을텐데요.
절대 안 해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못해요. 전엔 더러 요청이 왔었는데, 안 한다는 게 소문나서 지금은 거의 없어요. 남 앞에 나서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전공과 연관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시장에서 `이 작품은 뭘 의미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처럼 어리석은 게 없잖아요. 제가 그린 그림, 만든 노래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들어 있는데 그걸 설명하라고 하면 어떻게 응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평론가라면 할 말이 많겠죠. 제가 해온 작업 때문인지 못하겠어요.
- 모교나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사진=본보 李五峰논설위원?정리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