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호 2007년 3월] 기고 감상평
冠岳山은 과거급제 많은 `벼슬산'
동문기고
冠岳山은 과거급제 많은 `벼슬산'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것을 보고 한 詩人이 이렇게 노래했다. 서울대학교는 관악캠퍼스 이전으로 그 전의 聯立大學的 性格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합대학교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1964년 문리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서울대학교는 단과대학별로 다른 배지를 달고 다닌 학생이 있을 만큼, 뿌리가 다른 단과대학이 모인 연합대학교라는 의식이 많았다.
특히 문리대는 청색바탕에 흰 글씨로 `文理'라고 쓴 네모난 배지를 달고 다닌 선배가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관악캠퍼스를 다니지 않은 세대는 선후배를 얘기할 때 단과대학을 기준으로 하고 단과대학이 다르면 왠지 선후배라고 하기에는 서먹서먹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비단 필자만의 국한된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몸을 부대끼면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으며 돕고, 다투고 할 때 정이 돈독해 지고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커지는 것과 같이, 관악캠퍼스 전체를 자기 영역으로 해서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학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때로는 갈등을 하고 또 이해하면서 자란 관악세대는 `동숭동세대'를 비롯한 종합화 이전의 세대와는 확실히 다르게 서울대학교라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관악캠퍼스에 입학한 세대가 벌써 50살을 넘어 동창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으니 앞으로 총동창회가 더욱 발전할 것으로 믿는다.
관악캠퍼스가 있는 관악구 신림동에서 관악구는 당연히 관악산에서 유래했으나 `冠岳'이라는 이름이 서울특별시 행정기구의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독산리?가리봉리?신림리?봉천리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이 新편입지역의 행정처리를 위해 출장소를 설치하면서 그 명칭을 `관악출장소'로 명명하면서부터이다. 또 우리나라 지방 행정구역의 법정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73년 3월 12일자에 지금의 관악구를 비롯, 동작구와 서초구 지역 일부를 영등포구에서 분리해 별도의 구를 신설할 때 `서울특별시 관악구'로 명명하면서부터이다
위와 같이 관악구의 명칭은 당연히 `경기금강'이라는 관악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경기 五岳(개성의 송악, 가평의 화악, 적성의 감악, 포천의 운악) 중 하나인 관악산은 예로부터 火山으로 불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해 경복궁을 세울 때 불에 대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경복궁 앞뜰에 해태를 세우기도 하고 또 관악산 중턱에 물동이를 묻었다고 하며, 또한 도성의 남대문 앞에 물이 넘어오기 어렵게 南池라는 못을 팠고 성문의 편액인 崇禮門을 세로로 써서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火氣를 눌렀다고 전해진다.
冠岳山은 글자 그대로 예로부터 `벼슬산'이라고도 했는데, 관악산에 들어가 시험공부를 한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사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不定期試인 중광시, 별시, 알성시를 준비하기 위해 영남, 호남, 충청도 등 삼남의 선비들도 과천 현 내에 기거하며 공부를 하며 대비했고, 그 후 서울대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음으로써 명실공히 우리나라 인재양성의 산실이 됐다. 신림동 일대 곳곳에는 고시원이 산재해 있어서 벼슬산이라고 했던 것이 단순한 전설만은 아닌 듯싶다.
![]() | 신림동 일대 곳곳에는 고시원이 산재해 있어서 벼슬산이라고 했던 것이 단순한 전설만은 아닌 듯싶다. |
| 李 宇 鎔(정치64-68)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서울시 지명사전 집필 |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 종합화를 위한 계획으로 새로운 학교부지로 시흥군 안양읍, 농대의 수원 일대, 태릉일대 국유림 45만8천평과 공대 20만6천평을 검토했으나 자연지형이 협소하거나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1970년 2월 朴正熙대통령이 관악산 관악컨트리클럽 일대를 종합캠퍼스부지로 확정했다. 이 때에 데모를 할 수 없게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으로 캠퍼스를 이전한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 때가 아니었다면 1백만평이 넘는 새로운 학교부지를 서울시내에서 얻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당시 어려운 재정에도 학교를 옮겨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운 혜안과 결단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971년 4월 2일 관악컨트리클럽 부지 1백7만평(1963년 개장한 冠岳컨트리클럽을 화성군 동탄면으로 옮겨서 觀岳컨트리클럽으로 했다가 지금은 리베라컨트리클럽으로 변경됨)과 의성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수 백년을 살아온 자하동(서울대학교 정문 동쪽 운동장 부근)이라는 마을을 합해 서울대학교 이전에 따른 기공식을 거행했다.
1973년 서울대 건립공사 진척과 함께 원주민들은 신림10동 신우초등학교 부근인 신림동 산72-1번지에 조성한 약 9천여 평의 `서울대학교 부지 철거민 단지'로 이주했다.
자하(紫霞)라는 이름은 조선조 정조?순조?헌종 3대에 걸쳐 詩?書?畵가 뛰어나 이른바 紫霞三絶로 이름 높은 신위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으로 그의 아호에서 유래했다. 이곳은 안개가 끼는 때가 많아 자하라는 이름 못지 않게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여 풍치가 절경을 이룬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서쪽 관악산 계곡을 끼고 흘러내리는 도림천 원류 일대를 紫霞洞川?紫霞詩境이라고 불러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이곳은 일제시대에 시가도라는 일본인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나타나는 넓적한 평탄지에 계곡수로 수영장을 만들어 놓고 일본군의 여름 휴양소로 활용했다. `시가도 풀장'은 해방이후 관리 소홀로 일부 붕괴된 것을 안양 유원지내 풀장으로 옮겼으며, 1968년 지금의 제일광장 옆에 신림풀장을 운영했지만 서울대학교 이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후문 근처에 낙성대?落星洞이 있는데 고려시대 명장 姜邯贊장군의 탄생지에서 유래한다. 장군이 출생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해 그 생가 터를 낙성대?낙성동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자리에는 뒷날 사람들이 `낙성대'라고 새긴 기념비와 사리탑모양의 3층 석탑을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탑과 주변의 지형이 훼손됐다가 1964년에서야 보수됐다.
이와 같이 낙성대 터에 3층 석탑을 세워 탑골?탑동?탑동골이라 불리웠고 또 장군의 初名이 殷川이기 때문에 은천이라고도 했는데 지금 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성역화한 공원은 탄생지에서 3백m 떨어져 있다. 은천이라는 이름은 관악구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1958년 4월1일) 은천초등학교 이름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