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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2007년 3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원칙을 지켜달라고…


동문기자 취재수첩

원칙을 지켜달라고…

林 莊 原(경제87-94)
KBS 탐사보도팀 기자
주말 `9시뉴스' 앵커

 `진부한 주제, 피곤한 작업'….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병역 문제를 따져보자는 기획안을 접했을 때 든 생각이었다. 언론에서 단골 메뉴로 다뤄졌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병역 면제도 많을 거라는 통념은 이미 상식처럼 굳어진 것 아닌가…. 일단 손을 대면 `탐사보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과물을 내놔야할 텐데, 과연 가능할까?
 어쨌든 취재진 3명이 구성됐고, 대상과 방향이 정해졌다. 대상은 고위 공직자와 재벌가, 언론사주들로 압축했다. 방향은 두 축이었다. `유전(유권) 면제, 무전(무권) 현역'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사실인지를 통계로 확인해내는 것, 그리고 개개인의 병역 비리 의혹을 추적해 이슈화하는 것이었다.
 취재는 예상을 뛰어넘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1년반을 달리는 마라톤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법적 공개 대상이었지만, 재벌가와 언론사주들은 의혹 추적은 고사하고 병역 상황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재벌가는 7대 재벌로, 언론사는 소유주가 있는 5개사로 압축하고 창업주를 정점으로 가계도를 그려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병역 사항을 파악하는 취재 자체가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였다. 다각적인 시도를 해봤지만, 2백개가 넘는 빈칸을 메우기는 쉽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제 자리만 맴돌았다. 한 때 취재진이 해체되기도 했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지난 97년 대규모 병역비리 수사로 눈을 돌렸다. 2001년까지 4년이 걸린, 창군이래 최대였다고 할만큼 수사는 요란했지만, `힘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는 뒷이야기도 무성했다. 당시 수사에 관여한 검찰과 군 검찰 관계자들을 접촉해 나가면서 취재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방대한 수사기록을 입수했고, 의혹이 있는 `유명인사 명단'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의혹이 있어도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에 착수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언론의 취재에는 공소시효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당시 수사 자료를 기반으로 다시 빈칸을 메우고,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진행됐다. 의혹이 있는 인사들의 병적기록표 사본을 입수하면서 취재는 한 단계 더 진전됐다. 10~30년이 된 병적기록표를 들고 그 당시의 군의관들을 찾아 기억을 더듬게 했고, 재벌가와 언론사에 공개 질의서를 보내고, 인터뷰를 거절하는 재벌 총수의 집 앞에서 카메라를 대고 기다리는 등 현장 취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지난한 취재의 결과물은 지난해 11월 말 `파워엘리트, 그들의 병역을 말하다'라는 60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취재한 내용을 버리고 또 버려가면서 1백% 정제된 사실(fact)만으로 담담하게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7대 재벌가의 병역 면제율이 33%에 이른다는 통계는 인터넷 공간에서 수많은 분노의 댓글로 이어졌고, 언론 사주 일가의 병역 면제를 둘러싼 의혹은 틈만 나면 구국과 안보를 외치는 보수언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취재의 기술적 어려움 못지 않게 취재진을 괴롭힌 건 `음모론'이었다. 취재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KBS가 대선을 앞두고 특정 정당과 보수언론에 타격을 주기 위해 병역 문제를 다룰 거라는 설들이 증권가의 정보지에 나돌았다. 어이없는 가설이었지만, 취재진에게는 이를 불식시키는 작업 또한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다른 정당 인사들의 병역 비리를 찾기 위해 더 뛰어야 했고, 오너십이 있는 사주 일가를 다루기로 한 재벌과 언론 쪽도 그 기준을 어기면서 KBS 사장의 병역 면제건을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재벌가와 언론사들의 읍소와 협박은 방송이 나가기 직전까지 밤잠을 설치게 했다. 유명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의혹을 제기했지만, 반론보도 청구나 명예훼손 소송은 한 건도 없었다. 해당 인사들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실패한 게 아니냐는 자성이 컸지만, 당사자들의 침묵을 의혹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위안을 삼았다.
 기자 사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한국기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그동안의 고충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시상식장에서 뇌리에 떠오른 건 취재진이 고심 끝에 작성한 마지막 문구였다. `힘있는 사람들에게 앞장서달라고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칙을 지켜달라고 말할 뿐이다.' 오늘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데 쓴 이 문구가 훗날 나를 재단하는 데 쓰여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날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