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호 2007년 1월] 문화 꽁트
해돋이
해 돋 이
廉 貞 任
(독문63-67)한국문인협회 이사
前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올 한 해도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이제 병술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이면 또 한 살을 더 먹어야 하니 지윤은 서글프기만 하다. 친구들은 ??얘들아 우리는 6학년 2반이 아니고, 5학년 12반이야??하지만 그런다고 나이를 거꾸로 먹겠는가, 눈 가리고 아옹이지. 요즘 여고 동창회의 홈페이지에는 '우아하게 늙어 가는 법' '노년의 덕목' 같은 제목의 글들이 줄줄이 올라온다.
그 내용을 예를 들면, ??빈 상자 곽이나 포장지는 모아 두지 말고 그때그때 버릴 것?? 혹은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 ??넘어지지 말고, 감기 들지 말 것?? 등등…, 마치 나란히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기다리는 바닷가의 아이들처럼, 그들은 노년이란 파도를 넘기 위해 손에 손을 잡는 것 같았다.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한지 40년이 된다. 40년! 참으로 긴 세월이다.
그녀는 모교에서 부쳐주는 동창신문을 받으면 꿈도 많고 풋풋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 신문을 구석구석 꼼꼼히 읽는다. 학창시절을 같은 캠퍼스에서 보낸 출세한 남자 동창들의 근황도 읽고, 자식들 또래의 여자 후배들의 연주회나 전시회 소식 같은 것도 빠짐없이 읽는다. 그 시대에는 여학생들은 소수 그룹으로 자기네들끼리 몰려다니고, 언제나 주변인 같은 존재였는데, 요즘 여학생들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시다.
그녀는 동창들의 빛나는 성공으로 인해서 자신의 평범한 삶까지 격상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녀는 동창회비는 열심히 챙겨서 내는 편이다.
최근에는 단군이래 최고의 벼슬이라는 유엔사무총장이 된 潘基文장관이 그녀와 같은 학번인 것을 알고는 얼마나 우쭐했는지…. 동창신문에도 점점 후배들 사진들이 더 많이 올라오니. 이제는 어디서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설 나이가 되었나보다.
그래도 지윤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남편이 아침마다 출근을 하니 친구들은 부러워하는 눈치이다. 아들은 몇 년 전에 결혼해 이미 그녀에게는,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고, 서른이 넘은 딸은 결혼할 생각을 안 해 걱정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을 알아주니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다. 며느리는 직장생활을 핑계로 아기를 낳지 않으니 손자를 언제 안아볼 수 있을지 요원하다. 정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인가.
지윤은 여고시절에 프랑소아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불문과에 지원했다. 사강이 열 여덟의 나이에 파리의 한 카페에서 썼다는 그 소설의 상큼하고 섬세한 문체에 그녀의 감수성은 물살처럼 흔들렸다. 지금도 그녀는 그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나른함과 달콤함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을, 슬픔이라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주저한다.-
지금은 마로니에공원이 된 동숭동 캠퍼스는 가을이면 노랗게 잎이 물드는 큰 은행나무가 장관이었다. 그녀는 은행나무 아래서 언젠가는 작가가 되리라는 꿈을 키워갔다.
그 당시 문리대에서는 이름 난 문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검은 물을 드린 작업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은 金芝河시인이 느릿느릿 오갔고, '서울, 1968년 겨울'을 쓴 소설가 金承鈺은 같은 과의 선배였다.
언제나 검은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검은 원피스를 입은 키가 자그마한 田惠麟선생이 법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문리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도 볼 수가 있었다. 한 비범한 여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는 문리대의 어딘지 자유분방하고, 인문적인 분위기에 때로는 매혹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낯설게 느끼기도 하면서 4년을 보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보니 불어도 제대로 못하고 습작 한 편 없이 캠퍼스 밖으로 밀려 나왔다. 흔히들 말하기를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은 영문을 몰라서 영어를 못하고, 불문과는 불문하고 불어를 못하고, 독문과는 이하동문으로 독어를 못한다고 하든가?
어둡던 동쪽 하늘이 점점
붉어지면서 둥근 해가
조금씩 떠오른다.
마치 태초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해처럼
장엄하고 뜨겁게….
졸업 후 좋은 혼처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맞선을 보고 얼마 있다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사업을 하는 남편 뒷바라지와 줄줄이 이어있는 시댁의 제사, 그리고 아이들을 기르다보니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말았다.
일상적인 생활에 파묻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은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올해에 들면서 재 속에 묻어둔 불씨가 살아나듯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든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평생 쓰지 못할 것 같은 초조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학창시절 같이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며 사귀었던 K가 문득 문득 생각난다.
미술을 전공한 K는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가면서 지윤도 같이 가기를 원했다. 이 다음에 아기를 안고 있는 지윤의 모습을 꼭 그려보고 싶다고 하던 K!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애틋한 마음이 든다. 만약 그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라보엠'의 미미와 로돌프처럼 파리의 다른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낭만적으로 살지 않았을까? K와는 몇 번의 편지가 오갔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의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받은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파리에 아직 있다는 소문도 있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풍문도 얼핏 들려 왔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지윤은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구상해오던 이야기를 컴퓨터에 쓰기 시작했다. 근래에 와서 더욱더 침침해진 눈에 돋보기를 쓰고 한 자 한 자 자판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옛날의 동숭동 캠퍼스와 은행나무를 그리며 마음을 다잡아 갔다. 그리고, 화가와 작가로 각자 성공하자는 K의 마지막 엽서를 기억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에 자신의 글이 활자가 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이제서야 자아를 찾은 듯한 성취감을 맛본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을 구속했던 그녀 마음속의 또 다른 그녀로부터 해방됨을 느낀다.
12월이 되면서 지윤은 단편 한편을 거의 끝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진전이 없다. 자신이 그린 지도 위에서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매는 듯, 그녀는 또 다른 갈등에 휩싸인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 오면서 그녀는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딘가 길을 떠났다 오면 글이 잘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남편은 강원도에 가서 연말을 보내고, 새해 첫날에 동해에서 해 뜨는 광경을 보고 오자고 한다.
바닷가는 해돋이를 보러 온 젊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들은 그 바닷가를 떠나 외진 곳에 있는 아담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지은 지가 좀 오래된 듯했지만 정갈하고 인테리어도 프랑스의 시골 기분이 나는 정겨운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그림들도 걸려 있었다. 그림들이 어딘지 낯익은 듯한 따뜻한 느낌을 줬다.
이층에 있는 식당에서 연결되는 테라스에서는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지윤은 가슴 속 깊이 바닷바람을 들여 마셨다. 온 몸이, 머릿속까지 깨끗이 헹구어지고 영혼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남편과 해돋이를 보기 위해 서둘러 식당 앞 테라스로 내려갔다. 벌써 호텔 투숙객들이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있고, 종업원들은 의자를 내놓기도 하고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새벽바다는 하얀 띠를 띠며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물을 한잔 마시러 식당 쪽으로 향했다.
그 때 그 호텔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종업원들을 지시하고 있었다. 지윤은 그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란다.
옛날의 그 K를 꼭 닮은 반백의 노신사, K의 아버지신가?
그러나 그가 K인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렇지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니….
그도 깜짝 놀란 듯, 지윤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손짓을 한다.
그 때였다. 그의 뒤에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와서, ??할아버지, 지금 해가 뜬데요. 우리 빨리 보러가요!??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이끈다.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귀여운 아이였다.
사람들이 모두 테라스로 밀려간다. 지윤도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테라스로 나오며 남편을 찾는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어지러워 넘어질 것만 같다. 옆으로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바다를 향해 섰다.
어둡던 동쪽 하늘이 점점 붉어지면서 둥근 해가 조금씩 떠오른다.
마치 태초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해처럼 장엄하고 뜨겁게….
새해의 첫 날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