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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2007년 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학창시절 동생 崔仁浩 작가 만들기 몰두


추억의 창

학창시절 동생 崔仁浩 작가 만들기 몰두

崔  正  浩
(경제59-65)
한양대 겸임교수  .  KTD컨설팅원장

우리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우리나라 수출액은 고작 1~2억 달러에서 맴돌았으니 지금 한 해에 3천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그야말로 상전벽해라 할만한 한강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기적의 주인공들이 우리 서울대 상대 17회 동문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시 학교에서 무역이 아니면 이 나라가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웠고 그래서 기업에 가서 뛰었다.
 1994년 1월호 월간조선은 별책부록으로 '세계적 한국인'이라는 타이틀로 '정상에 선 야성과 오기의 한국인 73명의 인간탐험'을 실었는데 희한하게도 필자의 이름도 껴 있었다. 내 이름이 단독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대 상대 17회 동기 방명록의 대부분이 패키지로 한 인물로 취급됐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대표적인 한국기업들의 CEO로서 그 명성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당시 대우자동차판매 사장이었다. 이 자료에는 기업체 사장인 88명의 동문들이 리스트업되었고 다른 1백여 명의 동문들은 현직 임원으로서 사장 후보생으로 활약한다고 소개돼 있었다. 합쳐서 거의 2백명 가까운 동문들이 삼성, 현대, 대우, 선경, 두산, 한화, 코오롱 등 대그룹의 경영진들이었음은 물론 이건산업(朴英珠회장), 진케이블(陳哲平회장) 등 중견기업, 중소기업의 CEO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업종에서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무역진흥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 특집은 특기 사항으로 17회에서 80년대 일간신문 경제부장 3인이 동시에 등장했음도 알렸다.
 상대 17회는 졸업 앨범 편집후기에서 ??역사를 창조할 의무를 무겁게 짊어질 우리나라의 지성인이기에 조속히 한국의 후진성을 탈피하는데 그대들의 보람 역력히 있으라??고 쓴 대로 우리들의 앞날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IMF사태 후에는 속죄양으로 동문들 중 몇 명은 분식회계 등의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조국의 후유증으로 잉태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교도소에서 20년 이상을 좌선하고서야 출소해 대학강단에 서는 동문도 있었다. 그는 '민체'라는 서체를 개발해 그 서체가 그대로 소주병의 브랜드 디자인이 되고 있으니,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홍일점의 여성 동문(金崇子)은 3백18명 동문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마스코트였으나 우리 곁을 떠나 서울대의 다른 학과를 나온 율사와 짝을 지어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들 못난 것을 탓할 뿐 어찌 대 놓고 원망하겠는가. 이 홍일점은 지금 동기회의 등산대장으로 아직도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다.
 나의 학창시절의 개인전략 중의 하나가 동생 崔仁浩작가의 등용문 통과였고 여기에 거의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변호사였던 부친을 일찍 여의고 고생하는 '위기의 집안'에서 일종의 '가문의 영광'을 일궈보려는 보상심리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1963년 내가 교열을 보아준 작품 '벽 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됐다. 그때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생이어서 당시 한국일보 張基榮사장이 혀끝을 찼다는 일화가 있다. 10대의 학생이 등용됐으니 좋아서라기보다는 신문사의 권위를 생각한 안쓰러움일 것이다. 드디어 1967년 대학재학 중 동생은 내가 제목을 달아준 '견습환자(見習患者)'로 대망의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등용된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던 李御寧선생은 축하연에서 ??인턴 환자라. 음. 제목이 하도 마음에 들어서 무조건 편을 들었지, 뭐. 내용도 좋았지만.??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 그런데 내 로열티는 어디 가서 찾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