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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2006년 11월] 문화 꽁트

콩트 릴레이 아버지, 육갑하세요?


콩트 릴레이

   

  아버지, 육갑하세요?


        禹漢鎔
  (국어교육68-75)
  모교 국어교육과 교수

근래에 와서 아무래도 다리가 좀 약해진 것 같다. 걸음을 재촉해 빨리 걸을라치면 허벅지가 쿨렁거리고, 욕조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고 거울에 다리를 비쳐보면 종아리가 홀쭉하니 살이 빠졌다. 사나이 허약해지는 징조는 다리에서 온다고들 했다.
 요즈음 부쩍 기력이 쇠해지는 것 같다. 이전 같으면 가을이 되면 식욕이 넘쳐 탈이었는데, 육류가 당기지 않고 기름진 음식이 입에서 거부감을 나타내곤 한다. 운동을 해서 몸을 단련해야 마누라한테 대접을 받겠다 싶어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를 타고 가을이 익는 들로 나간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논에 벼가 누렇게 익은 속에 메뚜기가 퍽퍽 날아나는 길옆에는 수수 모가지가 실팍하게 영글어 알곡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다. 그런 길에 금속 림을 반짝이며 달릴라치면 십년은 젊어진 듯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진다.
 아내 몰래 유념해 뒀던 비상금을 헐어 자전거를 샀다. 아내는 어디서 난 돈으로 자전거를 구입했는가, 자금의 출처를 따지고 들었고, 딸아이는 아버지 이상해졌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다 아내는 한 수를 더 얹어 맞장구를 쳤다.
 "오십 넘어서, 안 하던 짓 하면 다시 봐야 한다던데."
 겉으로야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심한다더란 이야기로 들렸다. 문제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생각했던 것처럼 쾌적하지가 않았다. 길가에는 꽃 대신 금속 가드레일이 먼지를 둘러쓴 채 길을 압도했고, 메뚜기가 튀는 게 아니라 낡은 자동차 매연이 코를 찔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복면을 하고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아내 몰래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다 놓았다. 무릎 보호대를 산다는 것이 잊어버리고 인라인만 조심해서 들고 들어와 거실 장식장 뒤에 안 보이게 놓아뒀다. 전에 스케이트를 타 본 사람이면 금방 익힌다는 판매원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서둘러 나온 결과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릎 보호대가 마음에 걸렸다. 관절이 약해진 다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아 종지뼈라도 깨지는 날이면 황새 촉새 다 울고 말 판이었다. 생각하던 끝에 아내가 쓰다가 서랍장에 처박아둔 브래지어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많은 브래지어가, 늙은 젖가슴을 가리는데…?"
 혀를 차면서, 그 중 두툼한 것을 둘 골라 가지고 서재로 들어왔다. 가위로 끈을 자르고 두 장씩 겹쳐 댄 다음, 겉을 손수건으로 커버를 해서 바느질을 해 두면 어설픈 싸구려보다는 한결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바늘귀가 꿰지질 않았다. 딸아이를 불렀다.
 딸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머쓱하게 서 있었다. 요즈음 아버지 행동이 좀 수상쩍은 모양이다. 어떻게 뒤를 밟아 보았는지, 자전거를 이웃 고등학교 체육부 학생한테 줬다는 것도 알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다가 어디 감춘 줄도 빤히 알고 있었다. 전에 언제던가 잘 감춰 둔 스트롱맨이라는 정력증강기구를 찾아 들고는, 놀리는 투로 비아냥거리던 생각이 떠올랐다.
 "스무 살 어린 동생이 나더러, 누나 누나 하며 달려들면 징그러워 어떻게 하지?"
 애를 너무 풀어놓아 먹인 잘못이 있긴 하다. 사십이나 돼서 둔 딸이라 귀엽다고만 하고 엄하게 타이르고 하는 것은 아내도 자신도 극구 피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녀간에 대화는 트고 살아야 한다는 속셈으로 말버릇이 좀 빗나가는 것쯤은 눈감아 주고 지낸다. 그런데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더니 곁을 주지 않고 냉랭하게 겉돌았다.
 "이게 다 뭐예요? 난 몰라요. 이건 백화점에서 진수가 골라 준 건데…."
 예비군 군복 무늬가 혼란한 브래지어는 젊은 가슴을 가리기에는 영 감각이 아니었다. 젊은애들 감각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하다가, 진수란 놈이 누군가, 브래지어를 골라 줄 정도면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사이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공연히 눈자위가 알알하니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딸아이는 왜 그러느냐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바늘귀가 안 보여서 그런다."
 딸아이는 잘라 놓은 브래지어 캡들이 뒹굴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깔깔 웃다가는, 시무룩해져 가지고는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아버지, 육갑하세요?"
 "아버지한테, 그게 어디라고 하는 말투냐?"
 "이순은, 아무 이야기를 들어도 노여워하지 않는 나이라면서요?"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바늘귀나 꿰라."
 "아버지가 바느질을,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부글거리는 속을 눌러 놓고는 딸아이가 바늘귀를 꿰는 옆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식이지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갛게 달아올라 상기된 볼이며 곱게 굽이진 콧날의 곡선이며, 물을 들이지 않아도 와인칼라로 색이 돋아나는 머릿결이 고왔다. 딸아이는 바늘귀를 꿰서는 자기 손으로 바느질을 하겠다고 나섰다. 요새 애들 같지 않은 구석이다.
 말버릇이 멋대가리가 없게 된 것은 어른들 탓이거니 하면서, 문득 저 아이가 내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지난날들의 영상이 휙휙 소리를 내며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1946년생, 병술년 개띠, 그래서 개팔자라고 동창들은 투덜거렸다. 1966년 대학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바 쌍육 학번. 월남전이 발발하고, 파병이 되고, 정글과 초가집과 까무잡잡하니 얼굴이 반들반들한 월남 처녀들, 내가 사람을 몇 죽였다고 자랑을 늘어놓던 친구들, 거기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몸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전투에 나가곤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비군에 편입되어서 정기 소집 훈련에 나가면 참으로 희한한 정신교육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산아제한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정책에 협조하는 사람에게는 아파트 분양권을 우선 배정해 준다고 해서 '불까기'에 동참을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셈이었다. 사글세 면할 길이 그밖엔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놈이 병명도 알 수 없는 열병으로 끝내 가고 말았다. 아내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 하나 낳을 수 없나요?"
 "세월이 약이라지 않소? 견뎌 봐요."
 "그거 복원 수술도 된다던데, 우리 친구가 하는 병원에 가봅시다."
 아내의 그 청을 안들어 줄 수가 없었다. 만일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다가는 아내를 잃고 말 것만 같았다. 아내의 친구라는 의사는 훤칠하게 잘 생긴 미남형이었다. 병원에 처박혀 환자를 주무르기보다는 무대에 서는 게 한결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소원대로 딸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어미는 물론 애비를 닮은 구석이 보이지를 않았다. 체구야 요즘 아이들이 한결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이목구비며, 목소리며, 모발이며, 얼굴형이 친구의 말대로 '수입종' 같이 변해갔다.
 새로 개장한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손질한 아내가 돌아왔다. 아버지와 딸이 마주앉아 브래지어와 손수건을 가지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양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다. 그러다가는 자기 브래지어를 잘라 놓은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 나이가 몇인데, 미쳤어요?"
 "내 나이를 내가 왜 몰라, 올해가 회갑, 이순 아닌가."
 "그러면 철이 들어야지요, 자전거에, 인라인…, 그리고 이건 뭐예요?"
 아내는 장식장 위에 놓인 편지봉투를 코앞에 들이대며, 악을 쓰듯이 바락바락 달려들며 속아 살았다고, 억울하다고 내질렀다.
 동창들 모임이 있을 때였다. 병술년 개띠들도 이순에 이르렀으니 좀 특별한 일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혼자 하기는 용기가 안 나니까 함께 하자면서, 사후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자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중요한 깨달음은 늦게 찾아오는 법이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몸은 내가 운영해야 하는 생체시스템이다. 내가 내 몸을 통어하지 못하게 되면 내 몸의 운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한다. 내가 받은 육신 가운데 아직 쓸모가 있는 것을 남에게 좀 나눠주는 것은, 나를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려 주는 일이다. 나머지는 세상에서 행한 자질구레한 일들이 남의 기억에 남을 뿐이다.
 부부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서로 빚지고 산다는 뜻이다. 자식은 부부의 품에서 부화해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이다. 내가 남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 몸의 한 부분을 남에게 내주는 것이다. 살아서는 두려워 못한 일을 죽어서 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해를 해 달라….
 "이순에 깨달은 것치고는 좀 관념적이네요."
 "이순은 무슨, 육갑을 혼자 잘못 짚으면 저렇게 된단다."
 깨달음의 보람은 실천 뒤에 따라오는 것. 아내가 들고 있는 시신 기증서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아내를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그 뒤로 아버지를 닮지 않은 딸아이가 예쁜 눈매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