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호 2006년 11월] 뉴스 단대 및 기과 소식
건축계 첫 동인 '木口會'
건축계 첫 동인 '木口會'
국내 건축 이끌어 온 리더 모임지난 11월 2일 목요일 저녁. 종로의 한 음식점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계의 노장들이 하나 둘 모였다. 건축학과 선후배들로 이뤄진 木口會 모임 자리다. 金 洹(61-65)총무는 "대학졸업 후 '김수근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자마자 모임을 시작해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며 그때를 회고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 두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첫 모임이 65년 4월 1일(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만우절이라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던 회원들이 '정말 모이는 것 맞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겁니다. 결국 모이긴 모였죠. '木口會'란 이름도 公日坤동문이 토론이 오래가자 '먹고 합시다' 외친 것이 발단이 됐어요. 목요일에 먹고 말하는 입(口)들의 모임이란 의미죠."
목구회는 이름만 들어서는 단순 친목 모임 같지만 70~80년대 한국 건축계를 선도하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지만 묵직한 단체이다. 한국건축 50년사를 정리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安昌模(건축81-85)교수는 "목구회의 창립은 한국근현대건축사에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먹고 합시다'가 모임 이름으로
이 모임을 시점으로 건축을 고민하고 비평하는 단체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홍익대 금우회, 한양대 한길회, 인하대 용마루회 등 대학을 중심으로 한 건축가 모임부터 80년대 이후 젊은건축가 모임인 4 ?3그룹의 태동에 이르기까지 건축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건축비평에 관심을 쏟으면서 왜색 논쟁이 일었던 부여박물관 사건, 공정치 못했던 정부종합청사 현상공모 문제제기 등을 통해 한국 건축계의 사회적 발언창구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목구회는 1960년대 건축계의 양대 산맥이던 '김수근건축설계사무소'와 '무애건축'에서 근무하던 건축학과 졸업생들이 건축정보의 교환을 위해 창립했다.
초창기 멤버는 安瑛培(51-55)前도성건축 회장, 정일엔지니어링 宋基德(52-57)대표, 간삼파트너스 元正洙(53-57)고문, 故 張宗律(57졸)동문, 향건축사 公日坤(56-60)소장, 창조건축사 金秉玄(56-60)대표, 원도시건축 尹承重(56-60)회장, 토펙엔지니어링 崔莊雲(57-61)고문, 林忠伸(58-63)前울산대 교수, 兪 杰(59-63)동문, 한샘 趙昌杰(59-63)회장,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金 洹대표.
나중에 덕천건축연구소 李商淳(52-56)회장, 鄭鎭城(53-58)前우일종합건축사 대표, 건우사종합건축설계사무소 兪英根(53-57)회장, 성균관대 趙大成(54-58)명예교수, 표준구조기술연구소 馬春景(54-58)소장, 협동건축사 金 桓(57-65)소장, 크레아디자인 金英哲(59-63)회장, 하나그룹 朴性圭(59-63)대표, 禹圭昇(59-63)동문, 일건건축사사무소 黃一仁(59-63)회장, 원도시건축 卞 鎔(61-66)대표, 종합건축사 아키반 金錫澈(62-66)대표 등이 합세했다.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단체였기 때문에 모임 내용은 각 회원의 근작을 소개하고 비평을 듣는 열띤 토론이 주된 프로그램이었다. 가끔은 鄭寅國, 金壽根, 金重業 등 기성의 건축가들을 초청해 강연도 듣고 그들이 설계한 건물을 방문해 작가와 토론도 벌렸다. 金 洹동문은 "그 비평들이 어찌나 신랄했던지 나로서는 옆에서 보고 듣기가 아슬아슬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모일 때마다 너무 진지하게 토론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12시, 새벽 1시를 넘기기가 일쑤였죠. 아침에 나오면서 '오늘 목구회'라고 하면 으레 그 날은 아주 늦게 들어오는 날로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들의 활동은 세 권의 건축평론집과 2회의 건축 작품전시회로 열매를 맺었다. 1974년부터 발간한 '木口會 건축평론집'은 한국에서 처음 발간된 건축평론집으로, 한국 건축의 자극제가 됐다.
"좀 더 많은 평론집을 내고 전시회를 열어야 했지만 총무인 저의 게으름으로 그렇지 못했던 게 아쉽죠. 그래도 창립 당시의 이상에 조금 더 다가가려는 열정은 식지 않았고 그동안 각자 개인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목구회는 그동안 黃一仁 ?尹承重 ?卞 鎔건축가협회장을 배출했다. 각 회원들이 설계한 작품에는 과천정부청사(尹承重), 포스코센터(元正洙), 서울 예술의 전당(金錫澈), 한국종합전시장(金 洹), 밀알학교(兪 杰), 대법원청사(卞 鎔), 광주 문화의 전당(禹圭昇) 등 굵직한 건물들이 수두룩하다.뿐만 아니라 林忠伸동문은 울산대 교수로 내려가 지방 건축교육의 한 축을 담당했고, 趙昌杰동문은 부엌가구시장에 진출해 우리나라 주거문화 혁신에 일조했다. 또 趙동문은 번 돈으로 재원을 키우고 창의적인 건축가들의 작품활동에 큰 기여를 했다.
회원들 국내 중요 건물 설계
목구회가 신입회원 없이 40년이란 오랜 세월을 이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이렇게 회원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역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安昌模교수는 "목구회의 경우 홍대, 한양대와 달리 출신학교 전체조직으로 크지 않은 게 특징"이라며 "서로가 다른 캐릭터지만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한국 상황에서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순수한 고민으로 뭉쳤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모임에는 많게는 10살 차이가 나는 선후배 사이를 조율해 주는 선배와 추진력 있게 나가는 후배가 조화를 이뤘다. 연세가 지긋하면서도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元正洙동문, 온화한 성품으로 전체중심을 잡는 尹承重동문, 모임의 막내로 알뜰한 살림을 하는 金 洹동문, 전시회 등 몇 가지 중요 일을 추진력 있게 해 나간 金錫澈동문,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돼주는 趙昌杰 ?李商淳동문. 각자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지난해 목구회는 40주년 기념으로 '메사 베르데'를 여행하면서 지금까지 활동을 총정리하는 작업을 계획했다. 요즘 그 일을 외부에 맡겨 객관적 시각으로 '목구회'를 조명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또 金錫澈동문 등 지금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동문들의 작품전시회를 둘러보고 비평하는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도 건축계의 당당한 어른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쉼 없는 공부에 있는 게 아닐까. 〈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