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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2006년 11월] 뉴스 본회소식

제16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시상식

여러분이 곧 국가의 자랑입니다.




























모교가 지난 10월13일 제16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權彛赫,金在淳,朴泳姬,金聖浩,李御寧동문(사진 위에서 시계방향)을 선정,시상했다.

여러분이 곧 국가의 자랑입니다.


제16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프로필.수상소감


 
     한국 예방의학.보건학 터전 마련
 
   "정신적 여유 가지는 인재 길러야"
  
                    성균관대 權彛赫이사장


權彛赫동문은 1947년 모교 의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48년 수의학부 전임강사, 1956년 의과대학 조교수로 시작해 우리나라 예방의학과 보건학의 터전을 마련했다.
 특히 교육보건환경분야의 교육자 및 행정가로서 의과대학장, 보건대학원장, 병원장, 총장 등을 역임해 모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탁월한 능력과 지도력으로 權동문은 예방의학과 보건학부문의 학술적 업적이 국내외적으로 크게 인정받아 1967년 세계학술원 정회원, 1981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 198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과 제24~25대 학술원 회장, 세계보건기구(WHO)의 각종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훌륭한 인품을 바탕으로 뛰어난 행정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문교부.보건사회부.환경처 장관 등 국가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한국교원대 총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국제보건의료재단 이사장 등 교육.과학기술.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현재까지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수상경력으로는 1954년 미국 자유훈장,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2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1983년 청조근정훈장,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이 있다.

수상 소감 〈요지〉
 
   모교의 환갑날에 좋은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낼 때 가끔 국회에 불려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학시험제도가 국민의 관심사였죠. 어느 날 시험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유는 어떤 방법을 쓰던 서울대학교는 좋은 학생들이 모이게 돼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들이 껄껄 웃으면서 넘겨주더군요. 만일 제가 지금 국회에 가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겁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총장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했다고 봅니다.
 83년 10월 15일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기 바로 전날의 일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모교 개교기념일이 10월 15일입니다. 보통 개교기념일 전날인 14일에 조촐한 행사를 하죠. 저도 그날 행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왔습니다. '7개월만 더 지내면 나도 임기를 마치는 총장이 되겠구나'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오늘 부로 총장직을 그만두고 내일부터 함께 일하게 됐다"는 아주 짤막한 내용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다음날 청와대에 갔더니 제가 문교부 장관에 임명됐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인사청문회를 비롯해 얘기할 기회라도 있지만, 당시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래서 가끔 저에게 왜 그 좋은 총장직을 그만두고 장관을 하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그게 내 마음대로 안되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총장 이임식 때의 일입니다. 당시 관례는 학장회의실에서 학장회의 멤버들과 커피 한 잔 들면서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후임 李賢宰총장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이임식을 몇월 몇일 몇시에 할테니 참석해달라고요. 저는 관례만 생각하고 참석했는데, 李총장께서 저를 교수회관에 데리고 가더군요. 도착하니 교수가 3백여 명 있고, 학생 대표들도 20여 명 있어요. 그때 제가 원고도 준비 못한 상태였습니다. 난 그저 커피 마시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당시에는 비가 오면 학생들이 데모하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이야기로 "오늘도 비나 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자리에 와 있는지도 몰랐죠. 다음날 신문을 보니 '비가 오기만 기다리는 총장이다' 이렇게 기사가 나왔어요. 그 발언 때문에 국회에 나가서 혼이 났습니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총장이 어떻게 문교부 장관을 하느냐고요. 어떻습니까. 그땐 그래도 총장에 대해선 좀 관대했는데, 요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 터줏대감께서 여기 나와 계신데 金在淳 前의장님, 어떠세요. 제 말 과장이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4년 임기를 모두 마친 鄭雲燦전임총장께 경의를 표합니다. 총장생활을 하시면서 한번도 굽히지 않고 서울대학교의 자존심을 지켜나간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끝으로 한마디만 하죠. 82년, 크리스마스 1주일 전쯤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총장 한 분이 오셨어요. 마침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그 양반이 이야기를 하다 눈을 보더니 "야, 참 아름답다. 그런데 눈이 녹게 되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물어봐요. 저는 속으로 이 사람이 정신이 있
는 사람인가 했죠. "눈이 녹으면 물이 되지, 그걸 모르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좋은 계절을 가진 나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왕이면 봄이 온다든지 꽃이 핀다든지, 이렇게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좋지 않느냐"며 저에게 한 방 크게 먹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젊은이를 만날 때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고 남은 여생 계속해서 우리 서울대학교의 영광을 위해 몸바치겠다고 다짐하면서 인사를 마칩니다.



     70년부터 국민교양지 '샘터' 발간
 
   "존경했던 교수 ?학우 가장 그리워"

                 
                 샘터사 金在淳고문


金在淳동문은 1951년 모교 상과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중 총학생회장과 安昌浩선생의 흥사단 활동을 통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6 ?25전쟁 중인 부산피난시절 전시연합대학 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UN세계학생대회 대표로 참석해 모교의 위상을 세계에 한껏 드높이기도 했다.
 졸업 후 정계에 입문한 金동문은 1960년부터 1973년까지 제5~9대 국회의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제13대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등 1992년 제14대까지 7선 국회의원으로서 우리나라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 회장, 국회 상공재경위원장, 한일의원연맹회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국가 및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58년 월간 '새벽'지 주간을 지냈으며, 1970년 교양지 '샘터'를 창간해 유력인사에서부터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교양도서로 30여 년간 사랑받으며 국민의 정서함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金동문은 지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네 번에 걸쳐 30만 서울대인을 대표하는 서울대총동창회 회장을 역임하며 모교 발전에 헌신해왔다.
 수상경력으로는 1988년 콜롬비아 상하원 적십자대훈장, 1989년 페루 드레레이아스 공로훈장, 1990년 태국 최고백상대훈장, 1991년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등이 있다.

수상 소감 〈요지〉

 모교 창립 60주년! 남다른 감회를 안고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1945년 저의 나이 스무살이었습니다. 우리 서울대가 창립된 것이 그 다음해 1946년이었으니, 서울대가 생기기까지의 산고는 건국전야의 정치적 혼란과 맞물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겨우 대학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으나 50년 북녘 공산군의 남침으로 학원의 분위기는 물론, 많은 학우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젊은 꽃봉오리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본인이 이 자리에 서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은 것도 개교 60주년을 맞는 모교의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교수, 사랑하는 학우 형제들의 슬픈 군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인의 나이도 80이 넘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건강, 스포츠, 상쾌한 기분 등 인생의 기쁨을 하나하나 단념해야 하니까요. 그 중에서도 안타깝도록 그립고 외롭게 느끼는 것이 존경했던 사람들, 훌륭한 교수와 선배들의 추억이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유감없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길이가 필요하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만, 여러분! 오래 살아남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생을 판단하는 데는 언제나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사회의 일들은 불확실하고 변하기 쉽고 극히 하잘것없는 일에 의해서도 전혀 다른 상태로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 전란 속에서, 굶주림과 가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삼 느끼는 대목입니다.
 끝으로 저는 경애하는 동문들에게 제가 좋아하는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폴란드 출신의 여류시인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한 구절입니다.
 "사는 동안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다면 서둘러야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첫눈이 내리기 전에…. 아버지의 눈 아래에서 애들이 자란다. 할아버지의 눈동자에서 손자가 태어난다. 그런데 그들은 나이를 세지 않았다 ….
 악이 승리할 때 선은 숨는다. 선이 나타날 때는 악은 숨어서 기다린다.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억압할 수는 없다 …. 그러기에 기쁨이 있더라도 이면에는 불안이 있고 절망 속에서도 항상 조용한 희망이 있다. 삶이 길다고 하지만 언제나 짧은 것이다. 새로이 무엇인가 하기에는 너무 짧다."
 만장하신 동문 여러분! 모교란 언제나 자애로운 어머니가 있는 곳입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모교-어머니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인이 이 지구촌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별들은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동문들이 떼지어 덕성을 보이면 큰 빛을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의 명예를, 무거운 멍에로 알고 인생 만년의 미학을 찾으면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교수.문화기획.장관으로 활약
  
   "50년 만에 동문들과 첫 단체사진"

          
               중앙일보 李御寧상임고문


李御寧동문은 1956년 모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시절 평론 '李箱論'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20대의 젊은 나이에 우상화된 기성문단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 평론 '우상의 파괴'를 통해 문단에 오른 이후 당대 최고의 비평가들과 전후세대 비평가로서 큰 활약을 해왔다.
 특히 李동문이 1962년 일간지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의 건축과 의상, 식습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큰 호평을 받았으며, 월간 문예지의 초대주간,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대학교수, 기호학 연구소를 한국 최초로 설립하고 88서울올림픽 개 ?폐회식을 세계적인 이벤트로 만든 문화기획자, 그리고 초대 문화부 장관의 역할까지 고희를 넘은 오늘날까지도 학계와 문화계 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이뤘다.
 또한 최근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성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언함으로써 정보화의 양극화에서 벗어나 후기정보화사회의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등 국가 사회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해오고 있다.
 수상경력으로는 197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2년 일본 디자인문화상, 2001년 서울시문화상(문학부문), 2003년 제48회 대한민국 예술원상(문학부문) 등이 있다.

수상 소감 〈요지〉

 저는 부끄러운 생각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서 서울대학교를 다닐 때 서울대생이라는 느낌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진을 찍지만, 당시 폐허가 된 교정에는 전문사진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루는 제가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참 이상하다. 특히 문리대생들은 참 못됐다. 다른 대학에선 전부 단체사진을 찍는데 너희들은 몰래 와서 독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찍어도 3~4명이서 몰래 찍는다. 왜 서울대 학생들은 단체사진을 찍을 줄 모르느냐?"
 저는 그때 그 뜻을 잘 몰랐고, 계속해서 독사진만 찍어온 것 같습니다. 이 상을 타면서 비로소 오늘, 50여 년 지난 후에 처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모교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이라고 했지만, 어떻게 한 개인이 서울대학교의 자랑이 되고, 서울대학교를 빛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께, 그리고 미래의 구상을 하고 있는 서울대학교가 참으로 놀랍고 그리고 세계에서 으뜸가는 지식인 집단이자 한 공동체로서 전 세계에 자랑스러워질 때 저도 함께 자랑스러워지고, 오늘 이 자리에서 상을 타시지 못한 동문 여러분들과 함께 이 귀한 표창을 받는 날이 기필코 오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여러분들께 부끄러움과 사죄로서 제가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한, 50년 후에서야 처음으로 느끼게 된 이 날을 길이 간직하면서,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서울대학교의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함께 한번 단체사진을 찍고자 합니다.



     유전암호 해독 등 생명과학 선도
  
   "서울대는 정서적 성장 이끈 스승"

                
                   UC버클리대 金聖浩교수


金聖浩동문은 1960년 모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美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대학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듀크대 의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1974년부터 현재까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교 교수, Calvin 연구소장,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에 재직하면서 구조생물학을 통한 생명과학 연구에 헌신해왔다.
 金동문은 1974년 생명체 내 유전암호를 해독하는데 필수적인 생체물질 중 하나인 전달 RNA의 3차원 구조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으며, 1988년 라스(Ras) 단백질의 분자 구조를 세계 최초로 해석함으로써 인체의 모든 암 중 절반 정도에서 발견되는 이 단백질의 돌연변이가 어떻게 암을 일으키는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최근에는 모든 단백질 구조들로 구성된 '단백질 세계(protein structure universe)'에 대한 개념적 지도 작성에 성공해 현존하는 모든 단백질 구조들의 상호 관련성을 총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수상경력으로는 1987년 Lawrence상, U.S. Energy상, 1988년 N.I.H. Javits Claude Pepper상, 1989년 Princess Takamatsu 암연구상, 1992년 은탑산업훈장, 1994년 호암상 과학상 등이 있다.

수상 소감 〈요지〉

 며칠 전 한국에 도착해 모교를 회상해보니 역시 학창시절 기억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서울대학교가 개교한지 10년, 10살이 됐을 때 모교를 입학했습니다. 그땐 혜화동에 문리과대학이 있었죠. 또 생각해보니 나의 지성적 혹은 정서적인 성장기가 우리 학교의 성장기와 함께 자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 와서 천천히 생각해보니 그렇더군요. 그래서 저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불안한 시기였지만 지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모교가 저에게 얼마나 큰 역할을,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압니다. 그리고 그 당시 형성된 인생관이 진화해서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해줬습니다. 불안한 시기였지만 모든 것이 낭만적이었고, 모든 면에 있어 모교는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지식이 좌우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현재까지 한국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필요한 인적자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교육기관으로서 앞으로 그 책임이 더욱 크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모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에서는 모교와 같이 훌륭한 인적 리소스를 지닌 교육기관의 중요성이 점점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 후배 재학생들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낼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마음에 항상 품고 캠퍼스시절을 보낸다면 여러분의 대학생활은 언제나 'exciting'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李長茂총장께서 선포하신 서울대의 여러 가지 비전들이 반드시 성공되기를 기원합니다.



     한민족 정서 담은 음악작품 선봬
  
   "시공 초월한 영상 ?음악교류 기대"

                    
                  브레멘국립대 朴泳姬교수


朴泳姬동문은 1969년 모교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74년 독일 학술교류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독일 프라이브루크 국립음악대학에서 작곡 및 음악이론, 피아노를 전공해 뛰어난 음악성과 성실한 성품으로 대학교수와 동료뿐만 아니라 많은 독일인의 귀감이 됐다.
 朴동문은 1978년 '클라리넷과 현악 3중주를 위한 만남'으로 스위스 보스뷜의 제5회 세계작곡제에서 1등상, 이듬해인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Rostrum of Composers 1등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활발하고 다양한 작품활동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인정받은 朴동문은 1994년 독일어권 나라에서는 여성최초로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 작곡과 주임교수로 임명돼 부총장에 오르는 등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의 위상 제고에 이바지했다.
 해외에 있으면서도 朴동문은 한민족의 정서를 품위 있는 세계의 음악언어로 승화시켜 한국인의 위상을 빛내고, 모교의 명예를 크게 드높여왔다.
 수상경력으로는 1979년 난파음악상, 1995년 하이델베르크시 여성예술가상 등이 있다.

수상 소감 〈요지〉

 제가 독일로 떠나기 전 새로 이사하게 된 이 교정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때 음대 학생들과 함께 제가 심었던 나무들은 여전히 이 교정 어딘가에 잘 자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유럽에 있는 동안 그 나무들은 저에게 이 교정의 소식들을 전해줬기 때문입니다.
 80년대 그 암울하고 가슴아팠던 사연들을 저는 마음의 귀로 듣고 함께 공감했습니다. '소리' '타령' '님' '지신굿' 등의 제목을 지닌 제 음악작품들은 몸은 멀리 있지만 마음의 귀를 열고 항상 함께 했던 고향과 모교에 대한 그리움이 반영돼 있습니다.
 이런 나무들이 가장 최근에 저에게 전해준 것은 모교에 새로운 전자음악연구소가 설립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귀로 듣는 나무들이 일반적인 소식뿐만 아니라 이제는 시속과 시공을 초월하는 쌍방간의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이며, 전자 ?영상음악을 통한 창작활동의 세계화를 기대해 봅니다. 이제 그리운 교정에 32년만에 다시 돌아와 이 자리에 서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