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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호 2006년 10월] 문화 꽁트

콩트 릴레이


  


   
   침묵을 흔드는 바람




   崔 文 僖
  (본명 崔慶林. 지리교육54-58)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퍼 시즌'이라는 간판 아래 '새콤달콤한 그녀의 샐러드'라는 길고 해설적인 간판이 겹치기로 붙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와인을 물에 희석한 듯한 묽은 자줏빛이 아늑한 양감으로 다가온다. 희붐한 조명등에 눈을 익히고 서 있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창가 구석자리에 박양자 씨가 앉아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익은 얼굴은 각별하다. 양자 씨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이너다. 그녀는 두 학기 등록으로 마감한 가정대학교 동문 선배다. 그런 인연으로 그녀의 패션쇼에 들락거렸고, 파리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났다. '플라스 21'이라는 패션 화보를 찍기 위한 파리 행이라 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로 가기 위해 층이 진 양탄자의 어둑한 통로에 한 발을 내리는 순간 무언가 내 뒷덜미를 확 잡아챈다. 카운터 뒷벽으로 눈이 간 건 커다란 흑백 액자 위에 걸린 매 같기도 하고 갈매기 같기도 한 새의 박제, 이미 사물화된 그 날짐승의 두 눈이 불을 물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섬뜩한 전류가 등골을 타고 내린다. "저런 걸 식당에 걸어두다니, 엽기야." 중얼거리며 양자 씨의 맞은 편 자리에 가 앉는다.
 "보셨군요. 나도 오늘에야 발견했지 뭡니까. 오래된 흑백사진이라 잘 못 알아 봤는데, 자세히 보니까 김지민 씨, 맞죠?"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다. 내가 바라본 건 박제된 새의 빨간 눈인데, 양자 씨는 벽에 걸린 커다란 흑백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카운터 뒷벽에 걸린 커다란 흑백사진, 영정사진을 연상시키는 검고 두터운 나무 테에 갇힌 사진 속의 다섯 사람, 심장을 향해 쇠못을 내리 박는 듯한 아린 통각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치며 달려든다. '진리'라는 두 글자 위에 부조된, 이 대학의 트레이드마크인 열쇠의 조각상 앞, P의 졸업식 날 불어불문학과의 소위 진골이라 스스로 명명한 선후배들이 어우러져 찍은 사진이다. 그날은 날씨가 고약했다. 3월 28일, 잔뜩 흐린 하늘엔 비도 아닌, 눈도 아닌 진눈깨비가 날렸고 체감 온도가 영하로 느껴질 정도로 추웠다. 키가 크고 윤곽이 선명한 P의 오른팔에 매달린 게 나, 왼쪽 팔에 찰싹 붙어있는 쪽이 바로 강문지, 그녀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 누가 누구를 먼저 알았고, 누구로부터 연결됐는가 하는 문제는 속물적 사고의 추출물이 아니던가. P가 나에게 친구도 애인도 아니었듯이, 강문지에게도 그냥 어정쩡한 관계의 미로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을 것이다. P와 내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시간의 부피를 두고 그가 내게, 혹은 내가 그에게 소속됐음을 천명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랬다고 해도 과의 모든 선후배들은 공공연히 알고 있었다. 쟤네들 지겹게도 붙어 다니네. 혼자서 식당에라도 가면 왜 혼자냐고, 내 뒤를 살피며 그의 부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했다.
 "어디 불편하신가 봐요. 얼굴이 영 아니네요." 휘청거리며 걸어가 앉는 나를 양자 씨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저 사진이 왜 여기 붙었을까요?"
 희미한 웃음기를 깨문 양자 씨의 얼굴이 아래위로 끄덕거린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깜짝 놀라실 일이 있을 겁니다."
 양자 씨 앞에 놓여있는 컵을 끌어당겨 한 모금 목구멍으로 흘려 넣자 발포성 백포도주가 편도를 찌른다. 건조한 비행기 안은 늘 목에 염증을 일으킨다.
 P의 졸업식 날 밤, 술 한 방울 입에 넣지 않고 맨송맨송 앉아있던 강문지는 장이 고장 나서 미안하다고, 미리 선포를 한 상태였다. P 역시 평소 때와는 달리 술을 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 금요일 관악캠퍼스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에 그들 두 사람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과주임 황교수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몰랐나? 어학연수 갔어. 어제 인사차 들렀더군."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사진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말을 잃었었다. 내가 끌어안았던 침묵은 그들이 내팽개치고 간 배신의 속물성 때문은 아니었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문지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엠티에서의 첫날 겨자 빛 헐렁한 스웨터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긴 생머리를 어깨 위에 흐트러뜨린 문지는 자기소개 대신 엘리엇의 '초원의 빛'을 원어로 낭송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전 문지는 고개를 쳐들고 결연한 어조로 그 말을 했다. "난 존재의 그늘에 살지 않고 햇빛 바른 양지에 살기 위해, 반드시 내 몫의 햇빛을, 내 것으로 사수하기 위해 이 대학에 입학했어요. 서울대라는 이 간판이 내 삶의 바퀴가 돼 줄 겁니다." 했던가. 모두들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요, 강 사장님. 여기 누가 와 있는지 와 보세요. 기절하지 않을까, 몰라."
 우리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보헤미안 룩의 세련되고 멋스러운 여자, 늘씬한 키, 커다란 타원형의 귀고리, 주렁주렁 매단 목걸이하며, 강문지가 분명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강문지가 내 존재의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유입된다. 흐르는 물처럼, 거스름이 없는 동작으로, 9년이라는 먼 간극을 무시한 채 희고 고른 치아를 활짝 열어 반가움을 머금은 요정 같은 얼굴로, 두 팔을 커다랗게 벌려 덥석 나를 안으며 볼을 비빈다.
 "지민아, 정말 오랜만이다. 어쩜 넌 그대로야. 10년 전 그대로라니까. 이 통통한 뺨이며, 지나치지 않은 소박함까지.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면 믿어줄까."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를 내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시기, 내 삶의 중동을 단칼에 베고 달아난 그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운 존재가 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노라 읊조리고 있다.
 "너, 강문지-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 말은 소리를 삼킨 채 내 안에서 복대기칠 뿐이다.
 "그래, 그래. 이야기는 밤새도록 하고, 우선 먹어야지."
 주방 쪽으로 가면서 와인이며 음식을 시키는 문지의 궁굴리는 듯한 불어가 내 귓가에 이명처럼 서걱거렸다.
 학부 3년 동안, 우정은 한갓 표피적 둘레였을 뿐, 내 내면의 실상은 늘 피 흘리고 짓물러 생살이 차오를 겨를이 없었다. "지민이 넌 천사야. 우리의 우정은 필요와 인식을 위한 겉치레가 아니라, 우리들 여린 영혼을 꼭꼭 싸안을 조각보 같은 예술품이지." 라고 했던 강문지.
 이런 일이 있었다. 1학기 종강하던 날이었을 것이다. 관악산 등선머리에 걸린 하늘은 파랬고 초록을 뭉개 놓은 듯한 서늘한 그늘은 싱그러웠다. 그런 화사한 풍경이 아니더라도, 비록 그곳이 초토화된 황량한 폐허라 할지라도 관악캠퍼스라는 프리미엄만으로도 거긴, 젊은 피들의 천국의 다름 아니었다. 청바지 입은 문지와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짧게 입은 내가 잔디밭에 앉아 노닥거리는 일당의 남학생들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파티 걸인가? 여기가 무슨 패션쇼장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지-문지가 내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화내지 말고, 유머로 응수해." 그리고는 내 귀에 그 말들을 입력시켜 주었다. "이 찬란한 여름잔치를 축하하기 위한 의상, 뭐 문제 있어?" 그 순간 모두들 고개를 쳐들어 하늘과 나무들과 관악 자락에 폭 파묻힌 캠퍼스의 그 절대의 우월성을 만끽하고 있었다.
 "강 사장에게서 조금 들었어요. 박 선생님하고 파리에는 같이 왔지만 1년도 안 돼서 그분은 뉴욕으로 가셨답니다. '퍼 시즌' 시작하기 전까지 고생 많았어요. 초기엔 여행사 가이드도 했는데, 그때 만났지요. 걱실걱실해 뵈는 겉보기완 달리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것 같아요. 늘 지민 씨 이야기를 하던데요. 자기가 운명적인 떠돌이가 된 건 누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영원히 방황하는 화란인이랍니다. 술 마시면 울어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울어요? 강문지가 운다고요? 어림없어요. 눈물 같은 거 흘릴 사람 아니에요."
 어둑한 구석지에서 불쑥 나타난 강문지가 하얀 봉투를 내민다.

  "많이 기다렸지. 이거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티켓. 10년을 축적해둔 선물. 유세하는 건 아니지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티켓이야."
 내가 그 공연을 보고 싶어한다는 걸, 아마도 양자 씨한테서 들은 모양인가, 오만가지 감회가, 수많은 단어들이 깨물린 입술 안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린다. 입술이 안 떨어진다.
 "너도 알겠지만, 요즘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피나 바우쉬의 안무 정도는 꼭 봐야겠지. 무용수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연기자가 돼 수많은 삶의 파편들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유, 육체의 완벽성에 대한 콤플렉스의 표현기법은 아주 탁월해."
 어색한 분위기를 어우르려는 듯 양자 씨가 끼어 든다.
 "이 새콤달콤한 샐러드 무슨 소슨지 오늘은 기필코 그 비결을 공개해야 돼요."
 침묵이 이어지고,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와인만 홀짝인다.
 "뭐라고 말 좀 해 지민아!" "이건 내 생존의 확대이고, 삶의 방편이야. 그래, 나 도망쳤어. 너도 알겠구나. 전임자리라는 게 바늘구멍 헤집고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 그 철통같은 문턱에 다리를 걸고 있었던 가여운 불어과 족속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정작 불어가 들어가 있는 학교가 몇 개교나 되는데, 그깟 놈의 잘난 졸업장 가지고 뭘 해먹니? 고급 백수만 바가지로 쏟아내는 그 엘리트대학이라는 명칭조차 혐오스러웠어. 펜으로 진리의 불을 밝히고 월계관을 머리에 얹은 우수분자들이여, 다섯 명도 좋고 열 명도 좋다며 대량 출산에 걸신들려, 주례사를 남발하던 사회학과 허○○교수의 그 DNA 예찬론은 정말 가관이었지. 너희들의 그 옹골찬 고정관념이나 천년이 가도 부식하지 않을 비닐 같은 편견 나부랭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도덕이라는 것도 너희들 가진 자들의 철옹성 같은 방어벽이었지."
 껄끄럽고 강박한 어투로 말을 쏟아내던 강문지가 나를 향해 각지게 돌아앉는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지민아, 입술에 본드 붙였니?"
 "그만해. 자기 합리화가 지나치면, 위선보다 더 위험한 해악이라는 탈바가지를 쓰게 돼."
 와인으로 마른 입술을 적셔 보지만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슴 한 자락에 잔잔히 스며드는 새콤달콤한 그녀의 샐러드 향이 부어오른 편도를 지그시 눌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