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343호 2006년 10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개교 60주년 기념 선후배 캠퍼스 데이트

46. 61. 76. 91. 06학번 캠퍼스 데이트


 관악캠퍼스 교수회관 잔디밭에서 좌로부터 李泰鎭,吳燾年,趙弼濟,申아람,李元一동문 <사진 李五峰(교육학61-70) 아주대 겸임교수>

46. 61. 76. 91. 06학번 캠퍼스 데이트

새로운 60년 향해 한마음으로 힘차게 '점프'


개교 60주년 기념 선후배 캠퍼스 데이트

"서울대가 내일의 세계를 이끈다"

●일 시 : 2006년 9월 19일 정오
●장 소 : 모교 호암교수회관 및 교정

●사 회 : 본보 尹在錫논설위원(국민일보 논설위원)

〈참석자〉

 ●46학번 趙弼濟(조선항공46-50)세양주택 회장
 ●61학번 李泰鎭(사학61-65)모교 인문대학장
 ●76학번 李元一(법학76-80)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91학번 吳燾年(의학91-97)모교 병원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06학번 申아람(약대06입)모교 약대 기초과정 1학년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발효로 출범한 서울대학교가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모교는 그동안 국내외 각 분야 리더를 숱하게 배출했고, 스스로도 비약적이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뤄냈다.
 대한 시각이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서울대 무용론'과 '서울대 흔들기'가 공공연하게 횡행하는가하면, 제도적으로도 우수학생을 뽑을 변별력을 약화하는 규정을 남발해 '서울대 위기론'마저 나오고 있다.
 본보는 개교 첫해에 입학한 46학번을 필두로 06학번에 이르기까지, 15년 터울로 모두 다섯 분의 동문을 초치해 서울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주〉


좌담자 선정 경위

 개교 60주년 기념 특별좌담회는 참석 동문을 선정하는 작업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재학생을 포함해 30만 가까운 동문 중에서 도대체 누굴 참여시킬 것인가!
 한 동문이 아이디어를 냈다.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한 1946년 입학생 한 분과 올해 새내기 입학생 한 사람을 뽑아 대담을 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럴 듯한 제안으로 수용돼 그대로 추진키로 했다.
 우선 1946년 입학생 중 생존 동문의 명단을 살피고 그 중에서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을 모시기로 하고 다섯 분으로 압축했다. 다각적인 접촉 끝에 참여에 적극성을 보이신 趙弼濟동문(세양주택 회장)이 선정됐다. 비교적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2006년 새내기 입학생 대표를 선정하는 작업은 좀 복잡했다. 4천명 가까운 새내기 중 젠더의 형평성을 고려해 일단 여학생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모교 홍보부에 연락했다. "문사철(文史哲)과 이공(理工)을 망라해 10명 정도의 여학생 명단을 달라"고. 나름대로 관리하고 있는 '얼짱 파일'이 있다며 즉각 보내 왔다. 46년 입학생과의 전공 안배 상 인문계열 여학생이 낙점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좌담회 추진 막바지에 총동창회 수뇌부 모임에서 인원을 늘리기로 하자는 전갈이 온 것이다. 판을 다시 짜야 했다. 역시 참석자 안배가 큰 난제였다. 그리하여 1946년부터 15년 터울로 대표를 뽑기로 했다. 그 결과 61학번, 76학번, 91학번이 추가됐다.
 단과대학과 진출 분야, 젠더의 안배가 역시 최우선 고려 대상이었다. 결국 61학번 대표엔 현직 교수인 李泰鎭동문(모교 인문대학장), 76학번 대표엔 법조인인 李元一동문(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그리고 91학번 대표엔 吳燾年동문(모교 병원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이 각각 선정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06학번 새내기 역시 인문계열이어서 李泰鎭동문과 중복된 것이다. 결국 본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대 약학계열 새내기 申아람 양으로 대체했다.
 이에 따라 세대별, 단과대학별, 분야별, 젠더 안배가 그런 대로 조화를 이룬 구성이 됐다.





사 회 : 우선 각 분야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동문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시고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돼 무척 기쁩니다. 서울대가 다른 대학에 비해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개교 60년은 한 획을 긋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변곡점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다니셨던 시대별로 회고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趙선배님께서 1946년 당시 서울대가 국립대학교로 태어날 때의 이야기부터 해주시죠.
 趙弼濟 : 당시 경성제국대학과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 8월 미 군정청이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을 발표하고 미국인 해리 앤스테드 씨를 초대 총장으로 임명하자 좌익 학생들이 주축이 돼, 소위 국대안 반대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합니다. 경성제대 소속 학생들은 학교를 하향 평준화하는 작업에 반대한다는 논지였고, 기타 학교 소속 학생들은 미 군정청이 학교를 관리하기 좋도록 하나로 묶는데 우리가 왜 들어가느냐며 음모론을 제기했죠.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체로 관망하는 편이었고 나중에 서북청년단출신 중심으로 찬성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하게 됩니다.
 李泰鎭 : 저는 5. 16군사정변이 일어난 해에 입학해서 한일기본조약이 비준된 65년에 학부를 졸업했는데요. 그 때 역시 격동의 시절이었습니다. 한미행정협정 이슈(67년 체결)까지 쟁점으로 부각돼서, 그야말로 데모의 연속이었죠. 연좌농성도 다반사였고요.
 사 회 : 李元一동문은 관악캠퍼스시대 1세대죠?
 李元一 : 캠퍼스는 75년에 문을 열었지만, 교양과정부는 76년에 옮겨왔죠. 그래서 제가 1학년부터 관악캠퍼스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첫 세대입니다. 유신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학교를 다녔죠. 데모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요. 하지만 절대독재는 결국 터져 나오는 봇물을 막지 못했습니다. 79년 급기야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게 되고 10. 26사건이 나게 되죠.
 사 회 : 관악캠퍼스 앞에 대대병력의 전투경찰이 진을 치고 있던 세계 최대의 파출소가 있었던 것도 유신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죠.
 吳燾年 : 저희는 자유도 만끽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풍성한 시절이었던 때여서 인지 데모도 별로 없었고 평온했습니다. 특히 저희는 본과에 가면 죽었다고 복창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예과 시절 마음껏 놀았던 기억이에요.
 申아람 : 선배님들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역사책을 들춰보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대학생활이 얼떨떨한 편이죠. 이제 차근차근 대학생활의 틀을 잡아가려고 해요.
 사 회 : 사실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에 공헌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본령일 텐데요. 서울대 하면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인재 양성소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죠.
 趙弼濟 : 저는 공학을 공부해서 줄곧 그 분야에서 일을 해왔는데요. 당시 우리 쪽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빨리 해결해야 하느냐가 과제였죠.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대한조선공사에 들어가 배를 만들었는데, 12시간 2교대로 일년에 3백30일을 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피곤하지도 않았고 불만도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저를 비롯한 동료들이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로 일가를 이뤘고, 나라도 이만큼 발전했지 않았습니까.

"인성교육. 인문학 강화해 명실상부한 지성인 키워야"
"서울대 법인화는 초일류대학 향한 당위적 과정"

사 회 : 최근 통계를 보니까 세계 10대 조선기업 중 1위에서 5위까지가 한국기업이더군요. 그걸 보면서 조선계통에 종사하신 선배님들의 수고가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머리가 숙여지는데요. 지금은 조선과 항공이 분리됐지만, 선배님 다니실 땐 조선항공공학과였죠? 무슨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趙弼濟 : 사실은 제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당시 몇몇 동료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필요한 게 뭘까 고민하다가 신생 대한민국에는 배도 필요하고 비행기도 필요할 테니,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기투합했죠. 저희 뜻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쾌히 수락하셔서 일단 조선항공공학과를 창설하게 됐죠. 제가 1회 졸업생입니다.
 사 회 : 숨겨진 역사네요. 李선배님께선 서울대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李泰鎭 : 광복 후 우리 민족의 주요 과제는 역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실현이었죠. 서울대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실현하는데 '힘의 공급체'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와 기업 등에서 경제발전의 브레인이자 견인차 역할을 했고, 제도권 안팎에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그 과정이 때론 반체제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고요. 아무튼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발전에 서울대가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죠.
 사 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의 위상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울대 망국론', '서울대 폐지론'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그냥 간과하기보다는 나름대로 분석과 대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趙弼濟 : 단연코 말하건대, 서울대가 대한민국의 성장과 민주발전에 기여한 부분을 도외시하고 비판과 깎아내리기를 하는 세태에 분노합니다. 이 문제는 동문 여러분이 적극 나서서 진화해야 합니다.
 李元一 : 대학 순위 매기기에서 서울대가 1위 자리를 빼앗겼네 어쨌네 하는데, 사실 우리가 지금 국내 대학하고 경쟁할 때입니까? 옥스퍼드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도쿄대, 칭화대, 싱가포르대하고 경쟁해야죠.
 우리의 경쟁상대가 밖에 있는데, 왜 자꾸 안에서 서울대의 위치가 어떻네 저떻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대 출신이니 법조계와 관련해서도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였네 정치 검찰이네 합니다. 독재 시절 일부 그런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우리 법대 출신이 주도하는 한국 사법시스템이 미국은 물론, 어느 나라보다 위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현직 대통령의 자제나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우고 단죄한 나라가 있습니까? 기억하시겠습니다만, O.J. 심슨 사건 보십시오. 그야말로 유전무죄 아닙니까? 요즘도 사법부의 공정성 시비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 사법부, 자부심 가져도 좋습니다.
 吳燾年 : 저도 李선배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선 제반 인프라가 미흡한 가운데에서도 모교 의대 선배님들이 다져놓은 의학분야의 업적은 지금 세계와 어깨를 겨룰만한 경지에 와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저의 경우 임상분야를 전공하고 있지만, 총체적으론 바이오 기술(BT)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분야야말로 세계가 경쟁대상입니다. 국내에서 오물딱조물딱할 게 아니거든요. 글로벌 경쟁시대에 좀더 시각을 넓히고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申아람 : 아직 기초과정에 있지만, 약학분야에서 선배님들 못지 않은 인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李泰鎭 : 서울대의 위상에 대해서 공론이 많은데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서울대가 대한민국의 발전과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기여한 부분을 간과해선 절대 안됩니다. 그건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들어 나라가 전반적으로 선진화돼서 다른 대학도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대가 평가절하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학창시절에 있었던 낭만이나 추억을 나눠보죠.
 趙弼濟 : 저는 월요일이면 지금은 없어진 성동역(제기동 미도파백화점 자리)에서 출발하는 기동차를 타고 신공덕역(공릉동 소재)에서 내려 학교에 갔고, 평일엔 학교 근처의 초가집에서 하숙을 했죠. 기동차에서 당시 상당히 희소했던 공대 여학생과 남학생이 서로 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럽고 신기했던지…. 초가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밤새워 나라의 발전을 위해 토론했던 기억도 납니다.
 李泰鎭 : 저희 때는 데모는 많았지만, 수업은 빼먹지 않았습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슈로 한창 시끄러울 때 문리대 정치학과 주최로 당시 金鍾泌 공화당 당의장을 초청해 토론을 벌였던 일화를 소개하죠. 학생 토론자들이 날카롭게 칼을 갈아 질문을 들이댔는데, 金鍾泌씨의 논리를 당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金鍾泌씨는 경제발전의 시급성을 화두로 한일기본조약의 당위성을 설파했는데, 참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 회 : 그분도 경성사범출신입니다.
 李元一 : 법대생이야 그야말로 법전에 코 박고 사법시험 공부하는 것이 전형적인 생활입니다만, 2학년 때인가 파트너와 함께 축제라는 데 처음 참석해서 농대 출신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스의 노래도 듣고 그랬는데요. "야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吳燾年 : 저희 때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여서 그랬는지, 친구들이 연애도 많이 하고 많이 놀러가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도 의대 공부하면서 별로 힘들었다는 생각이 안들어요.

"우리의 경쟁상대는 밖에 있다"




趙弼濟 회장





李泰鎭 학장




李元一 부장판사





吳燾年 전문의





申아람 학생


사 회 : 요즘 캠퍼스는 어떤가요?
 申아람 : 자신의 진로에 고민하고 진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관심과 학업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李泰鎭 : 제가 학교에 있으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게요. 새 학기 들어서 어느 과목을 개설했는데, 수강신청이 쇄도해 난리가 났습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김아무개라는 탤런트가 수강신청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시간 하고 나자 무더기로 수강 취소사태가 벌어졌어요. 동명이인이었다네요. (폭소)
 사 회 : 후배들에게 주실 말씀 좀 해주시죠.
 趙弼濟 : 저는 공학도였지만, 인문학과 강의를 적극적으로 들었어요. 동국대 교수였던 梁柱東씨의 강의도 듣고 역사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서울대생일수록 인성(人性)을 갖춰야 합니다.
 李泰鎭 : 제가 드릴 말씀을 먼저 해주셨네요. 요즘 인문학 위기다 뭐다 하는데, 대학이, 그리고 교육이 우리의 미덕을 지워버리는 데 골몰하지 않았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이거든요.
 申아람 : 저희도 그런 부분이 좀 아쉬워요. 학교에서 좋은 교양과목을 많이 개설해주시면 좋겠어요.

"서울대 법인화는 초일류대학 향한 당위적 과정"

사 회 :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앞으로의 서울대가 나아가야 할 향방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李泰鎭 : 모교에 봉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서울대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즘 서울대 법인화에 대해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실제로 구체적으로 추진이 되고 있습니다만, 서울대 법인화 문제는 바로 미래의 서울대를 어떻게 그려 가느냐는 것에 관한 작업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서울대는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 양성을 담당해 왔습니다. 재정도 정부 예산에 의존해 운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국가 인재 양성의 책무가 사라졌고, 글로벌 경쟁시대입니다. 李元一동문 얘기처럼 옥스퍼드대, 하버드대가 우리의 경쟁상대입니다. 초일류대학이 되려면 독자적인 재정 확보와 경쟁력 구축이 필요합니다. 법인화는 그 툴(tool)이죠. 그렇기 때문에 동문 여러분께서 모교 법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외국의 명문대처럼 기부도 많이 해주시고 해야 서울대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李元一 : 모교에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대생 하면 천하의 인재들인데, 왜 졸업하고 나서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가능한 수업부터 아예 영어로 해버리면 적어도 졸업 후에 영어 못하는 서울대생 소리는 안듣지 않겠느냐는 거죠. 예를 들면 그렇다 이겁니다.
 吳燾年 : 저는 선배님들이 이뤄놓은 의학분야의 업적 토대 위에 또 하나의 벽돌을 얹는 심정으로 매진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울대 인력으로 차세대 성장동력인 BT분야를 충분히 석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申아람 : 오늘 선배님들의 귀중한 말씀 새겨서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겠습니다.
 사 회 : 2006년 시점에서 바라본 서울대의 위상, 입지가 예전 같지 않지만 동문 선후배님들 말씀 듣고 보니 든든하고, 서울대의 앞날도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정리=尹在錫논설위원. 사진=李五峰아주대 겸임교수〉


좌담 진행 뒷이야기

 9월 19일 낮 모교 후문 쪽에 있는 호암교수회관에 좌담회 참석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팔순의 노선배와 십대의 새내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를 모신 터라 화제의 교류가 조금은 걱정됐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런 우려는 한낱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얘기의 흐름이 너무나 화기애애하고 흥겨운 분위기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부터 개발독재 초기시대, 유신시대와 문민정부시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60년의 세월을 아울러 '서울대 동문'이라는 키워드가 모두를 하나로 묶어줬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이끌어온 서울대의 저력을 반추하는 동시에 세계의 내일을 이끌 저력으로 승화시키는 방안에 관해 나눈 얘기는, 한마디 한마디가 우국충정과 모교사랑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팔순 고령의 공학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식견과 인문학적 소양을 유감 없이 발휘하신 趙弼濟동문. 모교 인문대학장으로 서울대 법인화의 필요성과 과제를 설파해주신 李泰鎭동문.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서울대여야 한다고 역설한 李元一동문과 吳燾年동문. 수줍은 새내기이지만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소견을 또박또박 얘기한 申아람 학생.
 이분들은 한결같이 자기 세대를 대표할만한 대표선수였음을 새삼 느꼈다.
 또 하나 빠트려서는 안될 분이 있으니 바로 李五峰(교육학61-70)동문이다. 조선일보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하시다 지금 아주대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李동문은, 이날 수원으로부터 달려와 이 귀중한 모임을 영상으로 담아주셨다. 李동문은 특히 야외촬영 때 몸을 돌보지 않는 '구르기 전법'으로 촬영에 임함으로써 좌담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추신〉 귀로에 趙弼濟선배님이 조만간 참석자 전원과 저녁 식사 한번 하자고 제안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