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호 2006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民族과 겨레
民族과 겨레
李 東 官
동아일보 논설위원
본보 논설위원
철들고 民族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1976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뒤다. 朴正熙대통령이 개교 30주년을 맞아 쓴 '민족의 대학'이란 휘호가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사범학교 출신이라 교육을 중시하는 모양이다'라고 잠시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뒤 오래 잊고 있던 이 단어가 가슴에 부딪쳐온 것은 신문사에 입사해 1990년대 중반 東京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다. 일본열도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植民地 朝鮮'의 추억과 부딪친다. 재일 동포의 존재 때문이다. 일본사람들과의 토론 끝에 "당신들은 왜 일본에서조차 남북으로 갈려 싸우느냐"는 힐난성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당신들 탓'이라고 따져 보지만 그보다 분단의 현실에 가슴이 북받쳤다.
1998년 여름 신문사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결국 눈물을 쏟았다. 약간의 긴장과 전날 밤 남쪽 맥주보다 2도 높은 용성맥주에 타서 북한관계자들과 마신 '평양소주 폭탄주'의 숙취로 나는 묘향산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속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떠 내다본 청천강변의 풍경. 그것은 남녘 여느 강가와 조금도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왜 이렇게 갈려 살아야 하나"라는 감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이후 민족이란 단어에 담겼던 나의 순수한 감정에는 급속히 천덕살이 끼기 시작했다. 불순한 정치적 의미가 뒤섞여 汚染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2000년 6. 15 남북공동성명에서 '민족끼리'의 원칙이 천명된 뒤 민족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단어가 됐다. 시위현장이건, 학술회의에서건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면 '絶對 善'의 의미로 둔갑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알던 민족의 의미는 실은 '겨레'였다. '한 조상(단군)을 뿌리로 둔 자손의 무리'라는 정의처럼 혈연공동체 소속원이라는 소박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반면 민족이란 본래 정체불명의 단어. 1905년 러일 전쟁 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nation'의 번역어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오죽 민족의 의미가 복잡다단하고 빛이 바랬으면 '민족 창녀론'까지 나왔을까.
"민족은 늙은 창녀가 되었다. '민족적'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言)이고 누구나 탈 수 있는 말(馬)이 되었다."(연세대 유헌식 교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민족적 열정은 우리에게 여전히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세계적 보편성과 맞닿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세계 속의 대학'이 아닌 '민족의 대학'만으로서의 서울대학교가 21세기의 글로벌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개교 60주년을 맞아 내건 '겨레와 함께 미래로'라는 구호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겨레를 미래와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서울대학교를 꿈꾸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