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340호 2006년 7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知性이 쉬는 곳에 靈性의 빛이


  
   



     知性이 쉬는 곳에 靈性의 빛이
   
  金炯孝(철학58-62)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나이 耳順이 넘어서야 철학적으로 좀 철이 드는 것 같다. 우리는 대학에서 두 가지의 학문을 배웠다. 과학과 철학이다. 오랜 세월동안 서양학에서 철학과 과학은 동계열의 학문으로서 철학은 제 과학을 가능케 하는 형이상학적 또는 논리학적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학문의 어머니가 철학이고, 제 과학은 그 어머니에서 자란 자식들로서 비유돼 왔었다.
 이제 어머니는 늙었고, 그 자식들은 너무 커서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스스로 '철학의 종말'이라는 말을 썼고, 그 말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철학은 똑똑한 자식들인 제 과학의 발달을 보면서 그런 자식들을 키운 자신의 사명이 다 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지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철학적 요구는 어떻게 되는가?
 본디 서양철학과 과학의 가능근거는 지성이었다. 그래서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라고 명예스럽게 명명되었다. 지성의 역할은 사회생활을 보다 더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면서 합리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성의 수준이 한 사회의 일반적 발전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와 같았다. 사회생활의 무한한 발전역량이 역사의 목표처럼 여겨졌다. 철학도 이런 목표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근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늘 간주돼 왔었다. 그런데 철학 가운데 이런 목표설정과 무관하게 인간의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면 자연상태에로 환원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고심한 비주류적 철학자들이 가끔 존재했었다.
 이런 철학자들을 흔히 낭만적 공상가들이라고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면서 불렀다. 이들은 현실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상적 꿈을 꾸는 思辨家 비슷한 대우밖에 못 받는 그런 처지였다. 전통철학(과학과 함께 한)은 사회생활을 자연상태에로 일치시키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자연상태로부터 더 멀리 벗어난 문명을 지성의 척도로서 구가하기만 했다.
 이제 새로운 철학은 지성을 과학에 맡기고, 지성과 달리 그동안 지성에 눌려왔던 영성의 소생을 시도하는 그런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 그것은 반지성적 공상에 의존하려는 낭만적 이상이 아니고, 아주 사실적으로 영성의 길을 밝히려 한다. 지성의 학문은 지식으로 대상을 소유하려 하나, 영성의 道는 지성의 소유론을 멀리하고 오히려 세상을 존재하는 원초적 모습 그대로 觀照하고 그 세상의 원초적 事實을 가장 귀중한 진리의 道로서 받들고 따르려는 시도를 한다.
 지성은 정복자의 길을 가려 하나, 영성은 정복된 것들을 해체하거나 해방시키려는 해방자의 길을 가려 한다. 이 영성에 의한 해방의 길은 그동안 간간이 있어 온 인간의 사회상태를 자연상태와 거의 일치하게 복원시키려는 그런 길을 밟으려 한다. 이 길을 흔히 재래의 사고방식대로 공상적 낭만주의나 이상주의의 신념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상주의는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지만, 그 반작용도 실은 현존적 현실상태를 더 좋게 개선해 이상의 신념으로 새로운 사회상태를 장악하려는 백일몽의 표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낭만적 이상주의는 늘 새로운 소유주의적 공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영성의 道는 저런 공상적 이상의 소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 영성은 지성의 소유욕이 고요히 쉬는 곳에 영성의 지혜가 솟아오르면서 진리를 현시한다.
 지성의 의욕이 쉬는 곳에 영성의 빛이 솟는다. 그 영성의 빛은 소유하고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고, 해방하고 모든 것들이 자유스럽게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존재론적 사유와 아주 닮았다. 존재론적 사유의 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존재하도록 도와주는 사유다. 新철학은 지성이 아니라 영성의 빛이 세상을 비추도록 사유를 새로 배우게 한다. 이것이 미래의 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