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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2004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디지털시대 한국방송의 메카로 자리잡겠다“

대한골프협회·SBS 尹世榮회장

대담:본보 朴聖姬 논설위원(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저금·쌈짓돈 모아 37세에 태영개발 창업 
제2창사 선언…방송경영 전문가에 맡길 터

SBS 尹世榮회장이 최근 대한골프협회 회장에 취임한데 이어 서울 목동 SBS 신사옥 이전 기념식에서 『방송의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겠다』고 선포, 주목을 끌고 있다. 尹회장은 모교 법대 동문(1961년 졸업)으로 SBS 회장이자 서암학술장학재단과 SBS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에 힘쓰는 우리시대의 대표적 기업인이며 언론인인 동시에 체육인이다. 골프는 핸디캡 16에 홀인원을 세 번이나 한 막강한 실력이고, 노래는 잘 못하지만 송대관의 「해뜰날」을 즐겨 부른다는 尹회장을 만나 「살아온 길, 인생 철학,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등을 들어봤다.

  - 안녕하세요. 대한골프협회 회장 취임, 새사옥 이전 등 축하드릴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사옥을 보니 중정식 로비가 시원하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줍니다. 본격적인 방송사 사옥으로 지으신 만큼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특별히 어떤 대목에 신경쓰셨는지, 또 건축의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건축의 기본은 선, 면, 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미려하면서도 실용적인 건물이 됩니다. 그러자면 고도의 기술력과 정교함이 필요하지요. 거푸집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야 하구요. 태영의 건설기술이 정상에 오른데다 디지털시대의 방송국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정성을 다한 만큼 최고의 건물이라 자부합니다. 서울시 땅을 불하받았는데 마침 방송회관과 기독교방송, 스포츠조선 등이 인근에 있어 미디어타운이 됐습니다』
  - 동문들은 아무래도 그동안 회장님이 걸어오신 길, 삶의 지표, 인생철학 등에 대해 궁금해 할 듯합니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신데, 서울에는 언제 오셨는지요.
  『제 고향은 강원도 철원군 동성면 오지리입니다. 철원평야 근처인데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이었지요. 그런데 광복 후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던 선친께서 고향과 농토를 버리고 월남하셨지요. 1946년 한겨울, 온 가족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꽁꽁 언 한탄강을 걸어서 건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출가한 누이가 살던 경기도 포천에 잠시 머물다 한학자이신 큰 외삼촌이 계시던 양평으로 옮겨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지요. 서울로 온 건 6·25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세대는 다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가난하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어서 정말이지 어떻게 견뎌냈나 싶을 정도입니다』
  - 가족관계를 설명해주시지요. 부모님께서 특별히 중시하신 게 있으셨는지.
  『부모님은 소박한 농민으로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 열심히 일만 하셨지요. 그러다보니 늘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지런한 새가 모이도 더 구한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지요. 아버님께선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90세까지 장수하셨어요. 어머님은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품있고 당당하셨는데 막내인 저를 끔찍이 사랑하셨지요. 어머님의 사랑은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바로 밑 동생인 외삼촌이 일제 때 와세다대학을 나와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대한통운 사장을 지낸 임봉순씨고, 그분의 처인 외숙모가 추계학원을 설립하신 황신덕씨입니다. 외삼촌은 말 그대로 자수성가하신, 의지가 강한 분이셨는데, 어머님도 비슷한 성정이셨습니다』
  -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셨어요.
  『군에 있을 때였는데 처(卞金玉)는 당시 서울대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를 하고 있었어요. 외사촌 형수인 주영숙씨(현 추계학원 이사장 임형빈씨의 처)가 처와 대학동기여서 소개를 해줬지요. 처음 만난 뒤 호감을 가졌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못하고 사랑니를 치료해 달라며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사랑니의 뿌리가 깊어 뽑는데 몹시 힘들었던 모양인데 저를 좋아해 떠는 줄 알고 됐다 싶어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랑을 쌓다 1962년에 결혼했습니다』
  - 사모님께선 계속 진료를 하셨는지요. 자녀들은 현재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주시지요.
  『결혼 후 그만뒀습니다. 큰 딸(수연)은 출가해 전업주부로 남편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 열심입니다. 막내인 둘째딸(재연)은 성격이 적극적이고 일욕심도 많은 편이지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스위스와 미국에서 호텔 매니지먼트로 석사학위를 받고 신라호텔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미국 공인회계사(CPA) 자격도 땄구요. 지금은 태영CC를 관리하는 태영레저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아 여성 기업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들(석민)은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나왔습니다. 부자 동문인 셈이죠.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쳐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MBA과정을 마쳤습니다. 현재 SBSi 대표로 정보통신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손주 중에도 서울대생이 나와 3대를 잇는 동문 가족이 됐으면 합니다』
  - 자녀들에게 강조하시는 인생철학이 있다면.
  『「원칙에 충실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신체뿐 아니라 정신의 건강을 자주 얘기합니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사회 모두 원칙과 도덕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도(正道)보다 사도(邪道), 원칙보다 사술(詐術)이 살아가는데 일견 득이 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정도와 원칙, 도덕이 보답받는다는 게 확고한 소신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죠. 역지사지라는 생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정도와 원칙, 정직을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믿음을 갖게 된 데는 서울고 시절 김원규 교장선생님의 영향도 컸습니다. 「깨끗하고 부지런하라, 어디서든 없어선 안될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사춘기 시절 삶의 지표가 됐습니다. 전국의 영재들이 모여든 서울고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 것도 인생의 큰 행운이었지요』
  - 군에 입대해 논산에서 훈련받다 장교시험을 보셨다는데, 통역장교를 지내셨다구요.
  『법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는데 때마침 통역장교 모집공고가 났길래 응시했지요. 영어도 배우고 리더십도 키우고 민생문제도 해결하자 싶었어요. 월남한 뒤 계속 고학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장교생활을 하면 학비 조달도 가능하겠다 생각했지요. 요즘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군에 있으면서 3~4학년을 마치고 졸업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하고 시험만 치렀지요. 당시 서울법대는 학생과에 출석부를 두고 본인이 도장을 찍도록 했는데 친구들을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해서 도장을 찍게 했던 거죠. 지금도 그 친구들을 만나면 호기롭던 시절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통역장교 7기로 임관했는데 미군부대에 배치됐으면 하던 희망과 달리 춘천의 2군단 군단장실에 배속됐다 5·16 직후 朴炳權 국방부장관실로 발령받았어요. 임관 때 1등을 했던 덕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지요』
  - 李東寧의원 비서관을 지내셨는데 어떤 인연으로 만나셨는지요. 당시 배운 점과 이후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 게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李東寧의원의 고향이 경북 문경인데 처가도 문경이었습니다. 李의원의 자제들과 처남들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구요. 국회의원 선거 때면 처가가 李의원의 선거운동본부가 될 정도였지요. 李의원께서 6대 국회에 등원하면서 국방위에 배속되셨는데, 군을 잘 아는 사람을 구하다 보니 제가 발탁된 겁니다. 군에 있을 때 국방부장관 전속부관을 거쳐 제대 직전엔 육군참모총장실에 근무했거든요. 당시 배운 건 좋은 사람들과 한번 쌓은 인연을 잘 유지하면 사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사는 세상에서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오래 지속한다는 건 훌륭한 덕목이자 밑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李의원님은 공화당 경북 당위원장과 당무위원을 지낸 중진으로 많은 인맥을 갖고 계셔서 덕분에 저도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 37세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독립을 결심하신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업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李東寧의원 비서관을 8년이상 했습니다. 李의원이 8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셔서 함께 그만뒀지요. 李東寧의원이 경영하던 삼주개발 이사로 1년 정도 근무하다 비서관 시절 알게 된 분의 추천으로 미륭건설 영업담당 상무이사로 옮겼습니다. 3년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동안 「나도 하면 되겠구나」하는 자신감을 갖게 돼 10여 년간 저축한 돈과 아내가 허리띠를 졸라매 모은 쌈짓돈까지 끌어모아 창업자금을 마련했어요. 그렇게 태영개발주식회사를 창업한 게 1973년 11월이었습니다. 창업엔 앞서 얘기처럼 좋은 사람들과 맺은 인연을 최선을 다해 오래 유지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태영의 사훈을 「지성, 창조, 인화」로 정한 건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정신,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인간존중의 정신을 담자는 뜻이었지요』
  - SBS는 오래 전부터 골프에 많은 관심을 쏟아 왔는데요. 중계방송도 일찍 시작했구요. 골프에 주목하게 된 동기가 따로 있으셨는지요.
  『제가 남보다 빨리 골프를 시작했어요. 1969년인가 제가 모시던 李東寧의원의 채를 물려받아 지금은 없어진 서울 능동의 서울CC에서 머리를 올렸으니 벌써 35년이나 됐네요. 덕분에 선진국에선 골프가 스포츠이자 미래산업으로 각광받는 걸 진작 알았지요. 방송과 스포츠는 사실 뗄 수 없는 동반자관계구요. 미국의 경우 미식축구와 골프, 야구, 농구의 인기는 방송중계와 관련이 높습니다. 방송사는 스포츠 중계를 통해 많은 광고를 얻구요』
  『그래서 SBS 출범 때부터 골프 중계를 정규편성에 넣었지요. 방송과 골프계 모두 윈윈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했고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다고 확신합니다. 현재는 물러났지만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의 초대 총재를 맡아 짧은 기간에 한국 농구의 프로화를 이루고, KBL이 프로농구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지요. 지난해 10월 평양의 유경 정주영체육관 개관행사 때 SBS가 국내 방송사상 처음 대규모 중계진을 보내 전국에 생중계할 수 있었던 것도 방송과 스포츠의 관계를 중시해온 결과라고 봅니다
구력 35년·핸디 16·홀인원 3번 실력 막강 
“ 관련규제 철폐·훈련장 건립이 최대 과제“ 
- 대한골프협회장으로 취임하시면서 골프장 중과세 문제 해결과 훈련장 건립을 공약으로 내거셨는데요. 구체적인 복안을 갖고 계시는지요.
  『골프를 좋아하고 골프채널도 갖고 있고 골프장도 운영하다 보니 우리 나라 골프산업의 문제점이 뭔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다 싶은 두 가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골프인구만 4백만명에 달하는데 골프장은 퍼블릭을 합해 1백81개밖에 되지 않으니 부킹난은 심화되고 그린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상황이 계속되는 겁니다』
  『매년 10만명 이상 해외로 골프여행을 떠나는 것도 골프장 중과세가 신규 골프장 건설을 어렵게 해 수급불균형이 심화된 탓입니다. 정부에서도 문제를 알고 있는 만큼 문화관광부를 비롯 관련부처를 적극 설득해 개선하도록 힘쓸 작정입니다. 훈련장 건립은 많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만큼 머지않아 가시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박세리, 최경주 등을 배출한 골프강국에 협회 등록선수만 6천명이상인 나라에 대표훈련장 하나 없는 건 말도 안되는 것 아니겠어요』
  - 홀인원을 하면 흔히 재수가 좋다고들 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홀인원은 솔직히 「운7 기3」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홀인원을 할 수 있는 운이라면 다른 운도 좋겠지요. 평생 한번 하기도 힘들다는 홀인원을 3번이나 했으니 골프운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남서울 8번홀에선 정확히 맞아 들어갔고 두 번은 굴러가다 들어갔는데 분명한 건 홀인원을 했을 땐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에 있었다는 겁니다. 의도하던대로 샷이 이뤄지고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말이죠. 사업도 악재 없이 승승장구하던 때였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치기도 많이 쳤구요, 가끔 쳐선 실력향상은 물론 행운을 맞기도 쉽지 않습니다. 나이도 젊을 때여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골프가 인생에 주는 교훈은 어떤 것인지요.
  『얼마 전 존 댈리 선수가 미국 PGA 뷰익인비테이셔널에서 9년만에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3번의 이혼, 알콜 중독, 네 번째 부인의 마약거래와 도박혐의 등 숱한 좌절을 겪은 선수가 모든 시련을 이기고 멋지게 재기한 거죠.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게 인생인데 댈리 선수는 그 어려운 걸 해내며 많은 팬에게 감동을 준 겁니다.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었지요』
  『인생도 골프도 과욕은 절대 금물입니다. 거리를 내려고 잔뜩 힘을 들이고, 꼭 이기려 마음먹으면 먹을수록 안되는 게 골프입니다. 인생길에도 굽이굽이 고비가 있듯 골프에도 성패를 가늠할 고비가 있습니다. 이 때 자신의 능력과 상황에 대한 정직하고도 냉정한 판단이 있어야 때로는 돌아가고, 때로는 정면돌파하자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정직해야 한다는 말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나 골프나 자신과 세상에게 정직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서울대엔 계속해서 장학금과 건물 신축기금을 기부하시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는데요. 최근엔 서울대 출신 언론인 모임인 관악언론인회에도 5천만원의 기금을 출연하셨구요.
  『서울대엔 모교에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차원에서 미력이나마 계속 지원하고 있습니다. 법대 낙산장학회에 10억여 원의 장학기금을 기부했고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과 「법학 연구동」 건설에 7억원을 냈습니다. 법대에서 「법학연구동」 6층 국제화상 회의실을 「서암홀」로 명명해준 건 큰 영광이죠. 관악언론인회 기금 출연도 같은 맥락입니다』
  - 서암학술재단과 SBS문화재단을 통해서도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저는 기업경영의 목적은 이윤창출뿐만 아니라 사회정의 실현에도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서암학술장학재단과 SBS문화재단은 그 신념을 구체화시킨 거죠. 서암재단은 1989년 기금 1억원으로 조성, 지금까지 40여 개 단체, 1천3백여 명에게 총 1백28억원을 지원했습니다. 매년 기금 출연을 늘려 현재 2백34억원의 기금을 확보해놨습니다. SBS문화재단은 방송사업에 따른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려 1993년 3억원으로 설립, 지금까지 1백42억원을 학술 언론 문화예술 분야 인재들에게 지원했습니다. 올해도 20억원 가량 지원할 예정입니다. SBS재단의 규모는 현재 3백50억원입니다』
  - 하버드대에도 지원을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SBS문화재단과 하버드대, 한국국제교류재단과의 3자 협약에 따라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모두 3백만달러를 지원했습니다. 이 돈은 하버드대에서 한국 또는 동아시아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 지원을 위한 겁니다. 이 기금을 지원받는 교수들은 「윤세영교수직」이라는 이름으로 올 가을부터 강의하게 돼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 10만달러를 지원했습니다. 아들이 하버드대를 다닌 인연도 있지만,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한국을 보다 심도있게 연구하도록 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의도였지요』
  - 서암(瑞巖)이라는 호는 어떻게 지으셨는지요.
  『흔히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유명한 분이 지으신 게 아닌가 생각하시는데 실은 제 처가 지어줬습니다. 처가 서예를 열심히 해 한문에 조예가 있고, 공모전 입선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상서로울 서자에 바위 암자로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입니다. 뜻이 좋아서인지 제 인생이 좋은 분들과의 좋은 인연 속에 늘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개된 듯해 호에 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 고향이 강원도인 점에 착안해 그냥 감자바우라는 뜻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 SBS 신년사에서 「디지털화, 국제화, 공영성 강화」를 강조하고 「고품격 경제프로그램 발신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이 문제는 국내 방송사 어디나 당면한 현안이자 절박한 시대적 요청입니다. SBS가 전 임직원의 땀방울로 지은 목동 신사옥은 디지털시대 한국 방송의 메카로 자리잡으리라 확신합니다. 경제는 시대적 화두입니다. 대통령도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는 게 우리 경제의 현주소구요. 방송사로서 피상적인 경제상황 보도에 그치지 않고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달성하자면 어떤 아젠다를 설정하고, 어떻게 힘을 모아야 할 지 고민해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뜻이지요. 시대적 과업인 경제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SBS는 올해 고품격 경제방송의 주역을 자임할 겁니다』
  - 최근 새 사옥으로 이전하신 뒤 제2창사를 선언하시면서 SBS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겠다고 발표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저는 대주주로서 이사회에만 관여하고 방송사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김으로써 한국적 방송경영의 모델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창립 후 14년간 대표이사직을 맡았지만 사장은 3년밖에 안했어요. 결정한 건 오래 됐는데 발표가 늦은 셈이지요』
  - SBS의 경우 창립 초기부터 장애인을 배려하는 프로그램이 많았습니다. 최근엔 다소 뜸한 듯합니다만, SBS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복안을 갖고 계신지요.
  『창립 초 「사랑의 징검다리」라는 장애인 관련프로그램을 주1회 고정편성했지요. 지금도 공익방송으로서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는 생각엔 변함 없습니다. 시청율이나 광고주 문제 등 어려움이 있지만 계속 신경써야겠지요. 무한경쟁 시대에 독자적인 경쟁력을 어떻게 제고하고 유지하느냐는 방송사 경영의 핵심적 과제입니다. 재미와 품격, 공익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건 어렵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숙제입니다. 브랜드 이미지는 한 순간에 형성되거나 개선되는 게 아니라 꾸준한 실천을 통해서만 만들어집니다. 긴 안목으로 실천해갈테니 동문 여러분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 기업인, 체육인, 언론인 등 다양한 일을 해오셨는데,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기업인은 이윤을 추구하고, 체육인은 정정당당한 승리를 목표로 하고, 언론인은 공익을 우선합니다. 각각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죠. 하지만 어떤 분야든 건강한 상식을 기초로 원칙을 지켜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왔습니다』
  - 서울대 동문으로 살아오시면서 좋았던 점은, 혹은 불편하셨던 점은.
  『불편했던 건 없었고,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언제나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 자긍심을 불어넣었지요. 사회 각 분야에 서울대 동문이 포진해 있어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큰 혜택이었다고 보구요. 하지만 평생을 견지해온 정직과 원칙, 자존심이야말로 서울대 출신으로서 기업경영에 헌신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원천입니다』
  - 서울대 동문, 특히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SBS에도 많은 서울대 동문 후학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맡은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마음 든든하기 그지없지요. 하지만 서울대 출신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를 나왔다는 데 자족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21세기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서울대 출신이라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며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지난 50년 대한민국 성장의 견인차였던 서울대 동문들이 격변하는 이 시대의 리더로서 계속 활약하자면 글로벌 시대에 대비해 국제경제와 국제정치의 흐름을 놓치지 말고 외국어 실력을 열심히 닦았으면 합니다』
*바쁘신데 긴 시간동안 솔직하고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