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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2004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힘들게 천막촌 임시교사에 입학

자장면 나눠 먹자던 친구 그리워
郭厚燮(56년 師大卒)前서울시 부시장 경남고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나라의 운명이 최후의 마지노선인 낙동강 전선에 목이 매달려 있을 때 정부마저 최후의 보루인 부산에 피난을 왔으며,
서울의 유수한 대학들이 대부분 부산에 옮겨와 있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공산군을 막기 위해 고등학생 마저 교모를 쓴 채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선에 나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바쳤다. 필자는 6·25전쟁 후 곧 내 고향 거창에 피난을 가 있다가 다음해 봄 복교령이 내려서야 부산에 왔기 때문에 참전 기회는 갖지 못했다. 소용돌이치는 전쟁의 와중에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때 내 형편으로 대학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여러 친지들의 조언을 받은 끝에 고교 영어담당 유영준 선생님의 강력한 권고와 격려에 용기를 얻어 비장한 결의로 대학진학을 결심했다. 목표 학교는 서울대로 정했으나 내가 원하는 전공분야와는 관계없이 우선 학비가 제일 적게 들고 졸업 후 취직하기 쉬운 요건을 고르다 보니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선택하게 됐다.  8 대 1에 가까운 경쟁을 뚫고 들어간 학교는 부산 구덕수원지 근처에 있는 천막촌 임시 교사였다. 비가 오면 책상 위에 빗물이 떨어지고 바람에 나부끼는 천막소리에 강의 조차도 듣기 힘들 때가 많은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수업 분위기 또한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나의 경우 주경야독 식으로 학업을 꾸려 나가는 처지였기에 출발부터 학생 본연의 태세로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르바이트로 수업 결강이 잦다 보니 친구들에게 대리출석과 강의 노트를 부탁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생존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모자라 많은 친지, 친구들로부터 여러 형태의 도움을 받으며 힘겨운 학창생활을 꾸려 나갔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면서 정부가 환도하게 되고 우리 학교도 용두동에 임시교사를 마련해 전시수업을 계속했다. 학생들은 모이면 전쟁이야기와 사는 걱정, 학비 걱정 이야기가 대부분이니 늘 불안과 가난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우들간의 우정은 두터워 서로 도와주는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지냈다.  그러나 필자 같은 사람은 베푸는 것보다 주로 받는 편이어서 어쩌다가 학교에 나가 자장면 점심 한 그릇 나눠 먹자는 친구가 있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가끔 친구 집에 가서 친구 어머니의 따뜻한 격려의 말과 함께 저녁이라도 먹고 오는 날이면 그 날은 행복했다. 메마른 삶을 영위하고 보니 언제나 가정의 정이 그리워 정신적 부모로서 교분을 나누며 지내는 분도 있었고 특히 모교 학장이셨던 高光萬선생(문교부 장관 역임 후 미국 이민) 내외분의 사랑과 격려는 유약한 내 마음을 다스리는데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어쨌든 지난날을 회상하면 필자의 대학시절은 암울한 터널을 통과하는 생존 게임이었고 격동기를 살아온 그 시절의 「고난사」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