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호 2006년 4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모든 스포츠에 똑같이 응원합시다
李星勳(독문93-01)
SBS 스포츠본부 기자
3월 13일 저녁 7시 20분. 애너하임 에인절스 스타디움의 밤하늘에 이승엽 선수의 총알 같은 타구가 날아 오릅니다. 1백30미터를 날아가며 우중간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뒤, 어안이 벙벙한 미국 관중들 사이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궤적. 백스톱 뒤 기자실에 앉아 있던, 아니 타구가 맞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모든 이들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화가들이 피카소를 대하듯, 혹은 음악가들이 모차르트를 대하듯, 돈트렐 윌리스는 머나먼 동쪽에서 TV로만 숭배해마지 않던 존재였는데….
그 돈트렐 윌리스가 마운드 위에서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냉정을 찾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몇 초 뒤에야 한국 기자들은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단어를 뱉을 수 있었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그랬더니 기자실을 지키고 있던 애너하임 에인절스 구단 직원들이 일제히 한 마디 하더군요.
"기자실에서 응원하지 마세요. 플리즈."
그렇습니다. 메이저리그만이 야구의 전부인 줄 알고 있던 이들에게, 국가대항전의 이 피끓는 드라마는 낯설 수밖에 없었겠지요. 안타 하나 하나에 리틀리그 선수들처럼 흥분하던 도미니카 선수들의 정열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1루를 향해 몸을 던지다 시즌을 접어야할지도 모르는 큰 부상을 당한 김동주 선수의 희생이, '아이스 쿨'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관중을 향해 욕을 해대던 이치로의 절박함이, 야구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의 야구 관계자들에겐 그저 낯선 풍경일 뿐이었던 겁니다.
미국에서 현역 최고의 야구 기자로 꼽히는 ESPN의 피터 개먼스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답변은 이런 거였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 야구의 높은 기량과 존귀함을 깨닫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인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야 한국이, 쿠바가, 이렇게 야구를 잘 하는구나'라는 걸 느꼈다는 게 중요합니다. 비록 정치는 아니지만, '상호 존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죠. 다른 나라를 존중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미국으로서는, 이번 대회가 야구를 통해 '상호 존중'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대회 주최측도 이 '상호 존중'을 배운 걸까요. 미국 기자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 기자들의 '경기 중 응원'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생각해 보십시오. 이종범 선수의 적시타가 터지는 순간 어떤 한국 기자가 황홀함을 참을 수 있었겠으며, 어떤 일본 기자가 육두문자를 억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대회 주최측은 '기자실 응원 금지 방침'을 포기하게 됩니다.(물론 대회 운영의 많은 부분 -대진표, 심판 운영 등 -은 '상호 존중'과 거리가 멀었지만요)
그런데 얼마 안 가, 국가대항전에의 몰입이, 정확히 말해 '국가대항전에만 몰입'이 옳은 건지에 대해 딴 생각이 들더군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16강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만큼 강팀이 됐지만, K리그 경기장은 여전히 사람보다 파리가 더 많습니다. Team Korea에 열광하는 대중(축구팬이 아니라 대중이라 부르는 게 정확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이 아니면 대한민국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요즘이지만, 자신이 응원하는 K리그 팀의 승리에 황홀했다는 축구팬을 찾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야구라고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현대 유니콘스의 수원 홈구장은 미국 리틀리그 경기장보다 관중이 적습니다. 7월이 지나며 포스트시즌 진출이 힘들어진 팀의 경기에선 자전거로 관중석을 누빌 수 있을 정도이지요.
'국내 프로스포츠가 살아야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물론 결론적으론 그렇습니다만) '내 팀을 응원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오승환 선수가 아라이, 다무라를 연속 삼진 처리하는 순간 행복하셨습니까? 삼성 라이온스의 팬이 되어보세요. 1년 내내 아드레날린에 절어 살 수 있습니다. 손민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들을 당당히 제압할 때 스스로 자랑스러우셨습니까? 사직구장으로 가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정열적인 흥분의 도가니를 여섯 달 동안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술자리에 덜 가서 아낀 돈으로 내 아이에게, 혹은 조카에게 유니폼을 입혀 함께 경기장을 찾아보세요. 국가대표팀을 TV로 응원하는 것에 버금가는 짜릿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야구장이든, 축구장이든, 농구장이든, 프로게임장이든…. 그 어디든 승부가 펼쳐지는 곳에, 누군가를 응원해 보세요. Team Korea에만 몰입하는 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사는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