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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2006년 4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나라 장래 걱정하며 '牛'모임 활동 적극적


대학천 개나리, 마음속 수채화로 남아

 개나리가 휘 늘어진 4월의 거리를 거닐면, 나는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46년 전 1960년 4월의 대학로를 떠올리며 아련한 회상에 젖곤 한다.

 필자가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해 청운의 뜻을 품고 당시 의과대학과 함께 함춘원 캠퍼스에 자리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해(그 당시는 입학이 4월이었다) 처음 만난 대학본부와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을 끼고 돌던 대학천 변(지금은 복개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에 만개해 도열한 개나리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마음속의 수채화이다.









李奎鎬(약학60-65)
해동약국 약사
약대동창회 부회장
60년대 약학대학 전경 : 중앙 건물은 강의실, 
오른쪽 아래 단층 건물은 실험실, 왼쪽 가건물은 식당

 이렇게 아름다운 개나리와 함춘원과 문리과대학 캠퍼스 안팎에 만개한 마로니에 향기 속에서 시작한 대학생활은, 대학생활의 맛도 익히기 전에 당시 3.15 부정선거로 흐트러진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모든 서울대생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국회(지금의 서울시 의회건물)로, 청와대(당시 경무대)로 함성을 질러 李承晩대통령을 하야시킴으로써 일궈낸 4.19혁명, 그 다음 해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넌 무장 군인에 의해 발생한 군사 쿠데타 등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어렵고 혼란한 시대에 보내야만 했다.

 우리 나라 전체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보낸 대학 시절 중에서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 블록형 약학대학 가교사에서 유화수소가스, 현미경과 씨름하면서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선후배가 모여 '牛'모임이라는 서클을 만들어(이는 후에 공화당의 상징인 '소'와는 완전 별개임) 우리 나라의 미래는 농촌에 있음을 인식하고, 농촌 봉사활동에 진력한 일이다.

 지금은 70고개를 바라보는 金榮浩.金容瓚.金重善동문 등 여러 선배와 얼마 전 타계한 약업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張相吉동문을 비롯한 후배들이 그 당시 경부선에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유일한 기차역인 경남 양산군 원동면 이천리(배내)를 이상향으로 삼고, 해마다 배낭을 메고 그 곳을 찾아 농촌 봉사활동을 한 일들은 가슴 뿌듯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이 '소'모임은 계속 후배들에게 이어져 오다가, 농촌이 어느 정도 자립할 때 즈음해 중단됐으나 그 정신만은 지금까지 계승돼오고 있으며, 우리 나라 약업계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소'모임 동지들은, 졸업 후에도 매년 11월 8일 '소'모임 창립기념일에 모두 모여 그 옛날의 추억을 반추하곤 한다.

 참 세상이 많이 변하고, 대학로도 많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