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호 2006년 3월] 기고 감상평
붓글씨와 생활의 멋
柳 熙 根
(사회사업64-68)
前전주MBC 사장.
대명콘도 고문
인기 있는 영화배우나 탤런트나 가수가 입어서 한창 유행하던 패션도 1년만 지나면 낡은 것이 돼 버리는 게 현대사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천년 전부터 내려 온 붓글씨가 요즘에도 인기가 있다. 왜 그럴까?
백 미터 달리기나 마라톤 같은 기록경기는 10분의 1초 단위로 경쟁하고, 컴퓨터는 그 성능에 있어서 백분의 1초 단위로 경쟁한다. 그런데 가장 느리고도 느린 붓글씨, 옆에서 바라보면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붓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이 든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던 붓글씨, 그래서 고리타분하다고 생각되는 붓글씨. 그런데 한창 패기가 넘쳐 팔팔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붓글씨가 확대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인가?
자본주의 사회, 물질만능 사회,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등등. 오늘의 우리 사회를 규정짓는 단어들이다. 이러한 단어들에 비해서 붓글씨는 정반대되는 개념의 분야다.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고 생활의 여유를 가져다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딘가 허전한 우리의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워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붓글씨를 가까이 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붓글씨를 중국에서는 書法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書道라 부르고 우리 나라에서는 書藝라 부른다. 이것은 동양 3국 모두가 붓글씨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그러한 점에 비춰 볼 때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정신문화의 대표인 붓글씨 인구가 확대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골프, 테니스, 볼링, 등산, 낚시, 스키, 축구, 농구 등 현대사회에서는 취미도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고 수준도 발전돼 있다.
모두 다 활동적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등 나름대로 장점이 많다. 붓글씨는 정적이고 비활동적이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것처럼 생각한다. 더구나 벼루와 먹, 붓, 종이를 비롯해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돈도 많이 필요한 취미이다.
아마추어로서 웬만한 수준에 오르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시련과 인내가 사람을 옥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유혹을 많이 받는 것이 붓글씨다.
왜냐하면 글씨를 제대로 써서 즐거움을 얻는 기회보다는, 하면 할수록 "왜 이렇게 안 되나?" "나는 재주가 없어" "도저히 발전이 안 돼. 당장 그만 둬야지" 이런 소리가 더 많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글씨 인구가 계속 늘어나니 정말 희한하다. 사람들은 전시회장에 나와서 남이 쓴 작품을 보고 나면 "아!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쓸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붓글씨 문화의 전통과 향기가 우리의 정신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은은한 묵향의 정서적인 친근감이 우리의 가슴속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간과 피나는 노력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전시회를 가질 때의 기쁨과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당한 수준이다"라고 인정받았을 때의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붓글씨는 기록으로서 남는다. 자신의 수준이 점점 발전되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비교할 수 있고 기록이 남는다는 데 붓글씨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여기저기서 아는 사람들이 "나도 한 작품 써 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 느끼는 흐뭇함은 그동안의 많은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자신의 작품이 어느 개인의 안방이나 사무실, 회사의 출입문 정면에 걸려 있는 것을 봤을 때의 즐거움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까만 먹을 묻힌 붓끝으로 하얀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나갈 때, 정신은 집중되고 마음은 안정된다.
글씨를 흘려 쓰는 행서체를 쓸 때는 왕희지의 명필을 흉내내고 싶은 욕구가 솟아나고,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겨 쓰는 초서체를 쓸 때는 손과정의 명필을 흉내내고 싶은 충동이 내 영혼을 뒤흔든다. 골프나 등산 같은 동적인 취미에 정적인 붓글씨 취미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붓글씨는 요즘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인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앉으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명언이 있다.
붓글씨는 대개 서서 한다. 그러면서 왔다 갔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또 붓을 손에 쥐고 계속적으로 손놀림을 하니까 신경을 자극한다. 맨 처음 시작하기 위해 먹을 갈면서 손과 손목과 팔과 어깨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결국 온 몸의 혈액순환에 좋다는 얘기다. 정신건강과 육체건강 양쪽으로 좋다는 얘기다.
중국이나 일본에 갈 경우 만일 자신의 작품을 몇 점 가지고 가서 선물하면 대환영을 받는다. 이들은 서예 작품을 극히 좋아한다. 동양 3국의 문화가 한자 문화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빠르고 작품을 매개체로 해서 대화도 재미있게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과 일본인들과는 서예를 통해서 곧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붓글씨를 하게 되면서 더 가치 있는 일은 단순히 글자를 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태백이나 백낙천과 같은 과거의 유명한 시인이나 묵객들의 훌륭한 시와 문장을 자주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논어나 대학에 나오는 명언들을 접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과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는 모든 세계가 영어권 문화세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자문화도 겸비한다면 동서양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장점이 있다.
유인무속회(幽人無俗懷)
생각이 깊고 뜻이 높은 사람은 세속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