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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호 2006년 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홍콩 원정 시위'와 '다이나믹 코리아'


 홍콩 경찰이 한국 농민들의 시위에 대비해 교도소를 비우는 등 만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외신들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1천5백명이나 되는 우리 원정 시위대가 '투옥투쟁'이라고 벌이면 어떡하나 하는 불길한 예감 속에 떠나온 홍콩 출장길…. 출장 목적은 WTO각료회의 취재였지만, 정작 관심은 회의보다는 원정 시위대였다. WTO가 회의 전부터 목표수준을 대폭 낮춰 이미 '김빠진 회의'가 될 것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외신들의 관심도 한국 농민들의 시위에 쏠렸다. WTO 행사 기간 내내 개최국인 홍콩 TV에 비친 것은 WTO회의장인 컨벤션센터가 아니라, 우리 원정 시위대가 펼친 시위 모습이었다.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상 시위와 상복을 입은 채 펼쳐진 상여 시위, 그리고
촛불 시위, 삼보일배까지 각종 아이디어가 총동원된 '신기하고 놀라운' 기획 시위들. 여기에 빼앗은 방패를 되돌려주고, 집회장의 쓰레기를 치우는 시위대의 모습이 연일 언론에 집중 소개되면서 WTO 행사 기간 한국 원정 시위대는 '다이나믹 코리아' '제2의 한류'라는 극찬까지 들으며 홍콩 시민들과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鄭 仁 錫(정치87 ­92) 

KBS 경제과학팀 기자




 취재 중 만난 홍콩 시민은 이를 '축제 같다'고 했고,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는 시위대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반 세계화 활동가들이 한국 시위대의 율동을 따라 배우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고 '해상 시위' 등 모방 시위를 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정부 대표단의 한 관리는 원정 시위대가 수천만 달러 이상의 홍보 효과를 거둬줬다고 평가했고, 외국 대표단으로부터 관변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의심'과 '시샘'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회의 폐막을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 17일 밤, 원정 시위대가 '저지선 돌파를 위한 총력 투쟁'으로 투쟁 수위를 끌어올리면서 한국 시위대는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우려가 현실로 되면서 시위 상황을 취재해온 한국 기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올 것이 왔다", "결국은 … 역시나!"시위 상황을 생중계 해온 홍콩 TV에는 이제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용감하게 홍콩 경찰의 저지선을 무력화시키는 모습과 '해방구'로 변해버린 홍콩 시내 모습이 집중적으로 비쳐졌다. 화면 하단에는 '부상자 속출' '지하철 폐쇄' '차량통행 금지' '주민 접근 자제' 등 사태의 긴박성을 알리는 큼지막한 자막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윽고 홍콩 보안국장이 TV에 나타나 시위장소인 완짜이 주변에 대한 주민소개령을 내리며 홍콩법에 따른 시위 강제 진압 방침을 공표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각, 홍콩 경찰은 장갑차에 최루탄을 쏘대며 컨벤션센터 수십 미터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에 대한 강제 진압에 들어갔다. 홍콩에서 30여 년 만에 이뤄진 최루탄 발사, 시위대 천여 명이 순식간에 경찰에 포위됐고, 이들은 밤샘작업 끝에 전원 연행됐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시위대가 '백기 투항'을 선택하면서 우려됐던 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은 점이었다.

 12일간 진행된 이번 홍콩 취재는 그야말로 잠 한 번 제대로 자지 못한 최악의 해외 출장, 속된 말로 '홍콩 갔던 해외 출장 취재'였다. 그러나 귀국길에 나를 괴롭힌 것은 지칠 대로 지친 피곤함보다는 원정 시위가 남긴 낭패감과 씁쓸함이었다. "홍콩까지 와서 삼보일배나 하고 갈 수는 없다"며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천명의 시위대를 '볼모 아닌 볼모'로 내맡긴 시위 지도부의 행태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한 것은 농민의원 강기갑 씨가 홍콩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용기'였다. 시위 지도부의 일원으로 원정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강 의원은 폭력 시위 사태 뒤 기자실을 찾아 "농민들이 한 번 몸에 밴 관행을 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시위 문화가 바뀌어야한다"며 반성과 함께 소회를 토로했다.

 전용철 . 홍덕표 농민 사망 사건에 이은 홍콩 원정 시위 사태, 그리고 강 의원의 고백이 기폭제가 되면서 시위 문화를 바꿔야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급류를 타고 있다. '다이나믹 코리아'라고 했던가! 비록 천명의 시위대가 외국 경찰에 연행되고 일부는 재판까지 받는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이번 일이 관성에 젖은 시위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이를 위한 결단을 소망해본다.